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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4. 훙산인의 성지

Gijuzzang Dream 2007. 11. 17. 12:21

 

 

 

 

 

 

 (14) 훙산인의 성지

 

우리의 孝와 닮은 꼴…훙산인의 여신 숭배

뉴허량(우하량 · 牛河梁) 여신묘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 학계가 ‘여신은 훙산인(홍산인·紅山人)의 조상이며,

뉴허량은 훙산인의 신전이자 성지’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중국 학계는 아예 훙산인을 중국인의 ‘공동’ 조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훙산인은 동이족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중국 학계도 인정하는 바다.

그러니 뉴허량은 ‘동이족의 신전이자 성지’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도 비상한 곳일 수밖에 없다.





# 한반도에도 여신이…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여신상 같은 소조상은 지금의 만주 일대와 한반도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함북 청진시 농포동과 웅기군 서포항 유적에서도 소조인물상이 나왔다.

“특히 1956년 출토된 농포동 인물상은 허리를 잘록하게 좁힌 다음 그 아래는 다시 퍼지게 만드는 등

‘여신’의 인상을 지울 수 없어요. 둥산쭈이(東山嘴)의 임산부상을 연상시킵니다.

서포항 것은 가슴을 희화적으로 표현한 게 매우 인상적이고….”(이형구 선문대 교수)

랴오둥 반도 궈자춘(郭家村)에서 나온 소조상의 치켜진 눈과 광대뼈는

뉴허량 여신상 및 츠펑 시수이취안(西水泉) 유적에서 출토된 소조 여인상과 일맥상통한다.

옌볜 자치주 샤오잉쯔춘(小營子村)에서 출토된 뼈로 만든 인물상도

치켜올라간 눈매와 광대뼈 등 뉴허량 여신상과 비교할 수 있겠다.

과연 5500~5000년 전 여신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 숭배의 대상은?


뉴허량의 여신묘에서 출토된 조각상과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여신상’.

콕 집어 단정을 내릴 수 없다. 뉴허량의 여신 조각상을 보자.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이것은 인간을 신화한 것이다. 한마디로 인격화한 신(神)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학계는 이 사실적인 인물 조상이 조상 숭배의 우상이라고 해석했다. 또 하나 뉴허량 여신묘에서는 사람 크기의 3배, 2배, 등신대 등 ‘최소한’ 세 명의 여신상이 있었던 것으로 정리됐다.

여신의 지위가 최소한 3등급은 되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중국 학계는 ‘사람 크기 3배의 여신’이 주신(主神)이며, 이 주신을 다른 여신들이 호위하고 있는 형태라고 봐요. 이것은 조상 숭배의 대상도 굉장히 고차원적인 단계로 넘어갔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죠.”

하지만 조상 숭배만이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뉴허량 유적군은 이른바 제단 · 신전 · 무덤 등 이른바 단(壇) · 묘(廟) · 총(塚) 등이 3위 일체로 구성됐다.

제단과 무덤이 한꺼번에 조성된 적석총(제2지점)에서뿐 아니라 그곳에서 900m 떨어진 여신묘에서도 제사를 지냈다는 뜻이다.

“‘적석총+제단(2지점)’에서는 그곳에 묻힌 씨족의 조상에게 주로 참배하고, 여신묘에서는 요즘의 시제 같은 큰 제사를 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여신묘에서는 여러 씨족의 공동 조상 한 분을 모셨을 수 있죠.”(이교수)

이교수는 “제단과 여신묘를 보면 훙산인들의 조상 숭배가 얼마나 지극한지를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효(孝)사상의 원형이며 우리 민족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하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지모신에 대한 신앙이다.

제사유적인 둥산쭈이에서 나온 잉부(孕婦)상과 뉴허량 여신 모두 여성임을 잊지 말자.

“고대사회에서는 여성이 생육과 대지를 상징합니다.

지모신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풍년과 다산(농사를 지을 노동력을 상징)을 기원했어요.

이것은 농경 및 정착생활로 접어든 신석기인들로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핵심적인 요소는 뉴허량 여신묘와 적석총에서 나온 곰뼈와 곰형 옥기 등의 존재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웅녀(熊女)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웅녀는 바로 훙산인들이 모셨던 지모신의 원형일 가능성이 짙다는 점이다.


# 하늘과 땅의 통로를 이은 이는?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은 여신묘에서 조상과 하늘을 함께 모셨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장광즈(張光直)의 말을 들어보자.

“훗날 상나라(商·훙산인들의 후예) 때는 왕이 큰 일을 행할 때

무인(巫人)이 하늘과 교통하면서 복점을 쳐서 조상의 하명을 받았다.”

이것은 조상숭배와 하늘숭배가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쑤빙치(蘇秉琦)도

“뉴허량 유적군의 단 · 묘 · 총의 결합으로 볼 때

고대의 제왕들이 거행했던 교(郊, 야외에서 지내는 제사) · 료(燎 · 하늘신에게 제사),

그리고 체(조상신에게 제사)가 함께 이뤄졌을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또 하나 여신묘에 숨겨진 비밀을 들춰보면…. 바로 여신묘가 상당히 좁다는 것이다.

궈다순(郭大順)은 “여신묘의 총 면적이 100㎡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좁디좁은 면적에 몇 명의 여신들이 모셔져 있었고,

곰이빨 같은 것이 상징하는 동물신들이 포함돼 있다.

좁은 면적에 비해 너무도 풍부하고 방대한 유물의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엄청난 함의를 품고 있다.

이 좁고 폐쇄적인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의 특권층이었을 것이고,

심지어는 단 한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신묘에서 혼자 들어가 제사를 지낸 이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제정일치 사회의 왕(王)일 수도 있지요.”(이교수)

옛날 황제(黃帝)의 뒤를 이은 전욱이 신하 중여(重黎)를 시켜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버렸다(絶地天通)’는 기록이 있다.

그전까지는 누구나 하늘과의 통로로 왕래했는데, 황제 때 치우가 통로를 통해 황제에게 도전했다는 것.

그러자 황제의 후계자 전욱이 신과 인간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지었다는 것이다.

중국 학계는 바로 이런 고사(故事)가

뉴허량 여신묘와 훙산문화 영역에서 쏟아지는 다량의 옥기와 부합되는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끊어진 하늘과 땅의 통로는 누가 잇는가.

그것은 바로 천지를 농단한 전욱과 같은 왕의 고유권한이라는 뜻이다.


# 종묘의 원형

훙산인의 성지인 뉴허량 여신묘의 상상도.

1m가량 땅을 파 조성한 반지하식 구조로 신석기시대의 취락구조와 비슷하다.


뉴허량 여신묘는 지상 건축물이 아니라 90㎝~1m가량 땅을 파고 조성한 반지하식 건축구조로 돼 있다.

이것은 당대(신석기시대) 취락구조와 기본적으로 같다는 뜻이다.

인간이 살았던 주거지와 사당(신묘)의 구조가 같다는 것은

인간이 살았던 곳이, 바로 ‘신이 살았던 곳(神居之所)’이라는 뜻이다.

“이 역시 신의 인격화라 할까. 여신의 사실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죠.”

그러나 주거지의 기본구조는 같을지언정 건축물의 배치구조는 사뭇 다르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주실이 있고 측실이 있고 전후실이 있는 등 나름대로는 주부(主副) 관계가 뚜렷하고,

좌우 대칭, 전후 호응의 치밀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중국 학계가 바로 이것을 후대 종묘(宗廟)의 원형이라 판단하는 겁니다.

일반 주거지와는 다른 후대의 전당(殿堂)과 종묘 배치의 물꼬를 튼 것으로 본거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인 ‘이아(爾雅)’의 ‘석궁(釋宮)’편은

“신묘(사당)는 동서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해놓았는데, 바로 뉴허량의 여신묘 구조와 부합된다.

종묘(宗廟)는 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부계 씨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시작되었으리라.


# 훙산인의 성도(聖都)


기자는 여신묘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기면 벗길수록 점점 빠져들었다.

 

이형구 교수가 한가지 수수께끼를 냈다.
“왜, 이 뉴허량 인근에서는 훙산인들이 살았던 주거지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듣고보니 그랬다.
“무덤과 제단, 신전 등 단 · 묘 · 총 3위 일체로 갖춰졌는데

뉴허량 유적군을 기준으로 100만㎡ 이내에서 어떤 주거지 유적도 확인하지 못했거든.”

중국 학계는 고민 끝에 해답을 풀었다.

즉 뉴허량은 명실상부한 종묘의 원형이며,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제사의 중심지였다는 것.

이는 한 씨족과 부락 단위를 넘어선 단계라는 것.

즉 이 뉴허량은 훙산문화 공동체가 더불어 사용했으며,

그들이 함께 숭배한 선조들의 성지였다는 것이다.

“훙산문화 공동체가 신성시했던 곳이니 그 주변에 주거지를 세우지 못했겠지.

생각해보면 아주 상식적인 답이죠.”

장광즈는

“상나라 때 종묘가 중심이 된 성도(聖都)와 사람들이 살았던 속도(俗都)의 구별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훙산문화 시대에 이미 고국(古國)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게 쑤빙치의 견해이고 보면,

뉴허량은 곧 훙산인들의 성도(聖都)였던 것이다.

결국 쑤빙치를 중심으로 한 중국 학계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뉴허량 여신은 5500년 전 훙산인들이

진짜 사람을 토대로 만든 신상이지, 후세 사람들이 상상해서 창조한 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훙산인의 여자 조상이며,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이다.”

(중국문물보 · 1989년 5월12일자)

그러나 쑤빙치 스스로도 인정했듯 발해문명을 꽃피운 훙산문화는 동이의 문화이다.

 

기자가 만난 쉬쯔펑(徐子峰) 츠펑대 교수의 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왕권국가였고, 랴오허 문명(발해문명)은 복합적인 신권국가였던 것 같다.

차하이 · 싱룽와 문화(BC 6000년 전)에서 훙산문화(BC 4500~BC 3000년)에 이르기까지….

용형 돌무더기와 옥결이 출현하고(차하이 · 싱룽와) 곰과 용, 새를 형상화한 옥문화가 꽃피고,

신전과 제단, 적석총 등 제사유적이 출현하고(훙산문화)…. 신권 중심의 문화였다.”

쉬쯔펑은 이어 “황허문명과 랴오허 문명은 훗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치우와 황제의 싸움은 바로 양대 문명의 충돌이자 습합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형구 교수의 한 마디.
“발해문명의 창시자인 동이의 족적은 엄청납니다.

이 훙산문화는 사방으로 퍼져 발해문명을 꽃피웠고, 남으로는 중원의 황허문명과 만나

드디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것이 훗날 상나라가 되는 거고….”
- 2008년 01월 04일
- 뉴허량 · 선양 / 이기환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