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빗살무늬 아닌가요? 아! 여기 덧띠무늬(토기)도 있네.”
차하이(사해 · 査海)와 싱룽와(흥륭와 · 興隆窪) 마을은 물론 신러(신락 · 新樂), 뉴허량(우하량 · 牛河梁) 유적을 둘러본 기자는 깜짝깜짝 놀랐다. 싼줘뎬(삼좌점 · 三座店)과 청쯔산(성자산 · 城子山) 유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발길에 부딪히는 토기편을 주우면 어김없이 관찰되는 빗살무늬와 덧띠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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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펑대 유물관리실에 전시된 싱룽와 마을 출토 빗살무늬 토기들.
덧띠-현문-덧띠-현문-빗살문-사격문-편직문 등
다양한 문양을 차례로 새겨넣었다. <츠펑/김문석기자> |
두 말 할 것도 없다. 기자가 금방 다녀온 차하이와 지금 서있는 이 싱룽와는 8000년 전 동이의 마을. 랴오둥(遼東) 선양시의 신러유적과 동이의 문화가 꽃피운 훙산문화의 본거지 뉴허량 유적도 마찬가지다. 이미 탐사단이 살펴봤던 싼줘뎬과 청쯔산은 BC 2000년 고조선의 영역일 가능성이 짙은 곳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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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지(之)자 문양을 새기는 방법. |
기자는 이제서야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그토록 “우리 신석기 문화의 고향은 발해연안이며, 시베리아가 절대 아니다”라면서 가슴을 치며 끈질지게 주장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빗살무늬는 과연 무엇이고, 시베리아 설은 또 무엇인가.
신석기 문화의 상징
빗살무늬 토기. 고고학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빗살무늬 토기’라 하면 금방 알 것이다. 초기 동북아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지표유물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수렵 및 채집생활로 이리저리 떠돌던 구석기시대를 지나(약 1만년 전)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을 창조해낸다. 바로 토기이다. 토기의 발명은 빙하기를 극복한 인류가 정착 및 농경생활을 시작했으며, 비로소 문명의 새벽을 열어젖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한 곳에 모여 살면서 무리를 이루고, 씨족을 형성했으며, 훗날에는 부족, 그리고 더 나중에는 국가를 이뤘다.
물론 동북아인들이 창조한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만은 아니다. 토기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와 덧띠무늬 토기(토기 겉면에 덧띠를 두른 토기) 등도 있다. 요즘들어 한반도에서 잇달아 확인되는 덧띠무늬 토기도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빗살무늬 토기가 단연 각광을 받아왔다. 빗살무늬 토기는 토기의 표면을 머리빗 같은 시문구(施紋具)로 긋거나 찍어 무늬를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형구 교수에 따르면 빗살무늬 기법에는 빗점무늬와 좁은 의미의 빗살무늬가 있다. 빗점무늬는 빗살로 그릇의 표면을 점점이 찍는 것이며, 좁은 의미의 빗살무늬는 빗살로 사선, 평행선, 곡선 등 갖가지 기하문을 그릇 표면에 그린 토기를 말한다. 빗살무늬의 종류로는 이른바 ‘지(之)자문’, 즉 지그재그형 빗살무늬와 ‘사람 인(人)자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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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룽와(왼쪽)와 함북 서포항에서 나온 빗살무늬 통형관.
기형과 아가리 모양과 문양이 비슷하다. |
철옹성, 시베리아 기원설
“빗살무늬를 쓰던 사람들은 시베리아, 몽고의 신석기 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각지의 문화를 발전시켰다.”(1983년판 국사교과서)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빗살무늬 토기를 쓰던 사람들이 시베리아에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한국고고학개설’ 73년판)
최근까지도 빗살무늬 토기의 기원은 유럽이며, 시베리아~몽골·만주~한반도로 건너왔다는 설이 우리 학계를 지배해왔다. 가히 철옹성 같았다. 불과 5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이 펴낸 도록(2002년간)을 보면 극명해진다.
“한반도 신석기문화는 기원전 8000년 시베리아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고아시아족(고 시베리아족)들이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 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이주해오면서부터다. 빗살무늬를 비롯한 출토 유물은 내몽고, 바이칼호 주변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연관 관계를 갖고 있고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뿌리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시베리아 기원설의 근거가 된 토기 유형은 이른바 오목점 빗점무늬 토기문화였다. 이 문화는 주로 동부 유럽과 시베리아 삼림지대, 즉 볼가-올가지방에서 유행했다. (6400~4500년 전)
시베리아 전래설을 처음 주장한 것은 일본인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였다. 이형구 교수는 “후지다가 1930년대 한반도에서 출토된 새김무늬(선무늬의 일종)를 유럽과 시베리아에서 보이는 토기와 연결시켜 즐목문(櫛目文) 토기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견해가 70여년간 줄곧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일제관학의 퇴출
그런데 2005년 용산시대를 맞아 새롭게 펴낸 국립중앙박물관의 도록은 180도 바뀐다.
“신석기인들은 처음엔 가까운 지역과 필요한 물자를 교류하다가 점차 일본 열도, 중국 동북지역, 러시아 연해주 등으로 범위를 넓혀갔다. 빗살무늬 토기는 약 6500년 전 중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난 포탄 모양이다.”(2005년판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이형구 교수는 “그 영역을 여전히 ‘한반도’로 묶어두었지만 일단 시베리아 기원설을 완전히 삭제한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일제시대 후지다가 제기한 견해를 엎고, 민족문화의 자생설을 강조했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인 역사 인식의 전환이라는 평가다.
“국가를 대표하는 공간물, 즉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이 일제관학에서 유래된 외래전래설을 떨쳐낸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죠.”(이형구 교수)
사실 1970년대 후반부터 발해문명을 연구해온 이교수는 줄기차게 ‘신석기 문화의 본향은 발해연안’이라고 주장해왔다. 1970년대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발해유역의 신석기 시대 자료를 토대로 ‘시베리아설의 허구’를 논증해온 것이다.
“시베리아 빗살무늬 토기의 연대는 빨라봐야 BC 4500년이지만, 싱룽와와 차하이에서 보듯 발해연안 빗살무늬 연대는 BC 6000년까지 올라가잖아요. 1000년 이상 차이가 나는데 무슨….”
네이멍구 츠펑 싱룽와(위 왼쪽)와 강원 고성 문암리(위 오른쪽),
함북 굴포리 서포항(아래)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들.
기형과 문양의 토기들이 매우 흡사하다.
동이의 영역에서 속출한 빗살무늬
발해만 유역에서 빗살무늬 토기 문화가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 73년 신러유적에서 BC 5300~BC 4400년으로 편년되는 지(之)자형 토기가 확인된 것이다. 이후 76년 황허 하류인 허베이(河北)성 우안(武安)의 츠산(磁山)유적과 77년 페이리강(裴李崗) 유적에서 잇달아 之자와 人자 토기가 확인됐다. 연대는 BC 6000~BC 5500년이었다.
이런 형태의 토기들은 훙산문화의 본거지인 둥산쭈이(동산취·東山嘴·1979년)와 링위안(凌源)현 뉴허량 유적(1984·85년)에서도 잇달아 확인됐다. 이런 가운데 80년대 초반 동이의 본향인 차하이-싱룽와 마을에서 8000년 전 사람들이 새긴 정교한 빗살무늬 토기들이 확인되자 중국 학계도 깜짝 놀란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랴오둥 반도 최남단 섬인 샤오주산(小珠山)과 다롄(大連)시 뤼순(旅順)의 궈자춘(郭家村)에서도 之자, 人자형 토기들이 속출했다.
빗살무늬 토기들이 나온 곳들을 살피면 이른바 발해문명권, 다시 말해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이족의 영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인(人)자형은 한반도 압록강·대동강·재령강·한강유역은 물론 두만강과 동해안, 그리고 남해안 등 전국적으로 분포되고 있어요. 지(之)자형은 평북 의주읍 미송리 동굴유적, 경남 통영 상노대도, 김해 수가리 유적에서 보이고…. 빗점무늬는 대동강의 궁산·남경유적, 재령강의 지탑리 유적, 한강유역의 암사동 유적, 동북부의 서포항 유적 등에서 확인됩니다. 한반도 전역을 포함한 발해연안이 바로 빗살무늬 토기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이형구 교수)
또한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옥결(옥귀고리)이 나온 강원 고성 문암리(BC 6000년)와, 양양 오산리(BC 5000년)에서는 초기 신석기 문화의 양대토기인 덧띠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가 함께 나오기도 했다. 문암리 유적을 발굴한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차하이-싱룽와에서 나온 유물을 본 결과 문양을 그려넣은 기법이나 토기의 기형이 문암리와 상당히 유사하다”면서 “발해연안과 한반도가 같은 문화권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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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년 예술의 정수
또하나 강조할 부분은 빗살무늬 토기의 예술성. 이형구 교수는 빗살무늬 토기를 “8000년 전 예술의 정수”라고 극찬한다.
“신석기인들은 토기를 요즘으로 치면 화폭으로 여기고 빼어난 예술감각을 자랑했어요. 크게 상·중·하로 화폭(토기표면)을 나눠 3~7단까지 구성하여 갖가지 문양을 새겼어요. 상부는 빗금, 배부분은 갈지자, 밑바닥은 선무늬…. 뭐 이런 식으로 예술적인 욕구를 정교하게 표출한 거죠.”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토기 하나에 눌러찍은 압인무늬와 빗살무늬와 덧띠무늬를 동시에 표현했으며, 무늬 자체도 직선 혹은 활무늬, 之자무늬, 마름모무늬, 교차무늬, 그물무늬, 번개무늬, 꽃무늬 등 매우 다채롭다”고 극찬했다. 이런 예술적 감수성은 한반도 출토 토기에도 그대로 투영돼 있다.
차하이-싱룽와에서 확인된 계획도시를 방불케 하는 주거지와 빼어난 예술감각을 표현한 빗살무늬토기, 그리고 신앙의 상징인 용과 옥결까지….
저명한 중국 고고학자인 쑤빙치가 “(차하이-싱룽와 문화는) 문명의 시작을 알린 표지이며, 중화문명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던 이유다.
한반도를 극복하라
7월27일 저녁 6시20분. 싱룽와를 떠나는 기자는 동이의 본향을 짙게 물들인 석양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이제. 우리 역사를 살필 때 ‘한반도 신석기 문화’ ‘한반도 청동기 문화’라 해서 ‘한반도’라는 좁은 틀로 가두면 안되지 않을까. 올해 초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시작’과 관련된 개정 국사교과서 논쟁도 역시 ‘한반도’라는 좁은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빚어진 것은 아닐까.
8000년 전 동이는 결코 한반도라는 좁은 영역에서만 살지 않았을 것인데…. 발해연안에서 출발해서 황허유역을 포함한 산둥반도, 지금의 만주 일대와 한반도까지를 누볐을 것인데….
〈싱룽와/ 이기환 선임기자〉
〈동영상/ 이다일기자 crodail@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