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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 사천왕사를 지은 까닭

Gijuzzang Dream 2008. 8. 23. 20:25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24)-(25)

 

 

 

 

 사천왕사를 지은 까닭 

 

 

ㆍ당나라 횡포 휘둘리던 신라 구국의 뜻을 사찰에 담다

당나라 침략의 급보를 받고 구국의 일념으로 세운 사천왕사.

신들이 노닐던 신유림(낭산)과 선덕여왕의 전설이 담긴 선덕여왕릉, 그리고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조성한 망덕사지 등 1400년 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유적들이 한꺼번에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671년 7월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신라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낸다.

“~슬프다. 예전에는 충성과 의리를 다하더니 이젠 역신이 되었구나.

이제라도 겸손한 의리를 회복하고 순종한다면 제사와 사직은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 총관 설인귀)

이것은 잘못하면 나라가 망하는 수가 있으니 좋은 말할 때 무릎을 꿇으라는 협박이었다.

문무왕이 답신을 보낸다.



“당(唐)군 먹여살리느라 뼛골이 빠졌는데”

“우리 백성들은 풀뿌리조차 먹지 못했는데,

옛 백제 땅인 웅진(熊津)에 장기주둔한 당나라군은 양식이 남아 돌았네.

신라백성들은 계절마다 당나라 군사의 옷을 만들어주었네.

1만명의 당군이 지난 4년 동안 신라의 것을 먹고 입었으니

당군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사람이지만 피와 살은 한결같이 신라에서 기른 것이네.

당의 은혜가 한없다고 하지만 신라의 충정 또한 가련하게 여길 만하네.”

이렇듯 신라가 당나라 군을 먹여살리느라 뼛골이 빠졌는데도 배은망덕 운운하며

신라를 침공하는 당나라를 맹비난한 것이다. 문무왕의 피를 토하는 한탄이 이어진다.

“슬프다. 두 나라(백제와 고구려)가 평정되지 않을 때는 사냥개처럼 부리더니

들짐승(백제와 고구려)이 잡히고 나니 (신라는) 잡아먹히는 박해를 당하도다!

잔학한 백제는 옹치(雍齒)의 상을 받는데, 신라는 도리어 정공(丁公)의 죽음을 당하는구나!”

옹치는 중국 한나라를 창업한 고조(유방)의 신하. 한때 유방을 배신하고 다시 귀순했지만,

뜻밖에 상급을 받은 인물이다.

반면 정공은 항우의 휘하에 있다가 곤경에 빠진 유방을 구해준 적이 있는데,

훗날 유방을 찾아왔을 때는 “자기 주인(항우)에게 충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즉, 문무왕은 당나라가 ‘옹치’인 백제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정공’인 신라에게는 칼을 들이댄 것을 비유했다.

그러면서도 당나라의 대대적인 침략을 막기 위해 한수 접어준다.

“태양이 비추지 않아도 해바라기와 콩심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한다네. 우리 신라는 너무도 억울하네.

자,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지닌 (설)총관은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면서

죄없는 사람을 벌하지 않을 것으로 믿네. 황제께 우리는 감히 배반하지 않네.”

그런데 대체 이 무슨 사연이기에 이렇게 험한 말이 오가는 것인가. 반추해보자.

 


신라의 어쩔 수 없는 선택

주지하다시피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잇달아 멸망시켰다.

그런데 양국은 왜 동맹을 체결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까.

먼저 신라. 삼국 가운데 가장 약체였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거의 사직을 잃을 처지에 빠진다.

선덕여왕 11년(642) 7월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일으킨다.

의자왕은 미후성(미후城) 등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한 달 뒤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대야성(大耶城 · 경남 합천)을 공격한다.

대야성 성주 품석(品釋)은 처자와 함께 항복했다.

하지만 윤충은 품석의 목을 베고 항복한 이들을 모두 죽인다.

신라 백성 1000명을 사로잡은 윤충에게 의자왕은 상급을 내린다.

그런데 품석과 함께 살해 당한 품석의 아내는 훗날 태종무열왕(재위 654~661년)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킨 김춘추의 딸 고타사랑(古陀炤女良)이었으니….

사랑하는 딸의 비참한 최후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피눈물을 흘렸다.

“김춘추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사람이 지나가도 몰랐으며 나중에야 한마디 했다. ‘아아! 내가 반드시 백제를 집어삼키리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조)

김춘추는 그 길로 고구려로 떠나 고구려와의 연합을 통해 백제를 치고자 했지만

고구려의 비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 백제는 신라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다.

신라는 눈길을 당나라에 돌렸다.

진덕왕 2년(648년)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를 도모하기 위한 나·당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러면서 당태종은 김춘추에게 말한다.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것은 다른 뜻이 없다.

신라가 두 나라의 등쌀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짐이) 불쌍히 여겨 정벌하는 것이니라.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라.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는 모두 신라에게 주어서 영원히 편안하게 하리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6월조)

 


마각 드러내는 당나라

그렇다면 당나라의 뜻은 순수했을까. 아니었다.

당나라는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정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 징후는 660년 백제와의 마지막 혈투를 벌이던 중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김유신과 김문영 등이 660년 7월9일 그 유명한 백제 계백장군과의 건곤일척 싸움을 끝내고

당나라 군영에 이르자 소정방(蘇定方)이 불같이 화를 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면서 김문영의 목을 베려 한 것이었다. 그러자 김유신은 비장한 각오로 소리쳤다.

“(소정방) 대장군이 황산벌 전투를 보지도 않고 기일이 늦은 것을 이유로 죄를 삼으니

나는 무고하게 치욕 당할 수는 없다. 먼저 (저 무례한) 당나라군과 결전을 벌이고 백제와 맞서 싸우리.”

김유신이 도끼를 들고 군문에 서자 머리털이 바싹 섰고, 허리춤에는 보검이 칼집에서 절로 튀어나왔다.

김유신의 서슬에 놀란 소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정방의 발등을 밟으며 살짝 귀띔했다.

“장군, 신라군이 변란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소정방도 깜짝 놀라 김문영을 풀어주었다.

7월18일 의자왕은 태자와 웅진 방령(方領)의 군사들을 이끌고 항복하고 만다.

백제의 678년 사직은 끊기고 만다. 하지만 신라까지 삼키려는 당나라의 마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당나라는 사비(부여)의 언덕에 군영을 차리고

은밀하게 신라를 도모할 계획을 세웠다. 우리 왕(문무왕)이 알아차리고 대책을 묻자

신하 다미공(多美公)이 나섰다. ‘신라백성들에게 백제 옷을 입히고 싸우려 한다면

당나라군이 반드시 그들을 공격할 겁니다. 이 틈을 타 당군과 싸운다면 될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 중)

문무왕이 “어찌 은혜를 원수로 갚느냐”고 난색을 표하자 김유신이 나선다.

“개가 주인을 두려워한다지만 주인이 개의 발을 물면 물어뜯는 것인데,

나라가 어려우면 자구책을 만들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신라가 대책을 마련한다는 첩보를 듣고는 귀국했다.

소정방을 맞이한 당 황제는 이렇게 말한다.

“왜 내친김에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는가?”(당 고종)

“신라왕이 어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 모시기를 자기 부모형제에게 하는 것처럼 하니

작은 나라지만 쉽게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소정방)

백제의 고토에 세운 5도독부를 통해 백제의 부흥운동을 은밀하게 지원했다.

고구려 정벌전을 치르면서는 신라군을 평양성까지 오라가라 하면서 계속 허탕치게 만들면서

신라의 힘을 뺐다.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답서를 보자.

“667년 당나라 대총관 영국공(英國公·당나라 이적(李勣))이 요동을 친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국경지역에 내보냈네. 그런데 아직 당나라 군사가 평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일단 고구려 칠중성(七重城 · 파주 적성)을 쳐서 당군을 위해 길을 열어두려고 했네.

그런데 성이 함락될 무렵, 당나라 사자가 와서 갑자기 ‘신라군은 칠중성을 치지말고

빨리 평양성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라’고 했네. 하지만 우리가 수곡성(水谷城 · 황해 신계)에 이르자

이번에는 당나라 군사가 벌써 돌아갔다고 했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신라군은 (당군의 도움없이) 평양성을 격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네.

모두들 ‘이번에는 큰 상급을 받겠지’하고 큰 기대를 했는데,

영국공은 ‘신라군의 도착기일이 늦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흘렸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완전히 ‘×개 훈련’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장안으로 개선한 당군은 “신라에서 공을 세운 자는 아무도 없다”고 떠벌였다.

더구나 당나라는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관리와 백성들까지 이주시킨

비열성(卑列城 · 함남 안변)을 고구려에 돌려주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당나라의 침략 급보 소식을 들은 문무왕의 선택은?

당나라의 한반도 경영 야욕은 고구려 멸망 이후 본격화한다.

당나라는 9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669년부터 옛 백제의 땅을 점령하였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한다. 하지만 신라는 끝까지 외교적 교섭을 포기하지 않았다.

문무왕은 9년(669년) 5월 김흠순(金欽純)과 김양도(金良圖)를 사죄사(謝罪使)로 보냈다.
하지만 당 고종은 이듬해 1월 김흠순의 귀국만을 허용하고 김양도는 옥에 가두어 버린다.

“당 황제는 (문무)왕이 멋대로 백제의 땅과 유민을 차지했다고 하여

황제가 문책하고 노발대발하여 사자를 계속 억류해버렸다.”(삼국사기 문무왕 10월조)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간다.

 

‘삼국유사 의상전교조(義湘傳敎條)’와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法敏條)’를 보자.

“김흠순(혹은 김인문)과 김양도 등이 당에서 갇혔다.

당 고종이 크게 군사를 일으키어 신라를 정벌하려 했다. 고종이 김흠순(혹은 김인문)을 불러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하고 우리를 해치려는 이유가 뭐냐’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그를

옥에 가두고서 군사 50만명을 훈련시켜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김흠순은 마침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있던 의상법사에게 당나라 침공사실을 알렸고,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빠졌음을 알게 된 의상법사는 서둘러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이 같은 급보를 전한다. 이 때가 670년의 일이었다.


사천왕사를 찾은 이유는?

2008년 11월. 늦가을인데도 따사로운 햇볕에 눈이 부셨던 어느 날.

조유전 토지박물관장과 기자는 폐허만이 남은 어느 사찰 흔적을 더듬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경주시 배반동 낭산 구릉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사천왕사(四天王寺 · 사적 8호)터다.

발굴조사가 한창인 절터를 일제가 부설한 철로가 반으로 뚝 잘라 지나치고 있었다.

“자, 저 너머가 유명한 선덕여왕릉(사적 182호)이 있는 곳이고,

저기가 신라시대 때 신이 뛰놀았다는 신유림(神遊林·낭산·사적 163호)이고,

또 저기 맞은 편은 망덕사(사적 7호)라는 곳이고….”

이리저리 가리키는 조유전 관장의 손 끝에 1338년 전의 역사가 묻어나온다.

“우리가 서있는 이 사천왕사터는 바로 670년 의상법사로부터 당나라 침공이라는 급보를 받고,

구국의 일념으로 세운 절이지. 전설적인 내용도 가미되었지만

신라는 이 절을 지음으로써 부처님의 힘으로 당나라 침공을 막았어요.”

1338년 전인 670년 신라 경주로 여행을 떠나보자.

 

힘 빌려 唐軍 물리쳐 문무왕의 판타지 같은 방책

670년. 당나라 유학 중인 의상대사로부터 당나라 50만 대군의 침공 급보를 들은 신라 조정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문무왕은 요즘으로 치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한다.

“문무왕은 여러 신하를 불러모아 방책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나섰다.

‘근래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해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


“문두루비법을 쓰십시오”

‘그래 불법(佛法)에 기대자.’ 문무왕은 당장 명랑법사를 모셨다.

“명랑이 아뢰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사온데,

그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무수히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정탐하고 있습니다.”

“법사, 이를 어쩌면 좋겠소.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니….”

명랑이 비책을 냈다.

“자, 우선 채색비단으로 절을 가설(假說)하소서.”

임시방편이었다. 명랑의 계책에 따라 채색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든 뒤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제작했다.

그리고 명랑은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12명과 함께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을 썼다.

“(문두루비법을 쓰자) 그때는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아직 교전(交戰)하기도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전함들이 모두 침몰하였다.

그후 절을 고쳐 짓고(679년) 이름을 사천왕사라 하였으며,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

신라는 이듬해인 671년 당나라 5만대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어김없이 문두루비법을 써서 당군을 모두 물리쳤다.

670년 당나라 침략에 맞서려고 급히 세웠던 경주 사천왕사. 2006년부터 실시 중인 발굴조사에서는 녹유사천왕상 벽돌편(위의 오른쪽 사진)을 비롯, 문두루비법 사용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단석의 흔적(아래)이 확인됐다.



 

“불심에 의존한 신라”

차근차근 검토해보자. 당나라 대군의 침공소식을 들은 문무왕이 택한 방책은

결국 불법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城)을 빼앗기고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신라 선덕여왕은 황룡사 구층탑을 세웠다.

경덕왕 12~13년(872~873년) 사이 황룡사 탑을 수리한 뒤 그 경위를 기록한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보자.

“중국에 갔던 자장(慈藏)이 귀국할 때(643년) 종남산(終南山)의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하직인사를 드리자, 원향이 말했다. ‘내가 관심법(觀心法)으로 신라를 보니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항복할 것이다.’

자장이 돌아와 왕(선덕여왕)에게 알렸고, 645년 탑을 세웠다.

~ 과연 삼한을 통합하여 군신이 안락한 것은 이에 힘입은 것이다.”

황룡사구층탑은 백제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궁극적으로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세운 호국불교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력이 있는 신라였으니 당나라군의 침공소식에 역시 불교의 힘을 빌린 것이다.

게다가 문무왕의 불심은 남달랐다.

문무왕은 생전에 입버릇처럼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한 유언이 있었다.
“법사, 나는 죽은 뒤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겠소.”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의 주(注)에 인용된 ‘감은사 사중기(寺中記)’를 보면 한술 더 뜬다.

“문무왕은 왜병 진압을 위해 감은사를 지었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아들 신문왕이 감은사를 지은 뒤(682년) 감은사 금당 밑 섬돌을 파서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을 냈는데,

이 구멍으로 용(문무왕)이 들어와 돌아다녔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와 신유림

또 하나, 명랑법사는 왜 사천왕사를 ‘낭산(狼山·사적 163호)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세울 것을 권했을까.
낭산 남쪽은 선덕여왕릉(사적 182호)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 ·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조’를 보자.

유명한 ‘선덕여왕 지기삼사’는 재위 16년 동안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측한 세가지 일을 기록한 것이다.

선덕여왕이 스스로의 죽음을 예측하고 무덤을 낭산 남쪽으로 정한 것은 지기삼사 가운데 세번째이다.

“셋째, 왕이 아무 병도 없었는데,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어떤 해 어떤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게 하라.’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모르자 왕은 ‘그곳이 바로 낭산 남쪽이니라’했다.

그 날에 선덕왕이 죽자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묻었다.

그런 뒤 문무왕이 (선덕)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세웠는데,

불경에서는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선덕여왕)의 신령스럽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유림(神遊林)’은?

“ ‘신유림’은 ‘신(神)이 노는 숲’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듯 심상치 않은 곳을 뜻하잖아요.

명랑법사가 황룡사나 금광사 등 기존 사원에 도량을 개설할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낭산 아래 신유림’에, 그것도 임시로 절을 세운 것은

선덕여왕의 영험함이 깃든 신성한 곳을 찾아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려 했던 게지.”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당나라군 물리친 문두루비법

다음, 더욱 중요한 것은 당나라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문두루의 비법’이다.

즉, “명랑이 유가 명승 12명을 이끌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비법을 행하자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는 내용이다.

“명랑이 개설했다는 문두루비법은
‘관정경’(灌頂經 · 밀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에 나오는

문두루법(Mundra · 神印法)에 따른 주술(呪術)이에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위기에 빠졌을 때 둥근 나무에 오방신(五方神)의 이름을 써놓은 문두루를

가지고 향하는 곳이면 모든 악이 물러난다는 것입니다.”(조유전 관장)

‘관정경’에 따르면 문두루형(形)은 금은진보(金銀珍寶)와 전단목(전檀木) 등으로 만들어야 한다.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그런데 명랑은 풀(草)로 오방신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침략이 워낙 화급한 상황으로 빠지자 임시로 절을 짓고, 오방신상을 만들었을 것”

이라고 보았다.

어쨌든 삼국유사에 따르면 명랑이 사천왕사에서 임시로 행한 이 문두루비법 때문에

당나라는 2번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저기 보이는 저곳이 바로 망덕사터(望德寺址 · 사적 7호)입니다.

저 절도 이 사천왕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요.”(조 관장)

무슨 말인가. 다시 삼국유사를 들춰보자.

 

670년과 671년 두 번에 걸쳐 사천왕사에서 행한 문두루기법으로 참패한 당나라 고종이

당나라에 와 있던 신라인 박문준(朴文俊)에게 물었다.
“너희 나라에 무슨 비법이 있기에 당나라군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가 없느냐.”(당 고종)
“신라가 상국(당나라)의 은혜로 삼국을 통일했기에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남쪽에 천왕사를 새로 짓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위해 법석(法席)을 열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만.”(박문준)
그 말을 들은 당 고종은 크게 기뻐하여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신라로 보내, 사천왕사를 살펴보고 오라고 했다.


“사천왕사를 가려라!”

당나라 사신의 방문 소식을 들은 신라는 크게 걱정했다.

당나라가 ‘사천왕사의 진실’을 안다면 보복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사천왕사 남쪽에 가짜로 절을 짓고는 사신을 기다렸다.

이윽고 신라를 방문한 악붕귀가 “황제를 축수한다는 천왕사에 분향하겠다”고 운을 떼자

신라 측은 새롭게 지은 가짜 절로 사신을 인도했다.

하지만 악붕귀는 이 절이 당나라를 속이기 위한 ‘짝퉁’임을 간파하고는 문전에서 버텼다.

“이것은 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

신라는 금 1000냥으로 요지부동인 악붕귀를 매수했다.

못 이기는 척하고 당나라로 되돌아간 악붕귀는 황제에게

“신라가 천왕사를 지어 폐하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습니다”하고 거짓으로 고했다.
‘사천왕사의 기적’에서 시작된 신라 · 당나라 간의 싸움은 신라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후 신라는 연전연승했고, 당나라는 한반도 경영의 야욕을 완전히 꺾었다.

676년 안동도호부 치소를 평양성에서 랴오둥성으로 옮겨갔다.

사천왕사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790년 무렵, 향가인 도솔가(兜率歌)와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은 월명사(月明師)는

사천왕사 앞에서 피리를 잘 불었는데, 얼마나 소리가 좋았는지 달(月)이 월명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월명사라는 이름도 이때 얻었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망국의 조짐이 사천왕사에 나타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종합해보자.

“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년)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犬)가 짖었다. 또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


“녹유전에 새겨진 상(像)의 정체는?”

지난 2006년 4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신라 호국불교의 알파요, 오메가’인 사천왕사 조사에 나섰다.

이미 1922~36년 사이, 일제가 경주~울산 간 철도부설과 동해중부선 건설공사를 위해 조사를 벌인 뒤

절터 한가운데를 잘라먹었던 상황.

당시 조사에서는 유명한 녹유전(綠釉塼 · 녹색유약을 바른 벽돌)이 확인된 바 있다.

이 ‘녹유벽돌편(綠釉塼)’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그런데 2006년부터 재개된 발굴조사에서 흥미로운 유물들이 확인됐다.

서탑지에서도 녹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최장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사의 말.

“발견된 벽돌편은 녹유전에 새겨진 상(像)의 상반신이었는데,

이것을 일제 강점기에 수습된 하반신과 함께 3D 스캔을 해보니까 딱 맞았습니다.”

또 하나 금당 북쪽에 동·서로 위치한 수수께끼 같은 건물터가 있는데,

그 쓰임새에 대한 해석이 재미있다. 이 건물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방형구조이며,

초석 중앙부에는 지름 22㎝, 깊이 20~22㎝의 원형구멍이 파여 있다.

장충식 교수는 “이것은 삼국유사 기록대로 고려 때도 남아 있었다는 ‘단석(壇席)’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한 바 있다. ‘관정경’에는 문두루비법에 사용하는 원목 크기를 77푼(23.33㎝)이라 했는데,

이 초석의 구멍 지름(20~22㎝)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12월11일 경주에서 열린 ‘신라의 호국의 염원 사천왕사’ 학술심포지엄에서는 새로운 주장도 나왔다.

2008년 발굴에서도 출토된 녹유전 상(像)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녹유전에 그려진 상(像)이 사천왕상 혹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지만,

그게 아니라 불법 전반을 수호하는 신왕(神王)이라는 견해(임영애 경주대 교수)가 등장한 것이다.
이렇듯 사천왕사는 14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숱한 이야기거리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사천왕사를 둘러싼 이야기를 보세요. 마치 판타지 영화 같잖아요.

당나라의 한반도 야욕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에 온갖 판타지를 입힌….”(조유전 관장)
- 경향, 22008-12-05 / 2008-12-12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