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았다! 고요한 이곳 - 도시인 감성 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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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간된 왕유 시전집(박삼수 역주, 현암사)을 읽었다. 현전하는 308편 376수 전체를 옮기고 일일이 주석을 단, 9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에 햇빛도 드나들고 바람도 선선히 지나다니도록 절반은 건성으로 서너 쪽씩 넘겨가다 위급사의 '산장'이란 시에서 손이 멈췄다.
그윽하고 고요한 곳을 찾다 드디어 이곳을 찾았나니 어찌 일찍이 이곳을 찾은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랴? 큰 산골짝은 별장 층계를 따라 돌고 도는데 뭇 산들이 문 안으로 들어와 층계를 오르는 듯하다 밥 짓는 연기는 깊이 우거진 대숲 위로 솟아 나오고 유객의 관인과 인끈은 늘어진 등나무에 가리거늘 내 이 같은 풍경에 빠져 기꺼이 벼슬을 버리고자 하나니 그 누가 선뜻 벼슬 버리지 못하고 괴롭다 하리요? - 왕유 '산장'
여름 휴가철 소슬한 산책 숨겨둔 보물 찾아낸 느낌
아, 도대체 이런 경지는 어느 시절의 소회란 말인가? 저 당나라 시대의 이백, 두보와 함께 3대 시인으로 불리는 왕유이므로 그의 감회가 오늘의 우리 세태와는 도무지 맞닿을 수 없는 초연한 과거사의 오래된 감각이란 점이 자명해지는 듯하다.
그러나 더 멀리로는 공맹(孔孟)의 경전도 여전한 독서일품계이고 지구 반대편의 그리스 신화이며 소포클레스 같은 책들도 21세기의 지팡이가 되는 마당에 당나라의 시 몇 수가 어찌 한가로운 소리로 물릴 일이 되는가, 그 점이 오히려 의아스러운 것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의 산야에 ‘뭇 산들이 문 안으로 들어와 층계를 오르는’ 듯하거나 ‘밥 짓는 연기는 깊이 우거진 대숲 위로 솟아’오르는 일이야 저 1970년대 이전의 까마득한 기억이 되었지만 그런 경치 혹은 경지, 아니 그런 심성이 스스로 자아내는 어떤 풍경의 일면은 오늘의 콘크리트 숲에서도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소박한 욕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왕유의 자연시는 정치 세태에 좌절한 선비의 우울한 초상화이면서 동시에 12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이 헛헛한 대도시의 일상을 거칠게 탈주하여 어디론가 한가로운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사람들의 내면과 다를 바 없는 욕망의 시편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왕유의 시구처럼 어디로 가면 ‘그윽하고 고요한 곳’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럴 때 설악산이나 지리산은 정답이 되기 어렵다. 높은 곳을 지향하여 하루 낮밤을 도와 그 꼭대기로 오르는 길에는 ‘밥 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을 향한 모든 분노를 폭발시켜버리려는 듯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고 바닷물에 뛰어드는 철부지 아이들의 해수욕장도 왕유의 한가로운 산보와는 거리가 멀다.
휴가철에 왕유의 소슬한 산책이 그나마 성립될 만한 곳을 말해본다면, 아무래도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 일대를 추천하고 싶다.
이름들이 말갛게 씻어 채반에 올려놓은 오이처럼 소박하다. 백운면이라, 천등산 위로 흰 구름이 흘러간다.
그곳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들어가면 애련리! 연꽃이 물 위에 가지런히 떠 있는 풍경이나 다름없으니 그 이름만으로 우리 마음속의 액셀러레이터는 움직이게 된다.
불쑥 나타나는 충북선 기차와 진소천 한 폭 그림
애련리의 전후좌우가 소슬한 곳이다. 모든 사물을 은빛으로 환생시키는 강렬한 햇빛이어도 좋고, 강물과 갈대와 나무와 숲과 새들이 온통 교향악을 연주하게 되는 장엄한 소낙비여도 좋은 그런 곳이다.
작은 집들, 느티나무들, 폐교된 분교를 리모델링한 원서문학관 그리고 개울보다는 넓고 강보다는 좁은, 곧바로 브레이크를 걸고 바짓가랑이 무릎까지 둥둥 걷어붙인 채 느린 물살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물이 그곳에 있다.
원래 이름이 제천천이었으나 영화 박하사탕에서 진소마을 이름을 따 진소천으로 불린 이후에 두 가지 이름이 어울려 남한강으로 느릿하게 흘러간다.
큰 장마 지난 후 찾아가면 강물은 흡사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흐르는 강물처럼이 된다.
-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 주간동아, 2008. 08.05 647호(p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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