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80) 남한산성의 나날들, Ⅳ

Gijuzzang Dream 2008. 7. 2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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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남한산성의 나날들, Ⅳ

 

 

임금 이부자리도 없고 수라상 반찬은 닭다리 하나뿐

  

조선이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처음으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호칭을 쓰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했지만 청군 진영에서는 회답이 없었다. 조선 조정은 초조해졌다.

‘황제’로 인정하고 ‘잘못’을 사과하면 화친이 쉬이 이루어질 것으로 알았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청군의 입장에서는 바로 답장을 해 줄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조선의 국서 내용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황제’로 불렀으되 심복(心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은 청군 편이었다.

 

 

남한산성의 장경사(長慶寺).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조 때

승군(僧軍)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된 사찰이다.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그 많던 닭들은 어디로 갔을까?

 

청측의 회답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1637년 1월6일,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와 함경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가 올린 장계가 들어왔다.

조정호 휘하의 군병이 용진(龍津)에 머물며 대오를 수습하고 있다는 것,

함경도의 병력이 김화(金化)에 도착하여 산성을 구원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1월7일에는 도원수 김자점, 황해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이 보낸 장계도

도착했다. 하지만 모두 ‘남한산성을 구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만 있을 뿐

언제, 어떻게 산성 쪽으로 진군해 온다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1월8일, 답답해진 인조는 영의정 김류 등을 불렀다.

인조는 신료들에게 비변사에서 마련한 대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신료들은 할 말이 없었다.

김류가 나섰다.

“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대책이 없습니다. 그저 바깥의 구원을 기다릴 뿐입니다.”

김류는 그러면서 적진에 사람을 다시 보내 회답을 독촉하자고 건의했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신료들의 이야기에 인조도 할 말이 없었다.

“병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급선무일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도무지 힘이 실리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병사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은 하루하루 떨어져 가고 있었다.

 

‘병자록(丙子錄)’ ‘양구기사(陽九記事)’ 등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들을 보면

예외 없이 ‘닭다리’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 전하께서도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않고 주무셨다.

밥상에도 반찬으로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았다.

전하께서 전교하시기를, ‘처음에 들어왔을 때에는 새벽에 뭇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전혀 없고 어쩌다 겨우 있다. 그것은 필시 나에게 닭을 바쳤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닭고기를 쓰지 말도록 하라.”

 

인조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반찬이 닭다리 하나뿐인 처지에서

어느 겨를에, 또 무엇으로 장졸들을 어루만질 것인가?

 

 

참혹한 소식들

 

산성 안에서는 추위와 물자의 고갈을 걱정하고 있었던 데 비해

산성 바깥의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바깥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의 증언 내용은 참혹했다.

적진에는 포로로 잡힌 부녀자들이 무수히 많고,

적진 바깥에는 어린 아이들의 시신이 수도 없이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병자년 연말 이후 몽골병을 비롯한 청군의 겁략(劫掠)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나타난 참상이었다.

당시 청군은 서울 주변에서 포로를 획득하는 데 열중했다. 그 와중에 성인 남자들에 비해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녀자와 아이들 상당수가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 동문.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청군은 특히 젊은 여자들을 사로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시 서술하겠지만, 인조에게 항복을 받고 심양으로 귀환했던 청군 지휘부 내부에서

나중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조선 여성 포로’와 관련된 사안이었다.

청군의 대소 지휘관들 사이에서,

조선에서 포로로 잡아 끌고 온 젊은 여성들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젊은 부녀자를 데려가려는 그들에게, 여자에게 딸린 아이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어미는 진중으로 끌고 들어가고 아이는 죽이거나 바깥에다 유기하는 참혹한 상황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아무리 참혹해도

포위된 산성에서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적과 결전을 벌일 능력도, 화친을 이룰 전망도 불투명한 처지가 되자

신료들은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시도했다.

1월8일, 예조는 온조왕(溫祚王)에 대한 제사를 다시 지내자고 청했다.

이미 한 번 지냈지만 정성이 부족했다며 중신을 보내 성의를 다하여

온조왕에게 가호(加護)를 빌자고 청했다.

예조는 또한 원종(元宗 · 인조의 生父 定遠君)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숭은전(崇恩殿)에도

신료를 보내 제사를 지내자고 했다.

인조는 숭은전에서 올리는 제사는 자신이 직접 주관하겠다고 나섰다.

 

포위된 성에서의 곤경이 길어지자 이러저런 이상한 행동을 벌이는 자들도 나타났다.

어영별장(御營別將) 김언림(金彦琳)이 보인 행태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1월9일 밤, 청군 진영을 습격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오겠다며 성을 내려갔다.

이튿날 새벽, 그는 수급 두 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인조는 그가 세운 공을 가상히 여겨 면주(綿紬) 세 필을 상으로 내렸다.

그런데 그가 들고 온 수급 하나가 이상했다.

수급의 살은 얼어 있었고, 피를 흘린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수급의 모양이 청군의 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의아해하고 있는데 출신(出身) 권촉(權促)이 수급 앞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형 권위(權偉)의 수급이라는 것이었다.

권위는 며칠 전 북문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당시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권촉은 형의 수급을 자신이 모셔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주변의 장졸들은 경악했다.

김언림은 청군의 수급이 아니라 조선군 시신에서 목을 베어 왔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김언림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 ‘효시경중(梟示警衆 · 목을 베어 매달아 군사들을 경계함)’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다 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성안의 장졸들에게는 여전히 용맹함이 강조되고 있던 분위기에서 빚어진 참혹한 ‘해프닝’이었다.

  

 

다시 ‘재조지은’을 강조하다

 

1월 초 남한산성의 동문(東門) 부근으로 진출하여 탐색전을 벌이던 청군은

1월11일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농성 중인 조선 조정의 의도와 예상되는 향후 동향을 분석하는 한편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11일부터 산성 주변에 대한 압박을 다시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릉(獻陵)과 탄천 일대에 있던 병력 가운데 1만여명을 차출하여

수원과 용인, 여주와 이천 방면으로 각각 다시 배치했다.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더 확실하게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동시에 산성의 북문과 서문 앞에 병력을 증강 배치했다. 상황은 더 엄혹해졌다

 

1월12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군 진영으로 갔다.

앞서 전달한 국서에 대한 회답이 없던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시 써서 들고 간 국서의 내용 또한 공순했다.

‘소방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

약국이 강국에 복종하고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맞서겠습니까? 잘못을 용서하고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대국을 받들고 자손 대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머리를 숙였다.

 

문제는 명과 관련된 사항을 언급한 부분이었다.

‘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으로 소방이 곧 망할 뻔했을 때

명의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깊이 새겨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조선은 ‘명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듯이 청도 그렇게 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청은 이미 ‘명=천하’라는 인식을 팽개쳐 버린 지 오래였다.

어렵사리 고쳐 쓴 국서 속에 담긴 ‘재조지은’을 해석하는 문제를 놓고

조선과 청은 새로운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8-08-20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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