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 읽기]

(8) 일본 만선사가들이 본 병자호란, 누르하치, 그리고 만주, Ⅱ

Gijuzzang Dream 2008. 7. 20. 20:40

 

 

 

 

 

 (8) 일본 만선사가들이 본 병자호란,

 누르하치, 그리고 만주, Ⅱ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등장은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일본의 대륙 침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만선사가였던 이나바 이와기치는 1937년 자신의 회갑을 맞아 쓴 글에서

"자신은 학문을 위한 학문을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지나 문제’에 자극을 받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려고 만주와 청의 역사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시대적 요구’란 다름 아닌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조선과 중국 침략의 당위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만선사가들은 ‘일본이 옛날부터 만주와 맺었던 각별한 인연’을 거론하고,

일본의 대륙 침략은 ‘침략’이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강변했다. 

 

 

일본과 만주의 인연 강조

 

이나바 이와기치를 비롯한 만선사가들에게 대부(代父) 역할을 했던 인물은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이었다.

아키타(秋田)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오사카 아사히(朝日)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내는 등

주로 언론계에서 활동했다.

그는 1903년 만주를 시찰하고 돌아와 러시아와 일전(一戰)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1905년 러일전쟁 승리 이후에는 외무성의 촉탁으로 만주에서 행정조사 업무를 담당했다.

이어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의 고문이 되어 대륙 경영의 방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나이토는 교토(京都)제국대학에 사학과가 개설된 1907년부터 동양사 담당교수로 강의하는 한편

정세파악과 사료수집을 목적으로 여러 차례 조선과 중국을 방문했다.

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일본의 만주침략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관학자(官學者)이자,

이른바 ‘교토 지나학(支那學)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의 영향 아래서 이나바 이와기치와 같은 만선사가가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이토는 1905년, 이나바가 ‘만주발달사(滿洲發達史)’를 출간하자 서문을 써주었다.

그는 그 글에서 “부여는 남만주철도의 종점인 창춘(長春) 서쪽의 눙안(農安) 지역에 있었으며”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일본과 지나의 세력이 처음으로 조선과 만주 방면에서 접촉했고,

그때부터 일본은 만주에 대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고 썼다.

 

나이토는 또한 발해가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부여가 남만주철도 종점 부근에 있었던 사실,

고대 일본이 고구려·발해와 접촉했던 사실 등을 일본과 만주 사이의 ‘인연’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만선사가들은 또 다른 ‘인연’도 끄집어냈다.

임진왜란 중인 1592년 12월, 함경도를 점령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공격했던 적이 있다.

1936년,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는 이 사실에 주목하여

‘가토의 공격은 흉포한 야인들에게 일본의 무위(武威)를 과시한 것’이라고 했다.

이나바 또한 이 사례를 일본이 만주와 맺은 각별한 인연으로 강조한다.

 

 

만주사변과 이나바의 청(淸) 찬양

 

1931년 9월18일, 봉천(奉天-선양)에 있던 일본 관동군은

중국 군벌 장학량(張學良)의 병영을 기습하여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관동군은 순식간에 창춘, 지린 등지를 점령하고

이듬해 2월까지는 진저우(錦州), 치치하얼(齊齊哈爾), 하얼빈 등 만리장성 바깥의 만주 전체를

손에 넣었다.  관동군은 1931년 11월, 톈진(天津)에 머물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 宣統帝)를 비밀리에 뤼순(旅順)으로 옮겼다.

푸이는 1932년 3월1일, 만주국(滿洲國)의 집정(執政)이 되고, 1934년에는 황제로 즉위했다.

관동군은 치밀한 각본에 의해 만주를 탈취,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만주국이 건국되자 이나바도 바빠졌다.

만주를 탈취한 데 대한 국제여론이 나빠지자 이나바는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냈다.

1934년, 이나바는 ‘만주의 역사가 경(經 · 날줄)과 위(緯 · 씨줄)가 맺어지면서 전개되어 왔다.’고

전제한 뒤, 역사상 만주에서 ‘경(-주체)’의 역할을 담당한 것은 몽골족과 만주족이지

결코 한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나바는 특히 청을 만주 역사의 주역으로 평가했다.

 

이나바는 또한 청의 강희대제(康熙大帝)야말로 ‘300년 동양평화’의 기초를 다진 성군(聖君)이라고

찬양했다. 강희제가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견제했던 것을

들어 그를 ‘대제’ ‘성군’으로 치켜세웠다. 만주의 안녕, 나아가 동양 평화의 기초는

만주족이 놓은 것이지 한족과는 관계가 없다는 인식이었다.

 

여러 민족의 ‘경위(經緯)작용’을 통해 발전해 온 만주의 역사에 이제 새로운 주체가 나타났다.

이나바는 그것이 바로 일본 민족이라고 강조했다.

만주국은 만주의 역사에 새롭게 등장한 ‘경’이므로 ‘위’에 불과했던 한족의 지나는

그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일본은 더욱이 강희대제의 핏줄을 이은 푸이를 황제로 앉혔으므로,

만주국의 등장은 ‘침략’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한 대업의 계승’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나바, 중일전쟁 그리고 한국사

 

이나바는 만주사변 직후 교토제국대학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논문은 통과되어 1934년 서울에서 출판되었다.

‘광해군시대(光海君時代)의 만선관계(滿鮮關係)’가 바로 그것이다.

400쪽에 이르는 이 책에서 이나바는 조선과 만주의 관계사를 개관하고,

임진왜란 직후 명 · 청이 대립하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 애썼던 광해군을 찬양했다.

나아가 서인(西人)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킨 것을 비판했다.

 

이나바는 왜 광해군을 찬양했을까?

물론 명청교체기(明淸交替期)에 광해군이 보인 외교역량은 볼 만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나바가 당시의 조선을 과연 독자적인 주체로 보았을까 하는 점이다.

광해군이, 이나바가 그토록 좋아했던 청과 청의 시조인 누르하치와 사단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찬양한 것은 아닐까?

 

이나바의 광해군 평가는 조선사를 만선사관의 틀에서 보려는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37년 7월, 일본군은 베이징과 톈진, 상하이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중일전쟁의 시작이었다.

만주사변 때와는 달리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하여 항일(抗日)저항을 선언하고,

전쟁은 중원 전체로 확산되었다. 중일전쟁을 일지사변(日支事變)이라 불렀던 이나바는

다시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 냈다.

역사상 한족이 아닌 이민족들이 중원에 들어가 새로운 왕조를 세웠던 사실과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황하와 양자강 유역까지 전선을 넓히자

이나바는 ‘이민족의 중국 통치는 한족의 발달을 촉진시켰다.’는 언설을 들고 나왔다.

1939년에 나온 ‘신동아건설(新東亞建設)과 사관(史觀)’이란 책에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북위(北魏)의 예를 들어

‘이민족의 중국 통치는 퇴폐한 풍조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썼다.

일본군의 침략을 ‘퇴폐한 중원’을 정화시키는 ‘방부제’로 정당화한 것이다.

 

이나바의 언설은 계속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군이 조선에 들어왔고,

그 틈을 타서 누르하치가 만주지배를 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934년 관동군은,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폐위된 선통제를 만주국의 황제로 앉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누르하치의 ‘은인’이고, 관동군은 푸이의 ‘은인’이 되는 셈이다.

나아가 누르하치의 후손들이 중원으로 진격하여 ‘강희대제의 위업’을 이룬 것처럼

일본군도 이제 ‘새로운 동아시아(新東亞)’를 건설하기 위해 중원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선사관에 의해 한국사의 자주성은 부인되었다.

한국사는 그저 일제가 집어삼킨 만주 역사의 부속물일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만주는 중국으로 돌아갔고, 다시 세월이 흘러 중국은 강대국으로 재림하고 있다.

이번에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사의 범주를 축소시키려 덤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만선사관과 동북공정이 지닌 패권적 아카데미즘을 넘어서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학자들의 분발과 위정자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07-03-01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