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冊] 에드워드 사이드 -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Gijuzzang Dream 2008. 7. 20. 00:35

 

 

 

 

 

 말년의 예술가 작품엔 무슨 맛이 나는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 · 2008

말년은 인생의 한 시점이다.

늦저녁, 대기만성, 늦가을처럼 불현듯 다가오는 돌이킬 수 없는

늦음이다. 오래 살면 누구나 맞는 자연의 질서다.

마치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오듯 말이다.

 

백발은 말년의 표상이다.

백발은 인생을 오래 숙고한 자의 성숙과 지혜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은 도덕과 보수주의를 지혜와 신념으로

착각하는 말년의 인생들도 없지 않다.

그들은 체념과 달관을 도무지 모르며 발밑에 닥친

죽음이란 곤경조차 인정하지 못한다.

이때 말년은 퇴행성이라는 말과 동의어일 터다.

말년이 건강과 에너지의 고갈로 인해 만나는 노쇠함과 죽음은

불가피한 곤경이다. 위대한 예술가라고 해서 이 삶의 마지막

시기를 피할 수는 없다.

말년의 예술가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명확한 발소리,

젊은 시절보다 떨어지는 기력과 무뎌진 감각이라는 삶의 궁핍한 조건은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책은 말년이라는 생물학적 나이가 예술가들이 도달하는
예술의 인식과 형식에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하는 소박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전형적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1935년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나치의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이집트로 피신했다. 이집트에서 대학을 나오고,

다시 1950년대 말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8년 ‘오리엔탈리즘’을 내놓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동양의 이미지로 보편화되어 있는 것들이 실은 서구인의 편견과 조작으로 일그러진 것임을 폭로한

이 책은 동양과 서양의 지식인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주고,

이미 탈식민주의 이론을 정립한 빠질 수 없는 고전의 반열에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사이드를 비교문학 이론가, 혹은 문학평론가로만 알았던 나는

음악에 대한 전문적 식견에 놀란다.

사이드는 전문 연주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피아노 연주자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이드에게 ‘말년의 양식’에 관한 영감을 제공한 것은 아도르노가 쓴 베토벤에 관한 에세이다.

아도르노는 베토벤이 말년에 내놓은 작품에서

완숙과 평화로운 화해와 전체성으로의 포용이 아니라

불연속성과 파열, 방기, 그리고 악곡의 주요 전개 부분에서 찢겨나감을 본다.

 

“말년의 베토벤의 가장 큰 특징인 휴지와 갑작스러운 불연속성은 그와 같은 이탈의 순간이다.

주관이 작품에서 떠나는 순간 작품은 침묵하고 텅 빈 내부가 밖으로 드러난다.”

 

그렇다고 누구도 베토벤이 말년에 내놓은 작품을 미성숙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은 자연의 성숙함과 닮아 있지 않을 뿐이다. 아도르노는 그 점을 이렇게 말한다.

 

“말년 작품의 성숙함은 우리가 열매에서 발견하는 것과 닮지 않았다.

그것은 … 둥글둥글하지 않고 주름져 있고, 심지어 찌들어 있다.

달콤함 대신 쓴 맛이 나고 가시투성이로 그저 쾌락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베토벤의 음악은 노년의 삶,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과 타협하지 않은 음악이다.

죽음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거짓 낙관주의를 거절한다.

그것이 악곡의 파열과 불연속성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고 자연의 질서로 당도하는 말년과 명확한 박자로 찾아오는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거기서 멀리 도망치면 칠수록 그것은 다른 모습으로 명확해진다.

즉 죽음의 기미는 “굴절된 형태로, 아이러니로” 튀어나온다.

에드워드 사이드

사이드는 위대한 예술가에게 말년의 양식 중의 특징으로 관습적인 것의 영토에 머물지 않고 그것에서 끊임없이 망명하는 형식이 나타난다는 점을 밝힌다.

 

망명자는 구질서, 즉 정상적이고 관습적인 것의 질서 속에 제 삶이 편입되는 걸 거부하는 사람이다. 망명자는 구질서에서 도망간다.

현재와 구질서를 벗어나 어디론가 끊임없이 도망가는 것은 그것이 미래와 새질서로 대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사이드는 스타티스 구르구리스의 에세이를 인용한다.

 

“말년의 양식은 바로 이런 미래를 모색하기 위해서 완화된 형태로

각인되는 과거와 나약해빠진 현재 모두를 거부하는 형식이며,

그렇게 말과 이미지, 제스처, 재현물로 표현된 형식은

지금은 당혹스럽거나 시의적이지 않거나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말년의 베토벤을 비롯해서

아도르노,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람페두사, 비스콘티, 글렌 굴드, 장 주네, 그람시… 등은

관습적인 것에 묶어두려는 시대와 불화하며 제 삶과 예술을 비타협과 파국으로 몰아간다.

사이드는 그들의 삶과 예술을 바투보기 하며

“조화롭지 못하고 평화롭지 않은 긴장,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비생산적인 생산력을 수반하는

말년의 양식”을 탐구한다.

베토벤이 보여준 말년의 양식은 숙달된 기교나 부분들의 유기적인 통합이 아니라

숙달되지 않은 재료들의 넘침, 파열, 불연속성이었다.

그것은 “살아남았음을 괴롭게 의식하며 몸부림쳤던 흔적”이다.

 

만약 전체성이 미적인 것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베토벤은 그것에서 끝없이 도망치려 했음이 분명하다.

베토벤이 도달한 말년의 양식은 분명하게 망명이고 파국이다.

전체 속에서 떨어져 나온 음은 저마다 울부짖고,

그 파열과 불연속성을 애써 하나로 묶지 않은 채 시간 속에 그것을 풀어헤쳐 둔다.

 

베토벤은 ‘잃어버린 전체성’을 말년의 양식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말년의 양식 안에 제 말년의 삶을 담았을 뿐만 아니라,

평생 끌고 온 세계와의 화해불가능성, 부정, 부동성을 밀고 나간다.

사이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그리스 현대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파의 시에 관한 글에서

“극단적인 말년성, 육체적 위기, 망명을 형식과 상황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창안적이고 보석세공인처럼 차분한 양식을 통해 표현”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어떤 면에서 삶은 모순 속에서 찢겨 있고 그 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채 흘러가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예술가들은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모순과 싸운다.

그들이 모순과 싸우는 것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보여준 말년의 양식들에는 그 모순과 분열이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사이드는 오히려 그것이 말년의 양식만이 보여줄 수 있는 드높은 경지임을 이렇게 쓴다.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은 말년의 양식의 특징이다.

반대 방향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두 힘을 긴장 속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오류 가능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노년과 망명으로 인해 신중한 확신을 얻은 예술가가 가진 성숙한 주체성이다.”

명인 연주자를 비르투오소라고 부른다.

사이드는 비르투오소가 “부르주아 문화가 꽃피운 산물”이며

“교회, 궁정, 사유지를 대체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자율적이고 세속적인 시민 연주공간의 산물”

이라고 말한다.

모차르트, 하이든, 바흐, 초기 베토벤 등이 교회나 궁정에서 양육되었다면,

글렌 굴드와 같은 현대의 연주자들은 콘서트홀, 리사이트홀, 공원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청중의 환대와 거액의 출연료를 보장받고 연주를 하며 제 삶을 세운다.

 

글렌 굴드는 청자의 환심을 사려는 연주를 거부하고,

“즉흥에 가까운 연주를 통해 여주의 경계를 넓혀

음악의 본질적인 모티브 흐름과 창조적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비르투오소는 연주자이자 지식인의 범주에 드는 사람이다.

사이드는 글렌 굴드에게서

“어떤 의미로 보든 굴드는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았고, 영향을 받은 음악가가 사상가도 없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이 관습적인 영토에서 벗어나 연주를 통해

자신의 거주지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초연한 남자의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사이드는 글렌 굴드가 뛰어난 바흐 음악의 연주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죽이고 인본주의와 합리화를 거부하는 만연된 관행에 대항하는”

논의를 촉발할 지식인의 한 전형임을 밝힌 것이다.

 

나는 미완의 유작을 읽으며

비르투오소는 바로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받아들여 비타협, 난국, 모순을 피하지 않고

밀고 나간 에드워드 사이드 자신을 명명하기에 적합한 호칭이라고 믿는다.
- 2008 07/15 경향, 뉴스메이커 783호, 장석주 [독서일기]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책 소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하버드 대학교 비교문학 객원 교수로, 이론가, 문학 비평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유고작으로 "말년의 양식" 이라는 시각으로의 문학비평을 담고 있는 책이다.

사이드는 예술가의 말년이 조화와 해결의 징표가 아니라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을 드러낸다는 색다른 관심을 통해 여러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또한 그는 정치 체제, 민족 사이의 망명이라는 개념을 문화산업 내에서의 예술,

과거로의 퇴행으로 보이는 작품, 대중 소설과 영화 등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그는 아도르노의 베토벤 분석에서부터 출발해

보통 과거로 퇴행한 작곡가라고 불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비롯하여,

콘서트 무대를 버리고 스튜디오 속으로 숨어 들어간 글렌 굴드,

국내에는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은 장 주네와 람페두사의 걸작들,

리고 심지어는 요절한 모차르트에게서도 말년의 양식을 탁월한 방식으로 읽어내고 있다.

 

 

인생의 황혼과 원숙함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생에서 말년은 원숙함과 원만함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기이다.

공자 시대의 나이에 대한 관념이 요즘과 다르긴 하겠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양에서는 40의 나이면 이미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不惑)

50세에 이르면 하늘의 명을 깨우치고(知天命)

환갑을 맞이한 60세에는 생각이 원만해져서 어떤 일을 들으면 곧장 이해가 되는 것(耳順)을

삶의 지혜로 여긴다.

 

한편 서양식 삶의 지혜를 대표하는 키케로 역시,

육체적 활동이 무기력해지고 감각적 쾌락이 줄어드는 노년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는

쾌락주의자들의 주장에 맞서

절도 있는 삶과 원숙함과 함께 하는 노년이야말로 더 큰 축복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나이듦’은 시간의 흐름과 물리적 쇠락의 결을 거슬러 올라가기보다는

결을 따르는 것을 뜻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간에 따라 늙어가는 것,

그것이 곧 시간에 맞는 일, 시의성(timeliness)이다.


예술가의 말년


우리는 이런 통념에 따라 예술가들이 나이가 듦에 따라

연륜과 지혜, 세상 모든 것을 한데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을 보여주기를 기대하곤 한다.

초심자의 치기와 발전 단계의 미숙함을 지나 원숙해진 단계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거장이란 칭호는 기교의 과시나 세상과 빚는 불협화음이 아니라

공인된 연륜과 지혜, 깨달음에 대한 칭송이다.

실제로 특별한 성숙의 기운, 평범한 현실이 기적적으로 변용된 화해와

평온함의 기운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램브란트와 마티스, 바흐와 바그너, 임권택 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적 말년성(lateness)이 조화와 해결의 징표가 아니라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을 드러낸다면 어떨까?(29쪽)

사이드의 관심은 바로 이런 말년의 양식이다.


망명, 그리고 말년성


말년의 양식이 새로운 기법과 형식을 통해 기존의 부르주아 사회와 예술과 불협화음을 빚는

아방가르드 예술을 지칭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 팔레스타인人이면서 기독교인이고, 미국 최고의 대학 하나인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이면서도

미국 아카데미 내에서 고립되고 소외되었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년의 양식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단지 예술이 사회적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화해되지 않은 개인의 비판적 사고가 지닌 ‘저항의 힘’을 말년성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침묵과 균열로 작업한다는 것은 포장과 관리를 피한다는 것이며,

사실상 자신의 말년성 지위를 수락하고 수행한다는 뜻이다.

말년성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자발적 망명’이다.(40쪽)


탈식민주의를 비롯한 최근의 담론에서 망명과 디아스포라 같은 개념이 대두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지 코스모폴리탄이라고 불리기 힘든 망명자의 삶을 살았던 탈식민주의의

대부 사이드는 이 책에서 정치 체제, 민족 사이의 망명이라는 개념을

문화산업 내에서의 예술, 과거로의 퇴행으로 보이는 작품, 대중 소설과 영화 등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또한 사이드는 파국과 망명이라고 해서 말년의 양식을 비극적인 측면만으로 국한하지는 않았다.

사이드는 재미와 즐거움, 때로는 아무런 걱정 없는 사치와 자유 역시

현 상황이나 지배체제와 화해하지 않는 형식으로 포용한다.
[예스24 제공]

지은이 - 에드워드 사이드

에드워드 W. 사이드(EDWARD WADI SAID)는 1935년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이집트로 이주한 뒤,

카이로의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950년대 말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컬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비교 문학 교수와 하버드 대학교 비교문학 객원 교수로,

이론가, 문학 비평가 활발하게 활동했다.

전문 연주가에 가까운 피아노 실력을 비롯해서 다방면에서 탁월한 성취를 보였으며,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첫 번째 주저 『시작: 의도와 방법』(BEGINNING: INTENTION AND METHOD, 1975)으로

1976년 리오넬 트릴링 상을 받았다.

1978년 서구인들이 말하는 동양의 이미지가 그들의 편견과 왜곡에서 비롯된 허상임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오리엔탈리즘』을 출간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지식, 문화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사이드의 철저한 해부는 ‘오리엔탈리즘’을 학문적인 영역을 벗어나

일상적 단어가 될 정도로 20세기 후반의 문화 지형도 전체를 바꾸어 놓았으며,

이후 하나의 분과로 자리잡게 되는 탈 식민논의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문학 연구와 비평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또 다른 명저 『세계, 텍스트, 비평가』

(THE WORLD, THE TEXT AND THE CRITIC, 1983)로 르네 웰렉 상을 받았다.

1993년 『문화와 제국주의』를,

2001년에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중단과 지식인들의 참된 역할을 강조하는 일련의 글들을

묶어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을 출간했다.

자서전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OUT OF PLACE, 1999)를 비롯하여 다 수의 책을 저술했다.

1994년부터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중 2003년 9월 24일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 The Heavens declare the creator's Glory / 베토벤(Beetho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