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2.01 통권 557 호 (p460 ~ 473) |
![]() |
![]() | |
|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
확인된 살인만 314건, 조선반도 경악케 한 사교집단의 최후 |
![]() |
세상이 거칠고 강퍅할수록 종교는 힘을 얻는다. 일제의 강압이 날로 심해지던 1930년대, 피폐해진 식민지 백성들의 신산한 마음을 뚫고 ‘영생복락’과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기승을 부렸다.
이 가운데 온 국민을 경악케 했던 것이 수백건의 살인과 음행이 드러난 이른바 ‘백백교 사건’. 그 참담한 최후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건의 배경에 가난과 무지, 정치적 부자유에 시달린 반도 백성의 안타까운 현실이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 |
![]() |
유곤용은 해주에서 가장 큰 한약국 ‘구명당(求命堂)’의 주인이었다. 황해도 신천에서 약종상을 하던 조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한의학에 뜻을 두고 고금의 의서와 비방을 두루 연구했다. 1925년 약관의 나이에 도회지 해주에 나와 자력으로 ‘구명당’을 차렸다.
유곤용의 조부는 약종상으로 자수성가해 한때 수십만원대의 재산을 모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온천이 개발되어 전국적인 휴양지로 번성한 신천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그런 유씨 집안의 재산은 30여 년 전부터 뚜렷한 이유 없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조부가 축첩을 하거나 주색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미두(米豆 · 미곡의 시세를 이용하여 약속만으로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나 도박에 손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조부는 수시로 땅을 팔고, 빚을 얻었다. 유곤용이 해주로 나올 즈음 유씨 집안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몰락했다.
유곤용의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비방으로 약을 처방했는데, 특히 위장병, 임질, 뇌신경질환 치료약 조제에 탁월했다. ‘구명당’을 개업한 지 불과 1~2년 만에 유곤용의 명성은 일대에 자자했다. 10여 년의 관록이 붙은 후 그의 명성은 황해도를 넘어 경기도와 평안도에 뻗쳤다. ‘구명당’은 조선 최초의 한약재 연구소를 설립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이 뻗어가던 유곤용에게도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1933년 임종하기 전, 조부는 유곤용에게 30년간 지켜온 집안의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할아비는 장차 너의 부귀와 공명을 위해 근 30년간 백백교를 믿어왔다. 대원님께 의지하여 재물 버리기를 초개와 같이 했다. 그러나 아쉬워 말거라. 할아비가 정성을 다해 교에 바친 재물은 이제 곧 몇 곱절, 몇십 곱절이 되어 네 아비와 네게 돌아올 거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집안이 몰락한 이유는 허망하게도 조부가 백백교라는 신흥종교를 믿은 탓이었다. 조부의 죽음으로 집안의 비극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부친 유인호는 조부보다 더 ‘독실한’ 백백교 신도였다.
조부가 죽은 후 부친 유인호는 얼마 남지 않은 가산을 정리해 가솔들을 이끌고 백백교 본부가 있는 서울로 이주했다. 재산 일체는 물론 18세밖에 안 된 딸 유정전마저 대원님께 바쳤다. 그 대가로 받은 것이라고는 고작 ‘장로’라는 허울뿐인 직함과 왕십리에 있는 허름한 방 한 칸이 전부였다.
유곤용은 헛된 망상에서 깨어나라고 4년을 두고 설득했지만, 유인호의 30년 믿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교주의 애첩이 된 누이동생 유정전 또한 백백교의 열성 신도가 됐다.
최후의 밤
1937년 2월10일, 음력 설을 맞아 유곤용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왕십리 유인호의 처소를 찾았다. 4년 만에 부친을 만난 유곤용은 무릎을 꿇고 그동안의 불효를 고개숙여 사죄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대원님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유인호는 자식의 돌연한 개심이 한편으로는 기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불안했다.
“대원님을 승안(承顔)하는 데에는 절차와 법도가 있다.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승안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먼저 선생님께 의향을 여쭈어 허락을 얻어야 한다. 만약 대원님께서 허락하시면 너는 그로부터 사흘 동안 집안에서 아무도 만나지 말고 근신하여 세상에 찌든 더러운 마음을 씻어야 한다.”
유곤용은 어떠한 곤란한 명령이라도 순종할 터이니 제발 대원님을 승안케 해달라며 거듭 부탁했다. 그제서야 유인호는 자식의 진심을 믿을 수 있었다. 유인호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2월16일 저녁 8시 왕십리 유인호의 자택에서 백백교 교주 전용해와 유곤용이 운명적으로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전용해의 애첩이 된 유정전은 오빠 유곤용에게 대원님을 승안할 때 다섯 가지 계율을 명심해서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첫째, 절대로 대원님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든 대원님 앞에서 고개를 들면 안 됩니다. 둘째, 대원님을 뵐 때는 몸에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셔야 합니다. 수건 하나 휴지 한 장이라도 주머니에 있으면 안 됩니다. 셋째, 백지장 같은 결백한 마음으로 대원님을 대하셔야만 합니다. 넷째, 대원님께서 물으시는 말씀에만 대답을 여쭙지 오라버니 편에서 무슨 말씀이고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다섯째, 대원님께서 내리시는 분부면 어떠한 것이건 절대 복종을 하셔야만 합니다.”
유곤용은 계율을 지키겠노라 다짐하고 사흘 동안 방에 틀어박혀 근신했다. 교주 전용해는 약속한 정각에 애첩 유정전과 부하 두 사람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검정색 외투를 걸치고, 고동색 모자를 쓰고, 검정색 구두를 신은 차림이었다. 겉모양만 보면 영험한 신흥종교 교주라기보다는 흡사 보험회사 두취(頭取 · 사장)처럼 보였다. 유곤용은 부친과 함께 뜰 아래로 쫓아내려가 공손히 대원님을 영접했다.
방안에 모여 앉은 얼굴과 얼굴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교주 전용해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따지고 보면 자네와 나는 4년 전부터 처남매부지간인데 오늘에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구려. 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거나 대단히 반갑소.”
간단한 인사말이 있은 후 주연이 벌어졌다. 한잔 두잔 술잔이 거듭됨에 따라 전용해는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아버지와 누이동생도 이미 서울에 와 있으니 차라리 그대도 가산 전부를 정리해가지고 서울로 오는 것이 어떠한가?” 조부와 부친처럼 속히 재산을 바치라는 말이었다.
유곤용은 긴장한 어조로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것도 대단히 좋은 말씀이나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지금 당장 올라오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아들’ 대원님의 말씀을 감히 거부하는 것은 백백교 교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용해는 격분한 어조로 다그쳤다. “그럼, 내 명령을 복종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그리고 옆에 앉은 유정전을 보고 또 한 번 소리쳤다. “네 오라비 잘났다.”
일격을 당한 유곤용은 그제서야 본심을 드러냈다. 지난 일주일간 그가 보인 행동은 교주 전용해를 만나 백백교의 악행을 따지기 위한 연극일 뿐이었다.
유곤용은 “백백교의 교리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런 얼치기 종교가 어디 있느냐”며 욕질을 했다. 세상에 나서 그런 욕설을 처음 듣는 전용해는 흥분한 나머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나이프’를 빼어들고 유곤용을 찌르려고 덤벼들었다. 이 순간이 그에게는 천려(千慮)의 일실(一失)이었으니 흉악무도한 그들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단서가 될 줄이야 악의 천재인 그도 예상치는 못하였을 것이다. (‘백백교 사건의 정체’, ‘조광’ 1937년 6월호)
안방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대청마루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던 전용해의 수하들이 교주의 신변 보호를 위해 방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유곤용의 힘은 의외로 강했다. 쇄도하는 수하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전용해의 멱살을 잡아 넘어뜨렸다.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음을 직감한 전용해는 죽을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벗어나 도망쳤다. 수하들도 각자 살길을 찾아 도주했다. 유곤용은 위험을 직감했다.
백백교 교도들이 떼지어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는 동대문서 왕십리주재소에 달려가 사정을 말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1930년 소위 ‘금화사건’ 이후 완전히 소탕된 줄 알았던 백백교가 지하로 잠복해 밀교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경찰은 현장으로 수사대를 급파했다.
산중의 시체들
수사대가 앵정정(櫻井町 · 현재의 중구 인현동) 전용해의 집에 도착했을 때, 전용해는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형사대는 백백교 총참모격인 2인자 이경득과 이순문, 장서오 등 간부 세 명을 체포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전용해의 행방을 찾기 위한 신문 과정에서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다.
백백교는 교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정조를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교단의 비밀 유지를 위해 수백명의 교도를 살해, 암매장한 것이었다. 너무나 흉악한 범죄였기에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은 보도를 전면 금지했다.
경찰은 두 달이 지난 4월13일에야 보도금지를 해제하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일제는 가고 새 세상이 온다”
이렇듯 이른바 ‘금화사건’이 발생했을 당시만 해도 전용해와 표면상 교주인 차병간은 가까스로 검거망을 벗어났다.
전용해와 차병간은 지방을 전전하며 비밀리에 교단을 재건했다. 이후 전용해는 서울로 잠입해 앵정정에 본부를 마련하고, 지방에 있는 심복 교도들을 서울로 불러모았다. 백백교 간부들은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을 순회하며 무지몽매하여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다소 자산이 있는 사람들을 은밀히 포섭했다.
“우리 백백교 교주님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천위(天位)에 등극할 인물이다. 지금 일본의 통치 아래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백백교 교주의 통솔 하에 독립이 될 것이다. 그때 각 교도는 헌성금(獻誠金)의 다소와 인물의 능력에 따라 대신, 참의,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등에 임명될 것이다.”
“오래지 않아 큰 전쟁이 날 터이니 교도들은 자산을 팔아가지고 상경하라. 교주는 신통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므로 반드시 그대들의 생명을 보장할 것이다.”
“3년 내 조선에 서른 자 이상의 큰 홍수가 날 것이다. 일반백성은 모두 물에 빠져 죽더라도 헌금한 우리 백백교도는 금강산 피신궁(避身宮)에 들어가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홍수 이후 교주 전용해가 등극하여 천위에 오르면 헌금액에 따라 관직을 제수할 것이다.” (‘백백교 사건의 정체’, ‘조광’ 1937년 6월호)
백백교 간부들은 정감록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정도령과 소리가 비슷한 교주 ‘전도령’이 후천개벽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 호언했다. 관존민비의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관직을 주겠다는 말로, 투기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불로장생, 부귀영화’라는 말로 입교를 권유했다.
일단 백백교에 입교하면 교주의 명령에 따라 토지, 가옥, 가재도구 일체를 정리해 서울 본부로 올라왔다. 교주는 신입 교도가 가지고 온 현금을 헌납하게 했다. 데리고 온 가솔 중 미모의 처녀가 있으면 ‘시녀’로 바치게 했다. 교주는 앵정정 본부로 불려온 시녀에게 ‘신의 행사’를 빙자해 욕정을 채웠다. ‘믿음이 약해’ 교주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여성은 심복 간부에게 넘겨줬다. 간부가 거느린 첩은 모두 이러한 ‘절차’를 거친 여성이었다. 교주는 수십명의 첩을 거느렸다. 7~8명의 첩을 거느린 간부도 있었다.
앵정정 본부에서 교주와 ‘신의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여성은 4~5명에 불과했다. 새로운 시녀가 들어오면 기존의 시녀 중 ‘믿음이 약한’ 시녀는 양주, 양평 등지의 심산에 사는 심복 교도들의 집으로 보내졌다. 교주는 한 달에 몇 번씩 교도들의 집을 돌며 시녀들과 ‘신의 행사’를 치렀다.
전 재산과 자녀를 교주에게 바친 교도에겐 “오래지 않아 백백교의 천하가 올 터이니 그때까지 농촌에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교도들은 연천, 양평, 철원, 평강 등 산간벽지 교통이 불편한 외딴집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교도들은 화전을 일궈 근근이 연명했다. 교단은 교도들이 근처 부락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막았고,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교도들을 수시로 이주시켰다. 교도가 수상한 행동을 하면 처자 형제를 각각 다른 지방으로 보내 격리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가족의 신변 걱정에 교도들은 차마 딴 마음을 품지 못했다.
재산과 가족을 빼앗기고 어딘지도 모르는 산간벽지로 보내져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면서도 임박한 백백교의 세상에 대한 꿈을 잃지 않은 교도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고 교단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전용해와 측근 간부는 교단에 불만을 품은 교도를 배교분자로 분류했다. 교주는 배교분자를 비밀 아지트로 데리고 가서 ‘기도’를 올려주었다. ‘기도’는 교도를 살해해 암매장하는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성인들이 타살된 후 딸린 어린 아이들은 산 채로 암매장됐다.
범죄 사상 초유의 대사건이었던 만큼 수사와 예심에만 3년이 소요되었다. 살인기록 보유자 문봉조 외 간부 24명은 보안법 위반, 살인, 사체유기, 상해치사, 살인강도, 외설, 사기 공갈, 횡령, 공사문서 위변조 등 10개 죄목으로 공판에 회부됐다.
1940년 3월13일, 경성지방법원 대법정 앞은 새벽부터 북적거렸다. 선착순으로 방청권을 배부하겠다는 예고 때문이었다. 며칠째 봄볕이 따뜻하여 봄기운이 완연하더니, 그날 아침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서 눈 섞인 비가 흩뿌렸다. 성격 급한 방청객들은 새벽 4시부터 찬비를 맞아가며 줄을 섰다. 8시쯤 800여 명의 방청객이 운집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 가운데 옷차림이 시골사람 같은 남녀 10여 명이 섞여 있었다.
9시를 조금 지나 간수 한 명이 나와 “방청객 중 피고인 가족이 있냐?”고 외쳤다.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던 시골사람 10여 명이 간수 앞으로 몰려갔다. 방청객들은 그들과 같이 섞여 있던 것조차 끔찍한 듯 이상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피고인 가족이 먼저 방청석에 들어간 뒤, 300여 명의 방청객이 법정으로 입장했다. 500여 명은 새벽부터 줄을 서고도 방청권을 얻지 못해 되돌아갔다.
문: 알 수 없습니다. 재: 전용해가 교도에게 돈을 준 일이 있는가? 문: 생활이 가난하면 얼마간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재: 생활이 곤란한 교도 중에는 교주에게 불평을 품은 교도도 있었겠지? 문: 믿음이 엷은 교도 중에는 혹 불평을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재: 그런 불평분자는 모두 피고인들에게 명령해서 죽이게 했다지. 문: 예, 그랬습니다. 재: 전용해는 교도 중에서 딸이나 누이동생이 있는 사람에게 그 딸과 누이동생을 바치라 해서 첩을 삼았다지? 전부 몇 명이나 되는가? 문: 정확한 명수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앵정정에만 34명 있었습니다. 재: 그래 전용해는 매일 술만 먹고 첩과 음탕한 생활을 해왔다지? 문: 밥보다는 술을 좋아하셔서 매일 ‘월계관’이나 ‘백학’ 한 되쯤씩 자셨습니다. 재: 전용해는 자기 재산 없이 교도에게서 모은 돈을 물 쓰듯 하여 방탕하고 사치한 생활을 했는가? 문: 예. 재: 그런 음탕한 생활을 하는 전용해를 어떻게 신의 아들이라 믿을 수 있었는가? 문: 지금 생각하니 잘못 믿고 있었습니다. 술 먹은 때는 그렇지만 선생께서 가르치는 말은 모두 훌륭해서 믿었던 것입니다. 재: 그래, 아직도 전용해를 신의 아들로 믿는가? 문: 천만에요. 지금 생각하면 모두 어리석어서 속았던 걸 깨달았습니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문봉조를 비롯한 피고인 전원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고 했지만, 교주를 지칭할 때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오랜 습관 때문인지 뉘우친다고 거짓 진술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백백교의 2인자 이경득은 전용해의 인격을 숭배해서 믿었는지 반역하면 죽이는 것이 두려워 믿었는지 묻는 질문에 정말로 신의 아들로 믿었다고 진술했다. 불평을 품고 있을 때마다 교주가 “이 놈 네가 불평을 품고 있구나. 다른 데 가고 싶거든 가거라” 하여 독심술을 가졌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나머지 피고인들도 모두 교주가 진짜 ‘신의 아들’인 것으로 믿고 백백교에 귀의했다고 진술했다. 23명의 교도를 살해한 이창문은 백백교만 믿으면 가족의 병도 낫고 또 불로장수하는 줄만 알고 입교했으나 교주가 자칫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알고 무서워 도망까지 해보았지만 교주 밑에 남기고 온 처자의 목숨이 염려되어 죽음을 각오하고 되돌아간 적이 있었다고 말해 재판정을 숙연케 했다. 방청객들은 한번 걸려들면 다시는 빠져나갈 수 없는 늪과 같은 백백교의 정체에 치를 떨었다 . 학력 심문 결과 피고 24명 중 정규 교육을 받은 자는 이자성 한 명뿐이었다. 그마저 보통학교 4년까지 다닌 것이 전부였다. 문봉조, 이경득, 김군옥, 박달준 등이 한문을 조금 알았다. 그밖에는 모두 무학이었다.
재판장이 “예심결정서를 보았으니 자기 죄를 알 터이지?”라 묻자 “무슨 종이를 받기는 했지만 무식해서 뭔지 몰랐습니다”고 진술할 정도였다. 피고인 중에는 비운의 여인이 한 명 있었다. 교주 전용해의 딸 전선녀였다. 전용해와 그의 첩 최씨 사이의 소생이었다.
재판장: 전용해의 딸이라지? 전선녀: 예. 재: 최씨와 전용해는 언제까지 같이 살았는가? 전: 제가 다섯살 때까지입니다. 재: 그후 피고는 어떻게 살았는가? 전: 여덟 살부터 어머니를 따라 여기저기 흘러 다녔고 열네 살 때 어머니와 헤어졌습니다. 재: 어머니는 어디 있는가? 전: 열네 살 때 헤어진 후로는 만나지 못해서 생사를 모릅니다. 재: 전용해와는 헤어져 산후에도 자주 만났는가? 전: 1~2년에 한 번쯤 만났습니다. 재: 그래 전용해를 만날 때 어떠했는가? 전: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울먹이며) 만나 뵙기는 했지만 아버지다운 정이 들지 않았습니다. 재: 백백교를 포교한 사실이 있는가? 전: 그런 일은 없습니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백백교는 일본이 곧 폐망하고 조선이 독립하여 교주가 천위에 등극할 것이라 선전했다. 허무맹랑한 예언이었지만, 일본이 폐망한다는 주장은 보안법 위반에 해당했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교인도 백백교를 포교한 사실만 인정되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전선녀가 그런 경우였다. 전선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공소사실을 인정하여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18명 중 14명 사형
1940년 3월15일, 수은주가 영하 7℃까지 떨어지고 연 이틀 눈이 내렸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314인의 원귀가 내린 저주라 말했다. 때늦은 혹한에도 불구하고 방청석은 여전히 만원이었다. 제2회 공판에서는 살인죄에 대한 사실 심리가 진행됐다. 314건의 살인혐의가 차례로 확인되었다.
재판장: 1930년 8월 둘이서 제2세 교주 우광현을 무주군 설천면 야산에서 목매 죽였는가? 이경득, 길서진: 예. 재: 이유는? 이경득, 길서진: 모릅니다. 대원님께서 죽이라고 해서 죽였을 뿐입니다. 재: 1931년 2월 20세가량의 여자와 그 젖먹이 애를 죽였나? 이경득, 길서진: 예. (중략) 재: 1931년 5월 교주의 첩 문봉례를 죽일 때 업고 가던 젖먹이도 죽였는가? 문봉조 : 문봉례를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애는 안 죽였습니다. 대원님께서는 애까지 죽이라 하셨지만 이경득이가 “어린애야 무슨 죄가 있느냐?”며 죽이지 말자고 했습니다. 저 역시 젖 먹다가 어미를 잃은 계집애 처지가 하도 가련해서 집에 데려다가 기르고 있습니다. 재: 문봉례를 죽인 이유는? 문: 처음엔 몰랐습니다만 후에 알고 보니 오빠를 죽인 것을 알까봐 죽이란 것이었습니다. 재: 어째 친형인 문봉진과 그 가족을 죽였는가? 문: 자꾸 서울 오겠다는 걸 말렸지만 듣지 않아 할 수 없이 상경시켰습니다. 어느 날 대원님께서 먼저 “봉진은 어떤가?” 하시는 태도가 죽이자는 뜻이었습니다. 만일 형을 안 죽이면 나도 죽겠고 내 가족 친척도 남모르게 죽겠기에 형을 죽였습니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
'알아가며(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년 익산 제석사지 발굴조사 - 백제 삼중기단 목탑지의 구조 밝혀내다 (0) | 2008.07.14 |
---|---|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負債) 수난기 (0) | 2008.07.11 |
남양주의 조말생 묘 / 신도비 (0) | 2008.06.28 |
세종과 조말생 / [冊] 세종, 부패사건에 휘말리다 (0) | 2008.06.28 |
신현(申絢.1764-1827)의 13년간 관직일기 <성도일록> (0) | 2008.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