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호리 칠기(漆器)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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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칠기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는
청동기시대에 조성된 창원 덕천리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유적은 기원전 4세기경 지역집단 내 계층분화의 양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고인돌 유적으로서
피장자의 묘역이 별도로 형성되어 있다.
묘광을 2단으로 파내려가 매장주체부를 형성하였는데 목질과 함께 칠편이 수습되었다.
이 고인돌유적은 원삼국시대에 조성된 다호리 유적과 근거리에 위치하며
지역 정치집단으로서 전통성을 유지하며 발전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다호리 목관묘 군집은 지역 수장층의 묘역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묘역 내에서도 묘(墓)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제1유형은 묘광의 규모가 비교적 크고 깊은 편으로 부장갱(요갱)을 가지며
부장품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여기에서 특히 칠기가 부장품의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다.
제2유형은 묘광이 1유형과 비슷한 예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그보다 약간 작은 편이다.
묘광 바닥에서 부장갱이 확인되지 않으며, 부장품도 1유형보다 작은 편이다.
제3유형은 묘광의 규모가 제일 작고 깊이가 얕다. 부장갱도 없으며 부장품 또한 매우 빈약하다.
각 유형은 모두 통나무 목관을 사용하고 있으며 상호간 큰 시기차도 없는 것으로 보아
묘의 유형 차이는 위계차이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묘역은 부장갱을 가지는 1유형을 중심으로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며
그룹 간에 점진적인 시간차를 가지며 조성되었다.
묘역 내 묘광의 크기와 부장품의 양, 칠기의 일반적 부장, 일부 옹관묘의 혼재 등으로 보아
상위 혈족간 공동묘역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다호리1호분 부장갱 출토 보물바구니 / 한국식동검과 칠기칼집
특히 1호묘 피장자는 묘광 규모나 부장품의 수량으로 볼 때,
2, 3유형과 비교하여 우월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무덤에서 보이는 다양한 청동기와 철기 그리고 칠기의 부장으로 보아
피장자의 정치집단 내 위치와 교역에 의한 안정적 재화 축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호리 1호분 피장자의 성격은
지역집단의 수장으로서 집단의 운영을 기획하는 교역행정가의 면모가 돋보인다.
이곳에서 출토된 칠기붓(漆筆)과 칠초삭도(漆鞘削刀), 천평 역할을 하는 청동제환(靑銅製鐶),
목간보관용 장동형칠통(長胴形漆筒)의 존재 등이 이를 반증한다.
- 다호리 1호분 출토의 칠기붓(漆筆)
또한 성운문한경(星雲文漢鏡)이나 오수전(五銖錢), 금형대구(琴形帶鉤), 소동탁(小銅鐸) 등의 존재는
연안교역을 통해 얻은 피장자의 정치적, 경제적 위상을 입증한다.
또한 재래 샤먼의 청동의기 들이 여전히 부장갱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신앙적 지도자로서의 면모도 돋보이고 있다. 각 국의 국읍 또는 하위 읍락의 지도자가 입지를 강화하고
집단을 운영하기 위하여 군사적, 정치적 역량을 확보하는 것과 더불어,
신앙적 권위를 빌어 지역집단을 통솔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단계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정치성과 종교성이라는 양면적인 권위를 지도자들이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호리 고분에서는 다량의 칠기가 출토되었는데,
칠피흔적만이 남아 있어서 수습하지 못한 칠기까지 감안한다면
토기 이상으로 칠기의 부장 빈도가 높다. 다호리 칠(漆)은 거의 대부분이 흑칠(黑漆)이지만
1호분 출토 유개합저판과 화살대에는 주칠(朱漆)이 사용되었으며,
15호분 출토 통형칠기에는 주칠로 삼각거치문을 연속적으로 시문하였으며,
이와 같은 거치문은 석촌동 토광묘 출토 방사상거치문주칠반(放射狀鋸齒文朱漆盤)에서도 확인된다.
다뉴정문경 등 청동의기에 장식되는 우리 고유의 장식문양이 칠기의 장식문양으로 채택된 것으로 보아
낙랑칠기와는 구별되는 독자적 칠기제작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다호리 출토 칠기의 종류로는
칠이 도포되는 기물의 심(芯)에 따라 목태(木胎), 남태(藍胎), 금태(金胎), 도태(陶胎) 등으로 분류되며,
용도상으로는 무기, 용기, 제기, 생활용구 등으로 다양하다.
다호리 칠기를 심지와 형태별로 분류해 보면,
목태로는 동검칠초, 각부칠반, 방형칠두, 원형칠두, 칠선, 장각돌대부두형칠기, 칠궁, 칠합,
장등칠통, 칠초삭도, 칠기붓 등이 있으며
남태로는 2호분 출토 바구니, 1호분 출토 부장갱 보물바구니(최근 분석결과 초본류의 줄기로 판명됨)
등이 있다.
금태로는 판상철부와 주조철부를 칠로 도포한 것이 있으며,
도태로는 주머니호의 표면을 흑칠로 도포한 것이 있다.
도태칠기(陶胎漆器)는 토기소성 후 잔열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칠을 도포하여
태토와 흑칠간 상호 밀착도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漢)의 낙랑칠기는 중국 사천성(四川省 : 蜀郡, 廣漢郡)의 왕실공방에서 황실용으로 제작한
고급칠기들로 소수 지배계층의 전용품으로 제작되었다.
당시의 칠기는 고가품이어서 칠배(漆杯) 하나로 동배(銅杯) 10개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낙랑칠기는 그 가치가 높기 때문에 귀중하게 취급되어
소유의 표시로 씨족명이나 소유자의 관직 등을 적어 넣기도 하였다.
칠기의 제작공정과 제작기간을 감안할 때 다호리 칠기의 경우에도
그 가치는 토기에 비해 매우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칠기 제작에 있어서 어느 정도 공정의 분화가 진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철제작공인, 칠 및 목기가공인, 토기제작공인, 옥가공 전문장인 등으로
사회 전반의 수공업 수준이 활발히 전개되는 상황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수장층은 그러한 전문공인을 어느 정도 제도권 속으로 포용하여 활용하였던 것인지 궁금하다.
칠기의 제작을 위한 벌목, 철사를 활용한 목형 제작, 칠나무의 재배와 칠액 채취, 정제 등
여러 공정에 따르는 전문화, 분업화 공정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철사(쇠조각도)와 철착(쇠끌), 회전대를 활용하여 목형을 제작하였으며,
제도적으로 정비되지는 않았으나 전문적 직업인이 칠기 제작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목, 칠기의 가공 수준은 정제, 세련되었으며,
그 수준은 현재의 남원칠기보다도 칠의 두께가 두텁고(4회 정도 덧칠) 기형은 반듯하다.
칠기의 제작은 복잡한 일련의 칠기 제작과정과 기간을 고려할 때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이다.
칠기 전문장인들은 기본적으로 목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던 장인이었으며
필요시에 칠기를 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호리 고분군에서 다량의 칠기가 출토되었으나 원삼국시대 전체를 놓고 볼 때,
칠기의 사용이 일반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호리분묘군이 특수상위계층의 묘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역시 한정된 계층에서 사용되던 특수한 용기로서 칠기가 집중적으로 소유된 것으로 보인다.
칠기의 부장은 무덤의 규모 및 공반 출토 유물의 양과 비례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예를 들어 1호분, 17호분 등 요갱을 가지는 1유형 고분의 경우에는 여타 공반 유물의 양도 많으면서
칠기의 수량도 이에 비례하여 풍부하게 부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호리 유적보다 빠른 시대의 칠기 유적으로는
초기철기시대의 황해도 서흥 천곡리 석관묘, 아산 남성리 석관묘, 함평 초포리 적석목관묘에서
칠기편이 발견되었다. 제사장의 기물로서 조금씩 쓰이던 칠기들이 이 시기에 재지재래의 기술로
다량 제작 활용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호리 유적에서 전시기의 권위적 상징물, 제사장의 표지적 상징물로 사용되던 청동의기 이외에
새롭게 출현하여 신앙적 권위를 표상하는 기물로는 '의기적 성격의 칠기'를 들 수 있다.
흑칠은 재래 전통의 흑색마연토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일상용 토기보다는 의기적 기물에 치장되었다.
특히 무기류에 적용된 칠기와 도태칠기, 주머니호에 적용된 흑색칠은 이러한 용기들이
의기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원형두, 장방형두, 돌대부장각원형두(突帶附長角圓形豆)는 모두 제의용 칠기이다.
장방형두는 이전 시기의 두형토기(豆形土器, 굽다리접시)에 비해 새로운 스타일을 띠고 있지만
원형칠두와 돌대장각원형칠두는 전시기의 두형토기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같이 다호리유적에서는 칠기를 모방한 토기, 흑색장경호로부터 전승 모방한 의기형 또는
부장형의 흑색소형토기들이 부장되며, 이것은 다분히 장제적(葬祭的) 관념의 계승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다호리 칠기가 높은 미감과 편리성에도 불구하고 일반화, 대중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칠기가 가진 희귀한 귀중품적 성격과 더불어,
그 바탕에 내재된 제의적 의미와 신앙적 신성성이라는 권위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호리 칠기의 제의적 성격은 또 다른 정치적 권위와 맞닿아 있었으며, 이것은 기원 전후한 시기에
중국계 칠기의 유행과 더불어 한동안 소국 수장층의 위세품으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낙랑칠기의 특징 중 하나가 귀족의 일상 실생활용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면,
다호리 출토 칠기의 양상은 다호리 칠초목검과 신창동 목검 등과 같이
실제로는 모두 의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것은 양 집단간의 정신세계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도교적 신선사상 등을 바탕으로 하는 한(漢) 문화와 샤머니즘적 재래재지의 전통적 신앙세계를 가진
양 집단의 차이에서 오는 문화반사 현상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한편 다호리유적에서는 한국식동검, 성운경, 옥이라는 '신기삼보(神器三寶)'가 출토되었으나
피장자의 권위를 새롭게 반증하는 것은 칠기이다.
이와 같이 흔하지 않은 칠기와 함께 청동기와 칠기를 부장하는 목관묘 유적으로는 다호리 이외에도
낙동강 어구의 김해 대성동 유적,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상주 예산리유적, 상주 산온리,
낙동강 지류역에 분포하는 경상 임당동, 신대리 유적, 경주 사라리유적 등이 있다.
한편 강이 아닌 연안항해를 통해 공통적 칠기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유적으로는
광주 신창동유적을 들 수 있다.
동일한 칠초동검(漆鞘銅劍), 또는 칠제용기류(漆製用器類) 등 칠기세트가 출토되는
이들 유적 상호간에 어떠한 친족적 또는 정치적 친연성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어려지만,
적어도 이들이 낙동강의 수운을 바탕으로 상호간 교류하였으며
공통적 신앙세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한반도 남해안지역의 다호리유적에서 왜 그렇게 칠기가 출토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다호리를 포함하는 창원의 지정학적 환경이
주변 제국(諸國)의 관계 속에서 경제적 교역망의 한 축을 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창원 다호리유적과 인근 유적인 함안군에는
칠원, 칠서, 칠북과 같이 칠(漆)을 지명으로 사용하는 곳이 많아서
이 지역의 칠(漆)의 생산과 관련이 깊은 지역임을 시사하고 있다.
창원 다호리유적은 북쪽으로 낙동강 하류의 본포나루와는 2.5㎞ 정도 비교적 근접하며,
남으로는 마산포구와 연결되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원삼국시대 다호리 사람들은 강과 바다를 무대로 왜, 예, 한, 낙랑 등과 교역하던 사람들로
다호리 1호분에서는 중국제 유물인 성운문한경과 오수전이 출토되었으며,
칠기와 청동기는 한-(韓倭)간 활발했던 물산의 교역과 주민의 이주를 생각하게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해니사금 14년조(209)와 열전 8 물계자전에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가라(함안 또는 김해세력)에 대해 침략을 꾀하자, 기라의 왕자가 신라에게
구원을 청하므로, 신라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여 신라 6부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가라를 구원케 하였다. 그리고 팔국의 장군을 죽이고 그들이 노략질한 가라인 6천명을 빼앗아
돌려보냈다" 는 내용이 있다.
또한 "3년 후에 다시 골포국(骨浦國 : 마산), 칠포국(柒浦國 : 창원), 고사포국(古史浦國 : 고성) 사람들이
갈화성을 공격하니 신라왕이 다시 군사를 이끌고 가서 크게 격파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3세기 초 낙동강과 남해안을 무대로 교역활동에 종사하던 8소국의 공동이익을 위해 벌인
연합적 군사행동으로, 철 및 토산품 교역 등에 대한 주도권 확보 전쟁으로 이해되고 있다.
낙동강, 남강, 남해안이라는 삼각지대에 천혜의 종합물류기지로 활약하였던 세력이
바로 함안(安邪國), 창원(漆浦國), 마산(骨浦國), 김해(狗那國) 등지의 포구가 있는 지역세력들이었다.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이러한 활발한 대외교류와 문물교역의 과정에서
다호리 수장층의 권력이 신장되었으며, 칠기는 신앙적 위의구(威儀具)로 활용되었다.
특히 초기철기시대의 <흑도장경호와 원형점토대토기+청동의기>라는 장제구(葬祭具)의 기본단위에서
변환하여, 다호리 목관묘의 시대에는 전시대보다 장제구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제의의 범위가 넓어진다.
<돌대(突帶)장각칠두+주머니호의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 쇠뿔손잡이단지)+
궐수형(蕨手形, 고사리모양)철기>라는 재래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장제구(또는 威儀具)가
등장하게 되며, 칠기는 일정기간 동안 장제구 변화의 매개자로서
신앙적 권위의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원삼국시대, 높이 29.8cm, 입지름 20.2cm)
-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원삼국실 학예사, 신대균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94회(2008년 6월25일)
칠기 생활용품의 보물창고 - 다호리 유적
칠기 제작기법
칠기는 옻(漆)나무 수액을 채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침전시킨 것을 이용하여 만든 기물을 말한다. 생활용품의 단순 도장에서 금은보석을 활용한 희귀한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역사 이래 다양한 칠기가 제작, 사용되어 왔다.
칠기원료인 옻나무는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 등에 분포되어 있고 남한의 칠 주산지는 원주 치악산으로 알려졌는데 이 일대 칠전(漆田)은 일제강점기 토질조사를 통해 일본인들에 의해 식재된 것이며, 그 이전에는 평안북도 태천지방의 질이 유명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남아 있다.
칠은 방수성과 방부성, 내구성이 뛰어나 이른 시기부터 귀한 물건의 표면에 옻칠을 해왔으며, 특유한 광택과 아름다움이 있어 자주 애용되어 왔다. 이러한 칠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건조시킨 나무로 기물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칠 작업을 한 목심칠기, 모시(紵)로 형태를 만든 후 옻칠을 반복하여 고급 칠기를 만드는 협저칠기, 그리고 대나무와 버드나무 가지를 이용해 기물을 만들고 칠을 한 남태(藍胎)칠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칠기 생활용품의 보물창고, 다호리 유적
삼국시대 이전 칠기자료가 출토된 유적으로는 창원 덕천리, 여천 적량동 유적 등의 지석묘 유적, 아산 남성리 유적, 서흥 천곡리 유적, 함평 초포리 유적 등의 석관묘 유적, 광주 신창동 유적, 창원 다호리 유적, 대구 달성 유적, 부산 노포동 유적, 김해 대성동 유적 등으로 여기에서 칠편이나 칠기 자료가 출토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중 다호리 유적에서는 용도에 따라 무기류, 용기류, 장신구류, 공구류, 악기류, 기타로 분류되는 다양한 칠기가 출토되어서 이 시기 칠문화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무기류에는 한국식동검과 철검의 칠초, 칠궁, 궁시, 겸형철기의 자루 등이 있다. 이들은 목심 표면에 흑칠을 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주칠의 선문이 시문된 것도 있다.
용기류로는 두(荳), 배, 통형잔, 발, 원통형합, 유개통형칠기, 칠기개, 칠도조합형파수부호 등이 있다. 용기류 중 일부에 주칠(朱漆)이 시문된 것을 제외하면 역시 목태흑칠이 중심이다.
장신구로 분류되는 것은 칠환이 유일하다. 기타로 붓과 환두소자의 칠초, 부채의 자루 등은 목채흑칠이고, 이 외에도 남태흑칠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상과 같이 다호리 유적의 칠은 용기류를 중심으로 무기류, 공구류, 붓, 현악기, 부채 자루 등과 같이 생활용품으로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목태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다호리 칠기가 알려주는 것
칠기용품의 경우 칠의 재배지가 한정된 바와 같이 재배와 채취에 상당한 제약이 있고, 제작과정에서는 불순물의 정제, 칠 안료의 배합, 도장 등 일련의 특별히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칠의 특성상 많은 장소에서 동시에 재배된다거나 원거리 운반, 더불어 장기보관이 어렵다는 점 때문에 칠을 취급하는 특수한 집단에 의한 칠기제작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전문집단에 의해 제작된 다호리 유적에서의 칠기 출토 상황을 보면 원삼국시대 초기에 칠이란 일부계층에 극히 한정되었던 고급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시의 칠기가 목태칠기 제작이 중심이었으며, 칠 기술은 목공기술의 발전과 궤를 함께 하는 것이므로 당시 목공구 등 목공제작 기술의 발달을 증거하는 것이며, 이러한 칠기제작 기술은 청동기 시대 이래 기술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오던 목기제작 기술에 낙랑칠기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인 전통을 유지하면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원삼국실 학예사, 안경숙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75회(2008년 2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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