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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 이야기 - 국보 83호像을 중심으로 -

Gijuzzang Dream 2008. 6. 10. 01:24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과 그를 둘러싼 이야기들

 - 국보 83호 像을 중심으로 -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 삼국시대, 7세기 전반, 높이 93.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도들에게 예배와 관상(觀像)의 대상이 되는 불(佛), 보살(菩薩)상 들은

대부분 정면향으로 결가부좌나 서있는 자세로 만들어져 종교적인 경건함과 자비로움을 강조한다.

이들은 진리를 깨닫거나 그에 준하는 성스러운 존재를 표현한 것이므로

보는 이와의 심리적인 거리감이 어느 정도 전제가 된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은 입체적인 형상과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하여

이들과 조형적으로 차별성을 지닌다.

또한 무언가를 고민하거나 아직 깨닫지 못한 단계를 나타낸 모습이므로

사람들에게 거리감보다는 인간적인 친근감을 준다.

 

우리나라에 약 40점이 전하는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의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도상의 한 종류이다.

이들 중에는 국보 78호와 83호 같은 걸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가사유상의 명칭과 의미 같은 기본적인 사항들조차 단일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여전히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명문을 동반한 상이나 관련 문헌기록이 전무하여 확실한 정보를 얻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반가사유상과 관련된 몇 가지 논점들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국보 83호상의 제작 시기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에는 절대 편년의 기준작이 없으므로 이 상의 제작시기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중국 남북조시대의 반가사유상의 흐름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국보 78호 상의 경우, 높고 복잡한 형태의 보관과 상체를 덮는 천의의 표현에서

6세기 전반인 동위(東魏)의 반가사유상과 유사하여 6세기후반 경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83호상은 단순화된 보관과 상체를 벗은 모습이 특징인

6세기 후반의 북제(北齊) 반가사유상과 비슷한 점에서

6세기 말이나 늦어도 7세기 전반 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석조반가사유상 - 산동성 청주 용흥사지 출토, 북제 8세기 후반, 높이 68㎝, 중국 산동성 청주사박물관

 

다만 78호와 83호의 원류가 되는 중국 像의 선후관계가

꼭 이 두 像의 선후관계를 절대적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최근에는 삼국통일 이후에 기념비적인 반가사유상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여

83호상의 제작시기를 7세기 중후반으로 늦추어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또한 83호상과 닮은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의 관계를 다루면서

편년이 엇갈리기도 한다.

 목조반가사유상 - 삼국시대, 7세기 전반(?), 높이 123㎝,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

 

고류지상은 관련 문헌기록에 의해 흔히 7세기 전기의 것으로 비정되는데,

이 像이 83호상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반면 고류지 상의 편평한 조각수법이 입체적인 83호상 보다 고식(古式)이어서

83호상의 제작시기가 고류지 像보다 늦을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이처럼 像의 제작시기 추정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있어 그 해결이 간단하지 않다.

 

 

2. 국보 83호상의 제작국

 

일제 때 발견된 84호상이 출처에 대해서는 경주설과 충청도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동 가능한 크기의 상이어서 출토지만으로 제작지를 단정짓기도 힘들다.

 

국보 78호상만 해도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 작으로 보는 설이 있을 정도로

제작국의 추정은 쉽지 않다. 논자마다 조각의 양식관이 다르며,

때로는 양식론 자체가 감상적이거나 주관적인 서술로 흐를 위험이 있어 주의를 요한다.

 

83호상의 제작국으로는 백제설과 신라설이 제기되었으나,

근래에는 신라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정리되고 있다.

 

평양 평천리 발견으로 알려진 금동반가사유상을 비롯하여,

경북 봉화 북지리의 대형 석조반가사유상, 경주 성건동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등은

단순화된 보관을 쓰고 상체를 벗었으며 치마의 옷주름이 2단 형식으로 이루어져

83호상과 같은 계통으로 묶을 수 있다.

금동반가사유상 - 평양 평천리 출토, 삼국시대 6세기, 높이 17.5㎝, 삼성미술관 리움, 국보 118호

 

                    

(왼쪽) 석조반가사유상 - 경북 봉화 북지리 출토, 삼국시대 7세기, 현 높이 1.5m, 경북대학교박물관

(오른쪽) 금동반가사유상 - 경북 경주 성건동 출토, 삼국시대 7세기, 높이 14.1㎝, 국립경주박물관

 

이는 이러한 계보의 반가사유상이 북제에서 시작하여 고구려를 거쳐

신라 지역에 수용되었을 가능성을 거칠게나마 암시한다.

더욱이 83호상과 흡사한 목조반가사유상이 있는 고류지가

신라계 이주민인 하타노 가와카츠(秦河勝)가 창건한 절이고,

신라에서 간 상을 이 절에 모셨다는 기록 등에서도 신라와의 관련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83호상의 신라설을 주장하더라도 백제 장인의 영향을 강조하거나,

고류지 상과 관련된 문헌 중에 백제 전래설을 언급하는 기록도 있어서

신라설 역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만한 새로운 자료나

획기적인 연구성과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83호상의 제작국을 일단 삼국시대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3. 반가사유상의 명칭과 조성배경

 

반가사유상이 예전에는 ‘미륵반가사유상’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일본의 야추지(野中寺) 소장 병인년(666년 추정)명 반가사유상에 ‘미륵’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점

및 일본에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간주하는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반가사유상 역시 미륵보살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엄밀히 말해 확실한 것은 아니다.

‘반가사유상’이란 명칭 역시 ‘사유(思惟)’를 제외하면 문헌적인 근거가 약한 묘사적인 신조어이다.

 

다만 선입견을 줄 수 있는 ‘미륵반가사유상’이란 말보다는,

현재 편의상 널리 통용된다는 점에서 그냥 ‘반가사유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난하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을 이해하려면 그 원류가 되는 인도와 간다라, 그리고 중국의 반가사유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표현한 간다라나 중국 남북조시대의 불전(佛傳) 부조에서

출가 전에 선정(禪定)에 들거나 출가 후 말과 마부와 헤어지는 싯달타 태자를

반가사유상으로 나타낸 예가 있다.

 

또한 중국의 반가사유상에서는 명문에 ‘태자상’ ‘사유상’ ‘용수(용화수)상’이란 말이 함께 나온다.

이로 인해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적어도 중국에서는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

이라는 주장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실제로 중국 남북조시대의 미륵보살상은 두 다리를 X로 교차하는 교각좌로 만들어진 예가 많다.)

 

중요한 점은 한, 중, 일 3국이 각기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같은 형태의 반가사유상을

서로 다른 맥락으로 이해하고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삼국시대 특히 신라에서는 전륜성왕 사상의 유행과 더불어

화랑을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의 화신으로 여기는 인식이 있었고,

미륵신앙이 유행하면서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로 만들어졌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론상으로도 반가사유상은 싯달타 태자에서 출발한 것이며,

그가 열반한 후 미래세에서 출현하는 미륵 역시 도솔천에서 내려와 출가하고 성불(成佛)하는

동일한 과정을 거치면서 세상을 구제하므로 미륵보살을 싯달타 태자와 똑같이 반가사유형으로

얼마든지 제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순환론적인 시간관이 그렇듯이, 석가모니와 미륵의 모티프는 기본적으로 원형반복적인

상통성을 지니며 반가사유상의 의미변용에도 이 원리가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의 해석에 다름 아니므로 단정은 금물이다.

 

현 단계에서 해결될 수 없는 부분을 무리하게 결론 내려 하기 보다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거나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보는 것이

문제해결에 실마리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불교조각실 허형욱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84회, 2008년 4월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