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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Gijuzzang Dream 2008. 5. 27. 16:23

 

 

 

 

 

 비운의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첫 공개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사도세자의 융릉

 

사도세자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내용을 담아 장인 홍봉한(洪鳳漢)에게 보낸 편지들이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사도세자의 병세와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명확히 설명해 주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권두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도쿄(東京)대에서

조선시대 영조, 장조, 정조 3대의 편지를 촬영한 흑백사진 자료 11첩을 발견해

‘장조’인 사도세자의 편지 내용을 번역했다고 14일 밝혔다.

현재 남아 있는 사도세자의 편지는 거의 없으며

알려진 자료도 개인적 고백이 아닌 공식 문서가 대부분이다.

 

권 교수에 따르면 1910년대 초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홍봉한의 5대손인 홍승두 집안의 원본을 거간꾼에게서 구입해 일본에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원본은 야마구치(山口)현립도서관에 보관돼 있고

도쿄대 동양사학과 다가와 고조(田川孝三) 교수가 이를 사진으로 촬영해

1965년부터 이 대학에 보관해 오다 퇴직 후 유품으로 남겼다.

 

권 교수는 “혜경궁 홍씨가 ‘친정에 있는 3대 임금의 필적과 서찰을 첩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하라’고

밝혔다는 홍씨 가문의 글이 이 편지가 사도세자의 친필임을 보여 주는 명확한 증거”라고 전했다.

 

비운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는 1735년에 태어나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

27세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아들 정조가 장헌(莊獻)이란 이름을 올렸고

1899년 고종 때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됐다.

아내인 혜경궁 홍씨는 조선왕실 여인의 회고록으로 유명한 ‘한중록’에서 남편의 비화를 소개했다.

 

   

 

 

   

 

 

 

 

 

○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불만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사도세자가 만 14세인 1749년 어느 날 장인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미친 듯합니다.”

 

권 교수는 “사도세자는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하지 못하니 자신이 세자인지 자격지심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도 이 같은 내용이 전하지만

이 편지는 사도세자가 직접 고백하는 내용이므로 아버지와의 갈등을 더 정확히 보여 준다는 설명이다.

 

안대회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사도세자에 관해 아들 정조가 만든 문집은 있지만

개인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며 “이 편지가 사도세자의 친필이 맞는다면

역사의 모호한 부분을 해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도세자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1756년 2월 29일 21세의 사도세자는 장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의 고백이다.

 

이에 대해 권 교수는

“궁내에서 의관에게 자신의 병세를 전하면 갈등을 빚고 있는 아버지 영조에게 전해질 것이 두려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사도세자가 자신의 병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도 역력히 나타난다.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

(1754년 10월 또는 11월 모일로 추정)

 

특히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합니다.”라는 내용은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네 번 정도 반복됐다.

 

 

○ 끊임없는 국정에 대한 관심

 

사도세자는 편지를 통해 병중에도 나라살림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나타냈다.

사도세자는 병을 앓을 때는 불안한 심리를 보이다가도

이성을 되찾을 때는 합리적으로 국정에 임할 것에 대비했음을 알 수 있다.

 

“(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인이 말한바 ‘서너 걸음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강남 수천리가 다하였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어

삼가 표피 1영을 보내니 웃으며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1755년 11월 회일)

 

사도세자는 편지 여러 통을 장인에게 보내

국가의 제도와 규칙이 설명된 서적과 지도를 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권 교수는 15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술발표회에서 번역 내용과 편지 고증 과정을 발표한 뒤

학자들과 자료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토론한다.

권 교수는 사도세자가 아내의 출산을 걱정하는 내용, 장모에게 바친 제문 등도 번역해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 2007-06-15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빼앗긴 줄도…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문화재  

 

 

권두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일본 도쿄()대에 머물던 2003년 어느 날,

우연히 한 연구실에서 먼지에 뒤덮인 흑백사진 자료 11첩을 발견했다.
권 교수는 이 사진의 원본이 조선왕실의 귀중한 사료임을 직감했다.

그의 직감을 확인시켜 준 건 1965년부터 이 대학 동양사학과에서 ‘조선사’를 가르치다 퇴임한

다가와 고조() 교수의 꼼꼼한 기록들이었다.

다가와 교수는 이
편지를 사진으로 촬영해 도쿄대에 남겼고,

한국 관련 사료 목록을 정리한 책에 이 편지를 ‘사도세자’가 썼다고 기록했다.
게다가 다가와 교수는 이 책에 편지 원본이 야마구치()현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는 이 편지를 ‘A’ 등급으로 기록해 이 자료의 의미와 가치도 전했다.

그는 매우 가치가 높은 원본 사료일 경우 ‘A’ 등급을 매겼다.

권 교수는 이 귀한 편지를 찾아낸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쉬움이 더 크다.

사도세자가 남긴 편지는 모두 59첩이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권 교수가 일본에서 찾은 11첩과 기존에 한국에서 발견된 5첩이 전부다.

나머지 43첩은 국내 또는 일본 어딘가에 그 역사적 가치가 묻힌 채 잠들어 있는 것이다.

해외로 약탈 또는 유출된 문화재는 얼마나 될까.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7만5000여 점에 이른다. 이 중 3만5000여 점이 일본에 있다.

하지만 실제 일본에 유출된 문화재는 이보다 10배 가까이 많은 30만여 점이라는 게 학계의 정론이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지만

정부 차원의 인력과 예산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의지와 관심도 적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번 사도세자의 편지 발견을 계기로

정부는 민간단체와 학자들의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 조사 작업을 어떻게 지원할지 고민해야 한다.

학자들이 수집한 자료와 연구결과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하는 일도 정부의 지원 없이는 역부족이다.

 

사도세자의 편지 내용이 발표된 15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술발표회에서

“이 귀한 서찰들이 일본에 있다니 참 착잡하다”는 어느 교수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 조은아 사회부
achim@donga.com
- 2007-06-18 ⓒ 동아일보 & donga.com,

 

 

 

 

 

 

 

 

 사도세자의 비극()

 

 

사도세자의 비운 이면엔 ‘권력암투의 그늘’
영조는 아들을 정적으로 여겼다?

 


○ 생각의 시작

 

최근 조선 정조(본명 이산)를 배경으로 하는 TV 드라마와 소설이 봇물을 이루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정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이유는 그가 정계와 학계를 모두 장악한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인

‘군사()’, 즉 ‘학자 군주’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모습은 지난해 말 있었던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등장을 열망하는 시대상과 맞물려 들어 갔다.

실제로 영, 정조로 대표되는 18세기는

세종대왕으로 대표되는 15세기에 이어 300년 만에 정치 경제적 안정과 찬란한 문화적 성장을 이루어

조선왕조 중흥의 꽃이 활짝 핀 전성기였다.

그러나 왕조 중흥의 꽃을 피운 이 시대에 왕실에서는 아주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바로 장헌세자(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이었다.

그동안 영조와 정조가 남긴 역사적 업적들 사이에 묻혀 사도세자에 대한 관심은

호동왕자, 마의태자, 소현세자 등과 더불어 그저 비운의 왕자 정도로만 알려져 왔다.

14년간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던 사도세자는 무슨 이유로 아버지 영조와 어긋나게 되었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점을 여러 각도로 생각해보는 것도

영, 정조 시대의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런 생각은 어떨까?

혹시 사도세자가 정신병자였던 건 아닐까?
사도세자가 죽은 후 그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기록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 대신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이 그 자리를 메웠다.

  

하늘이 아무쪼록 그 흉악한 병을 지어 몸을 그토록 만들려 하신 것이로다.

하늘아, 하늘아, 차마 어찌 그리 만드는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이 글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글이다.

세자의 정신병이 초래한 비극을 통탄하는 한 맺힌 부인의 기록은

후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써내려간 ‘한중록’의 결론은 사도세자가 기행을 일삼다 결국 영조에 의해 여드레 동안이나

뒤주에 갇혀 죽은 정신병자이며 영조 역시 성격이상자라는 것이었다.

정신병과 이상 성격의 충돌이 비극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가?

사도세자를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의 영수 홍봉한의 딸, 홍인한의 조카이다!

 


○ 뒤집어 생각해볼까?

혹시 사도세자는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었던 건 아닐까?
사도세자가 죽기 2년 전,

즉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시기에 온양의 행궁()인 온궁()에 요양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한 군마가 마구간을 뛰쳐나가 콩밭을 상하게 하자 세자는

그 군마의 주인 위사(衛士)를 처벌하고 밭주인에게 후히 보상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백성을 고통에 빠뜨리는 부역을 감해주라고 명령하였고,

온양 읍내의 부로(父老)들과 이름 없는 선비들을 불러 도타운 말로 학문에 힘쓸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이 글을 통해 볼 때 사도세자는 오히려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에 가깝다.

또한 다른 기록에서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무리 없이 이끌어왔고,

영민하며, 무예 또한 출중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사도세자를 미치광이로 보는 시각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겠는가? 오늘 조정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가

도리어 부당(父黨 · 영조의 당), 자당(子黨 · 세자의 당)이 되었으니,

조정의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영조실록’)

 

바로 이 ‘부당’ ‘자당’이라는 말에서 세자에 대한 영조의 인식이 명확히 드러난다.

즉 영조는 세자를 자신의 정적이자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역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영조는 남달리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권력은 눈물과 인정을 넘는 것이었다.

- 이철광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
- 2008-02-18[논술/교과서 뒤집어읽기]ⓒ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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