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500년의 조선왕조가 망하여 일본에 합병되자,
의혈(義血)의 조선 선비들이 곳곳에서 목숨을 끊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참을 수 없는 자신의 분노를 땅 속에 묻어야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세 분을 꼽는다면 경상도 출신의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 : 1842~1910),
전라도 출신의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
충청도 출신의 일완 홍범식(一阮 洪範植 : 1871~1910 : 벽초 홍명희의 부친)이다.
이만도는 69세, 황현은 56세, 홍범식은 40세
서로 연락할 수도 없던 당시에, 약속이나 한 듯이
단식으로, 독약으로, 목매달아서 목숨을 끊어 핏빛 의혼을 청사에 길이 휘날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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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고택의 전경 (사진작가, 황현만) |
매섭고 무서운 선비들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자신이 끊는다는 ‘자결’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살고 싶은 마음이야 인간의 본능이고,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싫은 일이던가.
그래도 그들은 인간의 보통 마음을 뛰어넘어 나라를 빼앗겨 망했다는 분노와 울분 때문에,
사람이라면 모두가 넘기 어려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위대하고 성스러운 독한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고 말았다.
장하고 대단하며 무서운 일이다.
황현은 미미한 가문의 출신으로 뛰어난 시재(詩才)와 문장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에 그치고 벼슬에도 나가지 않은 전라도 구례의 꼿꼿한 선비였지만,
이만도와 홍범식은 명문대가의 후예로 그야말로 기득권층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풍산홍씨로 벌열의 집안에서 태어난 홍범식은
충청도 괴산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음직(蔭職)으로 금산군수(錦山郡守)로 재직하다가
합병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이만도는 경상도 안동 출신으로 세상에서 유명한 퇴계 이황의 11세 후손이었다.
대대로 학문과 벼슬로 이름이 높았지만, 할아버지 · 아버지와 함께 3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린 기득권층인데다 자신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더욱 혁혁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이들이 모든 명예와 기득권을 통째로 버리고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죽음을 스스로 택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만도가 세상을 떠나자
호남 장성의 대학자이자 한말의 의병장이던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 1846~1916)은
이만도의 ‘묘갈명’(墓碣銘)에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우리 조선이 한창 융성하자 퇴계 선생께서
도학(道學)으로써 한 차례 문명(文明)의 운세를 열어 다스려지게 하더니,
국가가 망하자 향산 선생이 절의(節義)로써 만세토록 내려오는 강상(綱常)의 중요함을 붙드셨다.
대체로 도학과 절의는 다른 길이면서도 하나로 모아지고,
일이야 다르지만 공로는 한 가지여서 하늘과 땅 사이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유교국가였다. 유교의 가장 큰 덕목은 도학과 절의이다.
퇴계는 성리학이라는 도학으로 조선왕조 철학의 근간을 세워 나라 융성의 기틀을 세웠고,
향산은 유교의 다른 덕목의 하나인 절의를 몸으로 실천하여 조선의 혼을 천하에 떨쳤으니,
역사적 임무를 그 집안에서 완성했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만도의 가계
이만도의 자는 관필(觀必), 호가 향산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의 직계 후손이니 조선왕조 유학의 최고봉 집안에서 태어났다.
퇴계 가문의 학문이야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대대로 벼슬길도 끊이지 않아 높은 명성을 얻은 집안이니
특권층이자 기득권층 출신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만도의 고조할아버지 이세사(李世師)는 문과에 급제한 학자 · 관인(官人)이었고,
증조부 이귀서(李龜書)도 학문이 높아 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나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던 학자였다.
이른바 3대 문과 집안이라고 일컬어지는 가계는 조부 때부터 시작된다. 할아버지 이가순(李家淳)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에 이른 문신으로
하계(霞溪)라는 호로 널리 알려진 분이며,
아버지 이휘준(李彙濬)도 호가 복재(復齋)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오른 명망 높은 선비였다.
거기다가 자신이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니 가문의 융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그냥 알아볼 수 있다.
퇴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나 시례(詩禮)의 유풍을 흠뻑 적시며 살았던 이만도는
바로 자기 아버지의 뜻 깊은 교훈을 잊지 않고 살았으니
가문의 유풍은 한 인간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25세인 1866년 이만도가 문과에 장원하자, 아버지 복재공은,
“선비가 벼슬에 나가면 태평한 시대에야 임금을 도와 백성들에게 혜택을 끼쳐야 하지만,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는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니 너는 힘쓸지어다”
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런 가문의 가르침은 끝내 그를 역사적 인물에 오르게 했다.
이만도의 가계는 분명히 특권층이었다.
그러한 계층에 속하면서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초개처럼 목숨까지 버렸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과 덕행이 더욱 고결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귀족에게 부하된 높은 의무, 그런 책임감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런 책임을 완수했던 점에서
그의 영광된 삶을 예찬하게 된다.
나라가 망하자 높은 신분과 귀한 집안에서는
일본에 아부하고 협력하며 그들에게 동화되는 일에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적은 수효지만,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생명까지 바친 사람이 있었던 것은
그래도 의리를 숭상하던 유교정신이 길러준 민족혼의 긍정적 측면이었다.
이만도의 후손들이 보여준 독립운동의 혁혁한 역할에서도
그의 가계는 대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벼슬살이
이만도는 25세에 장원급제한 이래, 명문의 후예라야만 가능한 여러 청직(淸職)을 거치며
많은 벼슬을 역임한다. 성균관의 전적(典籍),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명예로운 옥당벼슬인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오른다.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임금에게 곧은 진언(進言)을 하기 시작하자 대신들의 칭찬이 자자했고,
국가의 장래와 미래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밝힐 때에는
모두가 옛날 대신(大臣)의 풍모가 있다는 격려를 받았었다.
옥당에 들어간 이후에는 교리 · 부교리 · 장령을 역임했고,
지평 · 병조좌랑 · 응교 · 부응교 · 사간원 집의 · 성균관 사성 · 장악원정 등의
여러 버슬을 두루 역임했다. 그 뒤 고향에서 가까운 양산군(梁山郡)의 군수로 발령 받아
부모님 봉양에 편하도록 조치해주었으니, ‘이양산(李梁山)’이라는 호칭은 그래서 얻게 되었다.
41세이던 1882년에는 통정대부의 위계에 올라 공조참의 · 동부승지라는 당상관에 제수되었다.
그때는 벌써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때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곧장 고향으로 내려와
책을 읽고 뜻을 구하며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42세 때에도 연달아 동부승지의 제수(除授)가 있었지만 전혀 응하지 않고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후학들과의 강학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43세에 비로소 ‘주서절요’(朱書節要)를 읽었다는 연보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그 무렵부터 주자학과 성리학 연구에 침잠했음을 알게 된다.
그 무렵 당대의 학자이던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 등과도 학문토론을 시작했고
많은 글을 짓고 학자들과의 교류를 확대하며 수양과 학문 연마에 정열을 바쳤다.
1895년 향산은 54세였다. 이 해는 기울던 나라에 흉측한 참변이 일어났으니
명성황후 민비의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의분을 견디지 못한 향산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대를 쳐부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도모를 시도하면서 참았으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부끄러움을 이기느라 통곡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64세의 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죽어야 한다는 뜻을 더욱 굳혔다.
나라가 망하던 무렵에 옛 신하들에게 의미 없는 벼슬 위계만 높여서 내렸으니
1907년에는 가선대부, 1909년인 68세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위계에 올랐으나
일절 받지도 않았고 사용하지도 않았다.
당상관인 동부승지가 마지막 벼슬이었고, 제대로 행한 벼슬은 양산군수가 마지막이어서
세상에서는 전라도의 홍금산(洪錦山 : 금산군수 홍범식-그때 금산군은 전라도 소속이었음),
경상도의 이양산(양산군수 이만도)을 망국에 절사한 의인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마침내 경술년의 국치(國恥)
향산은 융희 4년인 1910년, 69세의 노인이 되었다.
망국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던 그 시절, 마음을 안정하지 못한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생활을 했다.
그 전해에 광덕(廣德)으로 이사 가서 살던 향산은 다시 명동(明洞)으로 옮겼으며,
다시 사동(思洞)으로 옮겼다가 또 명동으로, 광덕에서 백동(栢洞)으로 옮겨 살았다.
그해 음력으로 7월25일(양력 8월29일) 나라가 일본에 합방되어
고종황제는 덕수궁왕(德壽宮王)이 되고 융희황제는 창덕궁왕(昌德宮王)으로 강등되어
나라 없는 백성들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깊은 산속 마을에 숨어서 살던 이만도는 음력 8월1일에야
친구들인 유필영(柳必永) · 권재훈(權載勳) 등이 찾아와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죽는 일 아니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이만도는
부모님 묘소에 올라가 통곡하는 일만 계속했다.
14일 동안 통곡으로 보내다가 음력 8월14일부터 음식을 끊고 부모님 묘소에 올라가 통곡한 뒤,
안동 예안군의 청구리(靑丘里) 율리(栗里) 마을 재종손(再從孫) 이강흠(李綱欽)의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구유허비문
이만도가 청구리 율리 마을에서 음력 8월14일에서 9월8일까지 24일간 단식하다
마침내 운명한 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재종손 이강흠의 집이다.
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 신하가 어떻게 자신의 집에서 편히 죽어갈 수 있느냐고 여기면서,
모든 선산을 찾아가 통곡하면서 이곳저곳의 거친 야외만 찾아다니다가
끝내는 죽을 장소를 청구의 율리 마을로 정하였다.
이만도의 의혼을 기리기 위해 우리가 찾아간 그곳에는 참으로 초라한 비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이름 하여 ‘청구유허비’(靑丘遺墟碑)였다.
빗돌을 살펴보니 위당 정인보가 글을 짓고 백범 김구가 앞 비문을 쓴 민족의 보물이었다.
“경술(1910)의 국치에 앞전의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였던 향산 이만도공이
합방소식을 듣자 조상의 묘소에서 통곡하며 하직하고는
먹지 않고 24일이나 줄곧 지내다가 돌아가셨는데 여기가 그 장소다.
그해(1910)는 공의 나이 69세였다.
음력 7월 병인(25)일에 나라가 망했으나
공은 외진 곳에 살고 있어 음력 8월1일에야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아파 살고 싶지 않았다.
을유(8월14)일에 아침을 들지 않고 집에서 나가,
재종손 강흠(綱欽)의 초가집에 이르자 밥이 들어오기에 물리치라고 명하였다.
아침에도 밥이 들어오자 또 그랬다. 왜 그러시냐고 물으니 뜻을 결정했다고 일렀다.
아우와 아들이 달려와 울어대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울지 마라’하고는 돌아가기를 권하면서,
‘우리 임금님은 갈 곳이 없으신데 어떻게 차마 집에서 거처하겠느냐’고 하였다.
선비나 벗들이 찾아와 안부를 물으며 의(義)를 지키려고 그러느냐고 말하면,
처량한 모습으로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했다.
을사(9월5일)일에 왜인 경찰관이 와서 이유를 물었다.
그런 뒤에는 곁의 사람에게 미음을 가져오게 하여 주사기로 입에 넣으려 했다.
공이 박차고 일어나 큰 소리로 꾸짖으니 목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모두 낯빛이 변해서 달아나 버렸다.
그 후 4일 뒤에야 눈을 감으니 바로 9월8일 무신일이었다.
이강흠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자 초가집은 무너졌다.
왜가 패한 3년 만에 손자 이동흠(李棟欽)이 표석(表石) 세우기를 도모하기에
정인보가 삼가 그에 관한 일을 기록하였다.
생각컨대 빗돌이 서게 되면 이 장소도 유명해질 것이다.
그러니 이 장소에 대하여 자세하게 쓰지 않을 수 없기에 삼가 이어서 적는다.
이곳은 예안의 청구촌인데 작은 마을로는 율리(栗里)다.
마을 앞에는 산이 있으니 문산(文山)이다. 위당 정인보가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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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의 유적지에는 청구비와 묘소와 고택만이 남아 있다.
청구유허비(왼쪽)는 위당 정인보가 글을 짓고
백범 김구가 글씨를 썼다. 사진작가 황헌만 |
조선의 마지막 학자이자 문장가이던 위당 정인보의 글맛이 제대로 나타나 있는
짧고도 내용이 넉넉한 글이다. 앞면의 큰 글씨는 애국자 백범 김구의 글씨이다.
위당의 글에 백범의 글씨라면 이 나라의 국보가 되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이 빗돌의 주인공은 민족의 의혼(義魂), 향산 이만도가 아닌가.
향산 고택, 안동시 안막리
오래 전부터 안동을 가면 찾아가던 곳이 시내 안막리에 있는 ‘향산고택’이다.
본디는 퇴계의 묘소에서 가까운 하계(下溪) 마을이
진성이씨 집성촌이자 향산 이만도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았던 마을이다.
그곳에 있는 향산의 고택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마을이 온통 수몰되자
집을 통째로 옮겨 안동시 안막리에 다시 세웠다.
3대 문과에 3대 독립운동가라는 세상에 드문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이
거기에 덩실하게 자리 잡고 있다.
유림정신이 강하고 유교문화의 맥을 그런대로 지키고 있다는 안동의 오늘은
그 향산고택을 말하지 않고는 논할 수 없다.
해마다 40~50명의 전국 선비들이 모여 퇴계의 학문을 논하고
향산의 의혼을 말하면서 향산고택의 향기는 온 나라로 퍼져나간다.
필자도 오래 전부터 ‘향산고택을 출입하는 사람들’ 모임에 가담하여 그곳을 출입한 지 오래다.
물속에 잠긴 옛날의 터전이야 찾을 길 없고,
이제는 향산의 유적지라고는 ‘청구비’와 ‘묘소’와 고택이 있을 뿐이다.
비록 퇴락한 옛날의 기와집이지만, 방에 들어가면
이가순 · 이휘준 · 이만도 3대 문과급제 교지(敎旨)가 복사되어 벽에 붙어 있고,
이만도와 그의 아들 이중업(李中業), 그의 손자 이동흠(李棟欽) 3대 독립운동가 서훈장이 복사되어
전시돼 있다.
나라를 잃자 분통을 이기지 못하는 애국심으로 24일간 단식으로 자결한 애국자 · 독립운동가 이만도,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파리장서 등 온갖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이중업,
왜정 때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를 치른 이동흠,
이들 3대는 물론이려니와 이중업의 부인 김씨, 둘째 아들 이종흠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 집안에서 배출되었다.
퇴계와 향산으로 이어진 성리학적 의리개념과 애국심이 그러한 가문을 이루었을 것이다.
청구일기

세상에 이런 희한한 일기도 있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을 방도를 찾느라 10여일을 배회하다가,
마침내 단식으로 결정하고 죽을 장소까지 집이 아닌 외딴 곳으로 정하고 나서,
이만도는 음식을 끊었다.
시작한 날에서 목숨을 거둔 날까지 24일간,
죽어가는 기록, 죽음의 일기를 ‘청구일기’(靑丘日記)라는 이름으로 남겼다.
죽어간 그 장소가 청구리였기에 붙인 이름이다.
원문이야 휘둘러 쓴 초서가 많아 읽기도 쉽지 않았는데,
최근에 안동의 한국학진흥원에서 탈초하여 번역까지 마쳐
‘향산전서’(響山全書)로 간행하였기에 아무나 읽고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몇 대목을 간추려 읽어보자. 운명하기 직전의 이만도는 자신의 일생을 간단하게 회고하였다.
“나는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을미(1895)년 국모시해 사건에 한 차례 죽지 못했고,
을사(1905)보호조약 때 두 번째로 죽지 못했다.
산으로 들어가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했던 것은 오히려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이제는 희망이 이미 끊어졌다. 죽지 않고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나라에 위기가 다가올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였으나 가느다란 희망으로 때를 기다렸건만,
끝내 그런 희망이 끊기자, 그는 결연히 자결을 택해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는 길을 가고야 말았다.
정인보의 비문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지만, 망국에 항거하여 자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왜의 경찰당국은 매우 긴장하고 자주 찾아와 동태를 살피면서 예의주시하였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방문객이 찾아와 격려하고 위로하던 중이어서
왜경은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단식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아차린 왜경은
마침내 이만도에게 강제급식을 통해 자결을 방지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운명하기 3일 전인 음력 8월5일의 기록이다.
“예안 주재 왜경 한 사람과 수비병 세 명, 순검 세 명이 와서 위협하고 공갈하는 것이 전보다 더했다.
그러고는 ‘영감님께서 정신을 수습할 수 있겠소?’라고 말하였다.
모시는 사람이 ‘정신은 이미 수습하기 어렵소’라고 하였다.
왜경이 ‘정신이 있을 때 권해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면
정신이 없을 때 모시는 사람들이 음식을 왜 올리지 않는가?’라고 하고는
‘속히 미음을 가져오라. 내가 당장 주사기로 강제로 음식을 먹여야겠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 곧바로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는 내 명대로 자진하고자 하거늘 지금 너희들은 나를 빨리 죽이고 싶어하는가?
내 빨리 죽고 싶으니 즉시 총포로 나를 죽여라’고 하였다.
이내 창문을 열고 가슴을 내보이면서 계속하여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일본인이 드디어 당황하여 황급히 문을 닫고 피했다.
‘상부의 명령이지 우리가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물러갔다.
선생은 계속하여 소리지르며, “‘나는 당당한 조선의 정이품 관리다.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설득한다는 것이고,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냐?’라고 다그쳤다”
강제급식에 항거하여 죽는 순간에도 조선 선비의 의혼을 통쾌하게 외치던
향산의 목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지면서,
조선의 독립과 해방의 종소리는 먼 데서 들려오기 시작했었다.
이런 의인이 바로 향산 이만도다.
마지막 유시(遺詩)
가슴 속의 피 다하니 이 마음 다시 허하고 밝아지네 此心更虛明 내일이면 깃털이 돋아나 明日生羽翰 옥경에 올라가 소요하리라 逍遙上玉京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가슴에 피가 마르니 마음이 더 허하고 밝아진다니
얼마나 투철한 정신인가.
오히려 죽어가면 날개를 달고 옥황상제가 있는 하늘로 올라가 즐겁게 거닐겠다니
이 얼마나 뜨거운 의혼인가.
호생오사(好生惡死)!
사는 것은 좋고 죽기는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보통 마음,
어찌하여 그렇게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대의를 찾아 당당하게 떠날 수 있었을까. 대단하다.
이만도의 ‘묘갈명’을 지은 호남의 학자이자 의병장이던 기우만은
“회고해보건대, 나야 구차스럽게 목숨을 훔쳐서 사는 사람, 향산공께서
마땅히 가볍고 천하게 여길 사람인데, 그분을 평가하는 일대기를 짓는 일까지 맡다니
홀로 마음 속에 부끄러움이 없을쏘냐”
라고 말하여 죽지 못한 사람의 수치심을 토로하였다.
어디 그것이 기우만만의 부끄러움이겠는가. 못 죽은 모든 인간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기우만은 명문(銘文)의 마지막에서,
“뒷날 죽는 사람들 / 그 묘소 곁에 묻히고 싶으리”(他日有死 願埋其側)
라고 읊어서 향산 이만도의 묘소 곁에 묻히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글을 마쳤다. - 2008-04-04, 경향,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