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암산은 불암산, 수락산 ,백운산을 거쳐 백두대간의 금강산과 백두산에 이르게 된다.
'검암(儉岩)'이라 함은 한문자 그대로 바위가 없거나 적다는 뜻이다.
반면 검암산 정상에서 뒤로 바라보이는 불암, 수락산은 단단하고 흰 화강암으로 뒤덮여
백두대간의 뼈대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를 풍수학자들은 세산(勢山 : 산의 기운이 거칠어서 바위들이 우람차게 드러나는 산) 이라 하고
검암산을 형산(形山)이라 하여 이곳에 혈(穴)자리가 존재한다고 한다.
...穴은 곧 '明堂'이라 불리며 묘터를 잡거나 집터를 정하는데 오늘날도 유용하게 쓰인다.
동구릉의 주산이 바로 검암산이다. 검암산 정상에 서면 동구릉의 60만평 경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는 닭이 알을 품듯이 나래를 모아
아홉 개의 혈자리를 모으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동구릉이 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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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초입에 들어서면 공원 같은 주차장에 노송 몇 그루가 이곳이 조선 최초의 왕릉이며 바구니처럼 감싸 안은 산세가 범상치 않음을 짐작케 한다.
검암산 발치의 물챈 밭에서 발원한 동구천의 맑은 물은 사철 흐르고 있다.
오늘날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오염되지 않은 개울에는 버들치가 살고 반딧불이의 먹이가 되는 다슬기가 붙어있을 만큼 검암산의 품은 깊고도 푸근하다.
동구천은 왕숙천에 흘러들어 한강으로 합류한다.
왕숙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퇴계원에 닿게 되는데
필자가 20여 년 전 초임시절에 퇴계 이황선생과 관련이 있겠거니하고 지레짐작했던 적이 있다.
... 여기서 퇴계원의 유래를 옮겨 보자면
태조임금이 함흥에서 환궁할 때 남재와 매사냥꾼을 따라 무의식중에 이곳 퇴계원까지 와서 보니
삼각산(북한산)이 보여 “아차 내가 남재의 꾐에 속았구나”하고 길을 돌이켜 내각리(내곡리)로 물러가
궁궐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이 물러갔다 하여 퇴조원(退朝院)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태조가 도성 바깥 풍양궁(豊壤宮)에 머무르니
조정의 신하들이 아침마다 태상왕에게 조례를 올리고 정사를 문의하려 했지만 얼씬도 못하게 해서
신하들은 서남쪽으로 몇 십리 떨어진 퇴계원 밖에서 풍양궁 쪽을 향해 절만하고 물러갔다 하여
퇴조원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그 후 인근 내곡리(내각리)에 연안 이씨 월사 이연구의 후손에 조온이란 자가 있었는데
일반 상민들이 “퇴조원” - “퇴조온”의 지명을 부르는 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거 같아
조온의 아들이 퇴계원(退溪院)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고 전한다.
... 그렇다면 풍양궁(豊壤宮)은 또 무엇인가?
퇴계원에서 왕숙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오늘날도 경치 좋은 밤섬 유원지가 나타나고
곧 갈래길이 나오는데 왼쪽 길로 접어들어 골짝 진 곳으로 “궐리” “대궐터”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풍양궁(豊壤宮)터 이며
마을 속에는 이곳이 옛 궐 터임을 알려주는 비석 2기와 보호비각이 주택들 사이로 힘겹게 남아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양주도호부>조
“양주 동남쪽에 있으며 곧 풍양현의 옛터이며 태종이 거동하여 계시던 곳”이라 하였고
세종대에 도성을 중심으로 동쪽에 풍양궁(豊壤宮), 서쪽에 연희궁(衍禧宮),
남쪽에 낙천정(樂天亭)의 세 이궁(離宮)이 있었는데
세종의 선왕인 태종 때 피방(避方)할 요량으로 짓기 시작하여 세종초기에 마련되었다고 한다.
실록에는 풍양의 지명이 태조 3년(1403) 6월23일에
각 고을의 쇠하고 성한 것과 넓고 좁은 것에 따라 좌우도로 고치게 하는데서 “풍양”이 최초로 보이고,
“풍양궁”에 관한 기록은 세종 1년 11월 23일
<상왕이 영의정에게 포천과 풍양에 이궁 지을 뜻을 전해 말하다>로 뜻을 정해
그 다음날 <상왕이 풍양과 포천에 거둥하여 이궁 지을 터를 살피다>터를 정했으니
서울에서 40리가 된다고 적혀있다.
곧이어 군사를 풀어 이궁에 소용되는 재목을 벌채하기 시작하여 세종 2년 4월10일에는
<임금이 낙천정에 문안 가서 헌수(獻壽)하고 돌아오는데,
임금이 가뭄을 근심하여 노상에서 말 모는 구종(驅從)을 시키어 풀뿌리를 뽑아오게 하여 친히 보니,
이는 가물음의 깊고 얕음을 알고자 함이다. 중외(中外)에 명령하여 술을 금하게 하였다.
상왕(태종)이 원숙에게 명하기를.... (중략), 풍양 이궁은 이른 봄에 이미 필역(畢役)하였고...>로 보아
이때쯤 완공됐음을 알 수 있고 같은해(세종 2년 : 1420) 7월6일
“상왕(태종)이 풍양궁에 돌아가다”를 미뤄 보건데 이때쯤 풍양궁에 태종이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그해 12월 29일 <풍양궁에 나아가 새해를 맞이하다>까지
세종이 친히 여섯 차례나 풍양궁에 문안하고 “이촌”을 시켜 여러 번 문안을 드린 기록과 함께
세종 3년에는 상왕이 편찮은 등 무려 37차례에 걸쳐 문안하거나 임금이 행행(行幸)하였다.
이후 중종 31년(1536)에 풍양궁의 기록이 마지막으로 나타나고
숙종 22년(1696)에는 “풍양궁터“로 표기 된 걸로 보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이 사이에 허물어 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이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영조 31년(1755) 1월 28일 친필로
전면에는 “태조대왕재상왕시구궐유지(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라 쓰고,
후면에는
“황명숭정기원후삼을해중춘주정간차배수경서(皇明崇禎紀元後三乙亥仲春晝停干此拜手敬書)”와
“지명풍양(地名豊壤)”의 비석과
고종황제의 친필로 “태조고황제소어구궐유지(太祖高皇帝所御舊闕遺址)”
“광무구년을사계추배수경서영내부견석(光武九年乙巳季秋拜手敬書令內部堅石)”라고
앞뒤에 새겨져 있다.
비록 지금은 비각만이 주택들 틈에 옹색하게 묻혀 있지만
그 시절의 아늑한 골짝과 함께 왕숙천과 밤섬, 벼락소유원지 등을 유추해 보건데
빼어난 경치가 아니었을까 짐작되지만.
서울에서 40리 길을 {당시 10리는 5.2Km : 20.8Km}한 달 에도 몇 번씩 행차 했다니
민초들의 노고가 어떡했을 런지.....
이제 왕숙천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자.
태조 이성계가 상왕으로 있을 때 함흥에서 서울로 돌아오는데 이곳에 이르러 여덟 밤이 되었으므로
“아, 여덟 밤이로구나. ” 하여 “여덟 밤이” 팔야리(八夜里)라는 설과 8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팔야리와 함께 “왕숙천(王宿川)”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先王)이 길이 잠들다(永宿 : 영숙)”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왕숙천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제 동구릉으로 다시 돌아와 초입에 있는 동창마을은,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홍천현 관할로 되었으며, 고려 명종 때 이, 최, 김 3성의 불교신자가 물걸리에 절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동창은 조선조의 역촌으로 서울-영동간의 교통 중심지의 요지이기도 하였으며, 중종 때 대동미 수집 창고가 홍천의 동쪽에 위치한데서 유래되었다. 홍천에서 들어와서 삼포로, 삼포에서 장평을 걸쳐 작은 솔티제를 넘어 새마을로 들어와서, 동창마을을 지나 행치령을 통해서 운두령을 넘었기 때문에 가장 짧은 단거리 교통로로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는데 지면의 한계로 이 모든 지명들을 아뢸 수 없음이 아쉽다.
또 바로 지척에 있는 베탈고개는, 교문 사거리에서 동구릉에 오는 옛길(43번국도)은 20여 년 전만해도 편도 1차선 길로써 철길 굴다리를 지나면 고개 비슷한 곳이 나타나 내리막인 듯 느끼는 곳이 있다. 왕숙천이 넘쳐흘렀을 때 이 고개로 배를 타고 피하였다 하여 배탈고개인데, 이것이 후에 베틀고개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이 정말 고개 일까 짐작이 가질 않는다. 그나마 초임시절 이곳을 지나다닐 때는 양쪽으로 야트막한 언덕과 절개지로 인해 배탈고개인지 베틀고개인지 버스 안내 소리에 동구릉이 다음 정류장임을 알아 차렸다. 그럴 때마다 과연 옛날에 예까지 물이 들었을까? 하고 반문해 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금천교(지금 횡단보도쯤에 큰 돌다리가 있었다 함)와 연지(방지원도, 方池圓島)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고..., 동구릉 들머리에 있던 큰 돌다리 사진이나 초임시절 보았던 입구의 방지원도 사진이라도 볼 수 있다면 하는 간절한 생각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검암산에 태조 건원릉이 자리 한지 600년이 낼 모레인데, 60년의 반도 못되는 기간에 동구릉의 들머리에서 왕숙천에 이르는 주변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이 검암산 동구릉의 들머리에 굳이 아파트와 농수산물시장과 콘크리트의 건물들이 들어서야 했는지... 비록 우리가 좁은 국토에 비싼 땅값으로 인해 너도 나도 각박해져 있다 해도 600년 된 조상의 문화유산을, 우리가 후손으로부터 잠시 빌려 쓰고 온전히 물려주어 이어가야 할 이곳을, 그도 모자라 오른쪽 날개 죽지를 파서 세워진 골프연습장의 철골구조물이 흉물스럽게 동구릉의 안마당을 내려다보고 있다. 부디 저 솔들이 동구릉의 낙락장송으로 푸르고 울창하게 번성하여 함께 누리고(활용, 活用), 가꾸며(보존, 保存) 이어가야 할(전승, 傳承)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언제나 사랑받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 최근에 “개경사 옛 터”를 찾아내었다. 태종 016 08/07/29(을해) / 태조 산릉의 재궁명을 개경사라 하여 조계종에 소속시키다 산릉(山陵)의 재궁(齋宮)에 개경사(開慶寺)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조계종(曹溪宗)에 붙이어 노비(奴婢) 1백 50구(口)와 전지(田地) 3백 결(結)을 정속(定屬)시켰다. 연경사(衍慶寺)의 원속(元屬) 노비(奴婢)가 80구(口)인데 이번에 20구를 더 정속(定屬)시켰다.
임금이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불씨(佛氏)의 그른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랴마는, 이것을 하는 것은 부왕(父王)의 대사(大事)를 당하여 시비(是非)를 따질 겨를이 없다. 내 생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제정하여 후손에게 전하겠다.” 하였다. |
태종 017 09/05/21(임진) / 건원릉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려 했으나 물이 불어 다만 법회만을 보다 |
개경사(開慶寺)에 법회(法會)를 베풀었다. 이날 임금이 건원릉(健元陵)에 나아가서 제사를 행하고, 또 법회를 보려고 하였으니, 소상(小祥)이 가까왔기 때문이다. 어가(御駕)가 흥인문(興仁門) 밖에 이르니, 후자(候者)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그런데, 나는 아직도 송계원이 어디쯤인지 궁금하다. |
- 문화재청 동구릉지구관리소장 오효석
문화재청의 왕릉관련 사이트에 근사한 사진들이 새로 업데이트 되었기에 추려내어 찍어두었던 제 사진들과 함께 섞어 파이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파이 맨 아래 <슬라이드쇼>를 클릭하시면 좀 더 큰 사진으로 보실 수 있는 것 아시죠? 이리저리 보기좋은 것 골라 클릭해보세요. - - - Gijuzzang Dream
|
- 'Lave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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