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찾아 떠나고(답사)

안성 칠장사와 임꺽정

Gijuzzang Dream 2008. 5. 24. 22:59

 

 

 

 안성 칠장사의 임꺽정

 

임꺽정(林巨正)은 어린 시절 유독 말썽을 부리던 천둥벌거숭이였다.

근심이 그칠 날이 없던 부모는 아들의 이름을 아예 걱정이라고 불렀다.

‘걱’은 한자로 표기할 경우 ‘클 거(巨)’의 밑에 받침 ‘ㄱ’을 붙인다.

畓(논 답), 乭(이름 돌)과 같이 중국에선 쓰이지 않는 우리나라 고유의 한자다.

꺽은 걱의 경음화. 과연 의적이었는지 임꺽정의 선악 여부는 여전히 논란이다.

여하튼 여염집 장독이나 깨던 걱정은 왕권을 위협하는 걱정으로 성장했다.

 

민초들의 영웅이 된 의적 그를 감복케 만든 부처님 

 

양주의 백정 출신이었던 그는 수하들과 함께 황해도와 경기도, 강원도를 누비며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눠줬다.

활동기간은 1559년부터 62년까지 3년간.

당시 발생한 민란 가운데 가장 컸고 오래 지속됐다.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에 따르면,

단순히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일으켰던 폭동이 남도 먹여 살리기 위한 혁명으로 변모한 계기는 병해(昞海)대사 덕분이다. 가죽신을 기워 팔던 갖바치였던 스님은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칠장사 나한전에 봉안된 나한상

 

칠장사에 생불(生佛)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병해대사를 찾아간 임꺽정은 그 자리에서 감화돼

일생 동안 스승으로 모셨다.

 

그의 정체성이 도적에서 의적으로 전환되는 분기점이다.

갖바치와 백정, 피를 보고 살육에 관여해야 하는 직업이다.

사대부들은 이들을 천민으로 멸시하면서 고기를 먹고 화혜(靴鞋)를 신었다.

 

계급적 동질성과 스님의 덕화로 인해 사제관계는 깊어졌고,

가렴주구의 체제에서도 칠장사 아래엔 굶는 사람이 없었다.

임꺽정은 힘만 센 게 아니라 리더십도 탁월했다.

그의 무리에는 상인, 장인, 아전 등 중인과 천민을 망라한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두루 포함됐다.

 

황해도 구월산에서 임꺽정을 체포한 의주목사 이수철이 고문 끝에 받아낸 자백서에 따르면

중앙이나 지방에서 임꺽정을 도운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임꺽정이 무력적 위엄과 더불어 학문적 소양도 갖추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길막봉을 구하기 위해 안성에 왔던 임꺽정과 6명의 심복은

병해대사와 상봉하려 칠장사에 들렀다.

그러나 스님은 달포 전에 세상을 뜬 뒤였다.

 

7인의 사내들은 스님의 영전 앞에서

각자의 팔뚝을 긋고 피를 내 형제의 의를 맺었다.

그리곤 스님이 스스로 조성하려 했던 미완의 목불을 완성하고

스승을 기렸다. 칠장사 ‘꺽정불’이다.

꺽정불은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는 일반적인 아미타여래불상의 형태다.

다만 몸집이 좀더 큰 듯 보여 임꺽정을 모델로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임꺽정이 스승 병해대사를 위해 조성했다는 ‘꺽정불’

 

아미타불 혹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은

서방정토를 주재하는 교주로 이승의 중생을 죽음의 고통에서 건지고자 오는 분이다.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이란 수인은 중생의 근기에 맞게 설법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사람들의 제각각인 성품과 처지를 뜻하는 근기(根器).

장물을 뒤져 배고픈 자에겐 밥을 헐벗은 이에겐 옷을 꺼내주는 임꺽정이

민중에겐 부처님이자 미륵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는 장사의 위세에,

열 살배기 허수아비 임금 명종이 겪었을 공포감과 열등감은 이해할 만하다. 

경기 강원 함경 평안 등 4개 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여야 한다는 훈척들의 강경진압론을 군말 없이 따랐다.

토포사 남치근은 역당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구금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임꺽정을 참수한 뒤에도 그의 아들, 손자, 서너 살 된 어린아이들까지 붙잡아 남김없이 죽였다.

명종은 남치근에게 토지 50결과 노비 100명을 주어 포상했다.

임꺽정을 능가하는 도둑의 맹활약에 힘입어 황해도 전역이 초토화됐다.
30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부진했던 건 당연지사다.
제 손으로 원인을 제공했으면서도 국가는 종묘사직을 구하는 데 힘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후 벼슬길에서 황해도 출신을 차별했다.
 

죽산(竹山)에는 지명과 달리 대나무가 흔치 않다.

칠장사 대웅전 위쪽으로 흐드러진 대숲이 이 곳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대나무라고 한다.

택시기사에게서 전해들은 죽산의 명칭과 관련된 내력은 흥미로웠다.

원래 죽산현이었다가 죽일면 죽이면 죽삼면 등 3개면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어감이 영 마뜩치 않았다.  

‘도대체 면장을 몇 명이나 죽여야 성이 풀리겠느냐’는 해학적인 논쟁 끝에 글자를 뒤바꿨다.

일죽면과 삼죽면, 그리고 이죽면은 본명을 살려 죽산면으로 개칭했다.

그는 봉업사지를 중심으로 죽산리 관음당의 장명사지, 미륵당의 매산리사지, 묘골의 사지를 예로 들며

안성 전체가 거대한 사찰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칠장사는 유난히 도둑과 인연이 깊다.

임꺽정이 나라를 훔치는 데 실패한 도적이었다면

후고구려(태봉)를 건국한 궁예는 나라의 절반은 훔친 도적쯤 되겠다.

궁예는 열살 때까지 여기서 활을 배웠다.

경부선이 들어앉은 20세기부터 역사의 외곽으로 밀렸지만

죽산은 장호원 음성 문경새재 문경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도를 가려면 여기를 통해야 했다.

돈이 오가는 길목에서 고을은 번성했고 빈부의 양극화도 활발했을 것이다.

마을에서 한 건 한 뒤 한달음으로 달리면 반나절 만에 닿을 법한 거리에 칠장사가 있다.

잠깐 숨을 은신처로는 제격인 셈이다.

 

나한전에 봉안된 7인의 아라한 역시 본래 산적이었다.

사찰을 중수한 혜소(慧炤) 국사의 교화로 도를 깨쳤다.

스님은 고려 제9대 임금 덕종의 왕사(王師)였다.

어느 날 이들의 산채 인근인 칠장사에 스님이 부임했다.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을 염려한 도둑들은 스님의 동정을 살필 요량으로

한 사람씩 뽑아 칠장사로 올려 보냈다. 절에 당도한 첩자들에게 염탐은 뒷전이었다.

약수터에 놓인 금바가지에 혹해 물을 마시는 척하고는 바가지를 훔쳐 돌아왔다.

이상한 것은 빼돌린 바가지를 아지트에 갖다놓기만 하면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도둑 중 한 사람이 이 일을 고백하니 나머지 여섯도 괴이한 현상에 관해 실토했다.

스님이 신통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여긴 패거리는 그 날로 머리를 깎고 국사의 제자가 됐다.

 

스님이 입적하자 이들도 사람의 형상을 한 7개의 돌만 남기고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는 후문이다.

칠장사(七長寺)와 칠현산(七賢山)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어사 박문수가 나한전에서 기도를 올리고 장원급제를 했다는 성공담이 전국에 퍼져

지금도 입시철이면 성시를 이룬다. 숫자 ‘7’의 유사성에서 병해대사는 혜소국사의 화현으로,

칠장사를 찾은 임꺽정 일행은 나한들의 후신으로도 읽힌다.

 

하얀 석고덩어리에 눈 코 입을 대충 그려 넣은 7기의 나한상은 소박하고 인간적이다.

나쁘게 말하면 조악하고 어설픈 편이다.

보살과 야차도 바라보는 방향과 속셈에 따라 모양과 평가가 달라질 따름이라는 생각.

 

나한들 주변엔 참배객들이 진상한 과자봉지와 동전뭉치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다.

500년전 민중이 임꺽정에게 원했던 것들이다. 신앙의 비루한 이면이자 중생의 가여운 진실이다.

1674년 유력한 양반이 제 가문의 장지(葬地)로 쓰기 위해 멀쩡한 칠장사를 불태워 없애버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지독한 멸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칠장사는 여보란 듯이 잘 살고 있다.

 

칠장사의 재건은 세세생생 민중이 가장 원하던 신성은 부처님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역사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반드시 재생된다.

사람다운 삶을 향한 인간의 희망이 얼마나 길고 질긴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위인이 되고 싶어 한다. 모두가 꿈꾸기에 거의 모두가 실패하는 욕망이지만.

- 안성=장영섭 기자 [불교신문 2405호] 3월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