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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개심사 |
심검당 고운 마루엔 깨달음의 볕 내려 있거늘… 언제나 담백 순수한 풍광 마음도 ‘휴식’ |
여행을 떠난다. 짐을 꾸리고 아차 면도기를 넣어야 할까, 고작 이삼일 여정인데 수염이 얼마나 더 자라겠는가, 그리하여 서둘러 나서지만, 지하주차장에서 나올 때 햇빛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떠나기에는 너무 화창한 것이다. 그럼에도 떠난다. 여행이 현대의 숙명일 수는 없지만, 최종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봄에 또 떠나는 것이다.
기형도는 시 여행자에서 거친 숨을 몰아쉰다. 시 속에서 시인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하지만 탄식이 절로 나온다.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하고 갈망한다.
어쨌든 또 떠나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 봄에,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어설프게 다가온 봄이 무르익기도 전에, 초여름의 기상을 제공하는 대기 속으로 어떻게 떠날 수 있을까. 봄이라서 누군가 또 꽃을 얘기하겠지만, 피었다가 그만 져버린 꽃들의 내음도 없고, 다만 서산의 개심사 쪽으로 가면 그곳은 아직 벚꽃이 살아 있다.
엄지손가락만한 청벚나무 꽃 일품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인하여 개심사는, 그 책에 소개된 강진의 다산초당과 더불어 지금의 30, 40대에게 가장 소슬하고 깊이 있는 목적지가 되어 있을 텐데, 아마도 그것은 이 세대가 어린 시절 불국사며 설악산 같은 창대한 문화에 대해 너무 ‘교과서적’인 가르침을 받아서, 그 정서적 대안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유허지가 되는 다산초당은 1980년대의 어떤 기억과 슬며시 겹쳐지고 서해안의 낮은 절들, 그러니까 변산의 개암사와 내소사, 서산의 개심사는 어떤 인위도 가하지 않은 듯한 서정으로 인하여 사랑받았던 것이다.
봄의 작열하는 햇빛을 피하고 싶은 여정이라면 개심사가 각별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산천의 벚꽃이 다 지고 난 다음에도 개심사의 청벚나무에는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꽃잎이 피어 있다.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자제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 그러나 김현이나 황동규 같은 ‘문지 사람들’과 교유하며 무엇보다 정갈한 언어를 다듬어온 시인 마종기는 시(詩) '개심사'에서 이렇게 썼다.
“세상에서 제일 크고 넓은 색깔이 양지와 음지로 나뉘어 절을 보듬고 무거운 지붕 짊어진 허리 휜 기둥들 비틀리고 찢어진 늙은 나무기둥들이 몸을 언제나 단단하게 지니라고 하네”
서울 쪽에서 개심사를 간다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평택항을 스쳐 지난 후 장장 7310m의 서해대교를 건너는데, 이 무렵부터 서서히 공기 냄새도 달라지고 땅의 질감도 달라지고 시야도 훤히 트이면서 은은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아산 당진 홍성 예산 그리고 서산을 아울러 내포 지방이라 부르는데 그 따스한 지명들이 봄날의 여정을 위로해준다.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아산의 공세리 성당이나 추사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예산, 그리고 서산 간척지의 갑작스럽고도 황망한 아름다움과 시간을 잠시 멈춰버리는 해미읍성의 넓은 품은 내포 지방의 온기가 어떠한지를 쉽게 느끼게 해준다. 이 지역의 산은 저 영월이나 인제만큼 압도적이지 않다. 이 지역의 바닷바람은 저 울진이나 포항처럼 강렬하지 않다.
그 핵심에 개심사가 있다. 마종기 시인이 쓴 것처럼, 이 산사는 ‘비틀리고 찢어진 늙은 나무기둥’으로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일상의 빠듯한 시간을 일부러 쪼개어 고속도로를 달려 개심사까지 달려왔다고 하면, 마종기 시인처럼 누구라도 한순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시인 문태준도 그러하였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서 한국 시단의 가장 왕성한 현역으로, 빈틈없이 조직되었다기보다는 조금 헐겁게 풀어놓은 듯한 시어들 사이로 온갖 회한과 성찰이 드나드는 시들을 길어낸 문태준 역시 이곳을 마냥 거절할 수는 없었다. 詩 '빈집'의 약속 1연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우리의 삶이 저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또 어떤 때는 개심사 심검당의 나무들이 차분하게 들어앉기도 하는데, 그래서 시인은 2연에서 쓴다.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가장 행복하였다. 고 시인은 그 빈집으로 술회한다.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두 시인의 마음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이 시인들도 절간에 와서 눈 한번 감았다 뜨고는 대오견성한 것처럼 아무렇게나 시를 빚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마음이 문제이고 그 문제가 마음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마음 바깥의 방법으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법이다.
그저 카메라로 찍고 뚝딱 갔다 왔다면 ‘다시 한 번’
중견 소설가 김형경이 단편 민둥산에서의 하룻밤으로 그려낸 개심사를 향한 여정 역시 마찬가지다.
한 남자가 운전을 한다. 그 곁에 전처가 앉아 있다. 소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번갈아 교차하는 것으로 진행한다. 마흔이 된 여자는 암에 걸렸다. 옛 남편은 개심사에 함께 가자는 부탁을 사양하지 못하고 나선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오늘의 대도시 삶을 살아가는 결혼한 사람들 누구라도 겪었을 사소한 이야기의 미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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