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최후의 성리학자 - 한주 이진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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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리세가(主理世家)- 성주(星州) 이씨의 집성촌으로 ‘한개’라고 부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민속관광 마을이다. 한자로는 대포리(大浦里)인데, ‘큰 개’ 대신 ‘한개’라고 부르며 세상에 이름이 크게 알려진 마을이다. 그곳에 ‘주리세가’라고 현판을 걸고, 한주(寒洲) · 대계(大溪) · 삼주(三洲)라는 세 개의 편액을 현판으로 붙인 한주의 종택이야말로 말 그대로의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었다. 일본과 싸우는 독립정신을 키워 만주 벌판에서 투쟁한 대계의 혼이 자랐으며 대계의 제자이자 탁월한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의 혼이 무르익었던 곳이다.
한주의 종택인 ‘주리세가’는 역사가 깊고 인물의 보고인 집이다. 한주의 증조부 이민검(李敏儉)이 영조 43년인 1767년에 건립하였고, 고종 3년 1866년에 증손자 한주 이진상이 새로 고쳐짓고 지금에 이르도록 그대로 보존되어오는 유서 깊은 종가다. 조부 이형진(李亨鎭)은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라는 이름 높은 학자의 제자로 성균생원으로 학자의 이름이 컸으며, 그분이 낳은 두 아들로 진사(進士)에 오른 한고 이원호(寒皐 李源祜)와 대학자에 공조판서에 오른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형제가 바로 그 집에서 태어났다. 한고는 바로 이진상의 아버지이고 응와는 숙부였다.
이진상의 아들 대계 이승희는 아버지에 버금가는 성리학자요,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다. 망국을 당하자 만주벌판으로 망명하여 공교회(孔敎會)를 설립하여 유학사상을 통한 독립투쟁으로 항일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했고, 그 문하에서 심산 김창숙의 독립정신이 배태되었다. 57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해배되었던 해다. 기호지방의 대표적 성리학자 화서 이항로가 27세의 나이로 학문이 무르익고, 호남의 대학자 노사 기정진이 21세의 청년으로 독특한 사상체계인 유리척사(唯理斥邪)의 새로운 논리를 구상하고 있던 때였다. 바로 그 해에 영남을 대표하는 최후의 큰 성리학자 이진상이 유서 깊은 종택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도 승승장구로 올라 공조판서에 이른 대감이었지만, 당대의 대학자로 성리학 이론으로도 높은 수준에 이른 한주의 숙부 이원조는 영특한 조카 한주를 그냥 두지 않고 스승이 되어 본격적으로 가르쳐주었다. 집에 돌아와 집안 서재의 이름으로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는 현판을 걸었다. 운곡노인(雲谷老人)이라던 주자(朱子)를 조술(祖述)하고 도산(陶山)에 살았던 퇴계를 법받겠다는 자신의 각오를 천명한 내용이었다. 약하여 ‘운도재(雲陶齋)’라 호칭하였으니 그의 사상과 철학의 뿌리는 주자와 퇴계에 있음을 그냥 알게 해준다. 마치 화서 이항로나 노사 기정진도 특별한 사승 없이 독자적으로 학문을 개척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젊은 시절에는 숙부 응와공에게서 배우고, 장복추(張福樞) · 이정상(李鼎相) · 허훈(許薰) 등과 강론(講論)하였고, 35세 때에야 당시의 이름 높은 영남의 학자 정재 유치명을 찾아뵙고, 40세에는 안동으로 서산 김흥락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40전후에는 이미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는 이채로운 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44세에 완성한 그의 독특한 성리학설인 ‘심즉리설’은 당시 영남학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퇴계의 학설과 완전하게 합치되지 않는다는 이유였으나 그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연구와 사색을 거듭하여 독창적인 학설을 끊임없이 발표하였다. 한주는 그의 노년인 51세에야 거유이던 성재 허전(性齋 許傳)을 찾아가 예(禮)를 논하였고, 회갑해인 61세에 그의 대저인 22권의 ‘이학종요(理學綜要)’라는 주저를 저술하였고, 67세에는 다시 손질하여 완성본으로 확정하였고,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송나라의 여러 어진 학자들에 의하여 그것에 대한 학설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한주는 성(性)이 아닌 심(心)이 곧 이(理)라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여, 주자나 퇴계의 본뜻이 그런 내용이었다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의 성리학은 본디 퇴계의 ‘이기호발(理氣互發)’설과 율곡의 ‘기발이리승일도(氣發而理乘一途)’설이 큰 주류를 이루면서 발전해왔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자 영남일대에서는 퇴계의 ‘호발설’을 적극 옹호하면서 율곡의 ‘기발설’은 극력 배척했었다. 이런 사상계의 분위기에서 한주 이진상은 ‘이발일로(理發一路)’설을 주장하여 한편으로는 퇴계의 ‘호발설’에도 동의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율곡의 ‘기발설’에도 동조하지 않아 사상계에 파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퇴계학문을 절대시하던 영남의 학자들이 크게 분노하고 한주문집을 불태우는 사단이 일어나고 말았다. 수십년 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으나, 한주의 본뜻은 퇴계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결론으로 퇴계후손들의 양해 아래 그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최근에는 간행하지 못한 많은 저작까지 함께 합하여 ‘한주전집’ 85책이 새롭게 간행되어 조선 6대 성리학자이자 조선 후기 3대 성리학자인 한주의 학문 전체가 학자들에게 공람될 수 있게 되었다. 나라가 망하던 망국의 세월에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성리학의 높은 이론을 몸으로 실천했던 학자였다. 순조 때의 대학자 대산 김매순은 당색이 다르면서도 다산 정약용과 많은 학문적 교유를 했었고 아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동양의 유학사를 거론하면서 성리학의 본래 입장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대목이 있다. 바로 ‘약정복성(約情復性)’이라는 네 글자로 압축하고 있는 구절이다. 성리학의 본디 목표가 통제하기 어려운 인간의 정(情)을 제약하고 본디 타고난 착하고 선한 성품을 제대로 회복하는 것이 성리학의 요체라는 뜻이었다. 본래의 목적에서는 멀어지고 당동벌이(黨同伐異)의 당쟁무기로 둔갑하여 자신들과 다른 당파에 공격의 역할이나 하고 있던 것이 한말의 사상계 동향이었다. 이러던 시절에 화서(이항로) · 노사(기정진) · 한주(이진상)의 세 성리학자는 자신들의 주리(主理) 이론을 ‘이존기비(理尊氣卑)’ ‘유리척사(唯理斥邪)’ ‘이발일로(理發一路)’와 ‘심즉리’로 압축하여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망국에 즈음하여 뜨거운 민족혼으로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의 불꽃을 피우게 하는 몸으로 실천한 성리학자들이 되었다. 한주의 아들 이승희와 그의 제자 심산 김창숙으로 이어지는 의리와 독립의 성리철학은 마지막 조선의 혼을 지켜주는 대들보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한주의 성리학과 사상을 계승한 한계(韓溪) · 강재(剛齋) · 대계라는 호로 불리던 이승희는 독립지사이자 큰 학자였다. 뒷날 망국의 시절에 북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풍찬노숙의 고난을 겪다가 끝내 고향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망명지 낯선 타국에서 70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인 1908년에 만리타향인 소련 영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자 망명객인 의암 유린석(당시 67세)과 한주 이진상의 아들 대계 이승희(당시 62세)의 해후가 이루어졌다. 나라의 독립을 찾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독립투쟁에 앞장선 당대의 성리학자들이 만난 것이다. 의암의 기록에 이승희와 만나 ‘심즉리설’을 토론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들이 어찌 ‘심즉리’의 성리학설만 토론했겠는가.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민족과 나라를 독립시키자는 원대한 포부와 뜻도 함께 토론했음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리라. 의병을 일으키려고 동지들을 규합하다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다. 실천적 성리학자 이진상은 조국의 안위를 잊은 적이 없었기에 그런 혼이 아들과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우국의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이승희와 함께 한주 문하의 큰 학자인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도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뒷날 장석영은 스승 한주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그의 높은 학문과 덕행을 유감없이 기술하여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후산 허유(后山 許愈), 물천 김진호(勿川 金鎭祜),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 대계 이승희, 홍와 이두훈(弘窩 李斗勳), 자동 이정모(紫東 李正模), 면우 곽종석 등 당대의 학자들이 학단을 이루어 한주의 학문을 계승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몇몇 제자들은 망국의 의리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사람도 있었으나 아들 이승희나 제자 장석영 등은 스승의 학문과 사상의 실천에 앞장 서서 북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한주학파와는 다르게 호남에 기반을 둔 노사학파는 그 제자들이 호남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남 우도인 경남지역에도 많은 학자들이 노사문하를 출입했다. 월고 조성가(趙性家), 계남 최숙민(溪南 崔淑民), 노백헌 정재규(老栢軒 鄭載圭:1843~1911) 등이 대표적인 영남의 노사학파이다. 그중에서도 노백헌 정재규가 노사문하의 고족(高足)인데, 그는 한주의 제자 후산 허유와 가까운 벗으로 일생 동안 학문논쟁과 토론을 그치지 않아 노사학문과 한주학문이 결합되는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 이룩되었다. 많은 학문적 토론을 거듭했다. 주리설(主理說)에서 유리론(唯理論)을 주장한 노사의 학문과 이발일로설(理發一路說)의 한주 사상에는 일맥상통하는 점을 서로 인정하여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이후 몇 백 년 만에 영남과 호남의 학문적 교류와 학자들의 접촉이 성대하게 이루어졌던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호남에서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이나 노사의 제자 일신재 정의림(日新齋 鄭義林)이 찾아오고, 한주학파의 대계 이승희가 찾아오면서 영남학과 호남학이 격의 없이 토론하는 아름다운 학문 활동이 전개되었으니 얼마나 부러운 일이고 보기 좋은 일인가. 허유나 이승희 이외에 한주의 제자인 자동 이정모(李正模) 등과도 함께 도의를 강마하고 성리설을 논했던 점은 주리학파의 시대적 요구에 응한 아름답고 훌륭한 지역 타파의 본보기였기에 두고 두고 찬양해야 할 멋진 일임에 분명하다. 이 점은 오늘의 이 나라 지역갈등의 해결을 위한 문제로 여겨 심도 있는 학술적 연구가 계속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더구나 한주가 직접 노사의 학설을 읽고 그에 대한 해석을 했던 점으로 보아 이들의 학문적 견해와 사상이 어떻게 일치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밝히는 점도 한번쯤 연구의 대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한주학설을 계승하고 부연하여 179권의 방대한 문집을 남긴 면우는 학문적 명성에 의하여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이라는 고관에 올랐다. 을사늑약이 이룩되자 조약을 폐지하고 5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한 적도 있으나 경술(1910)년 망국의 무렵에는 몸을 사려 주변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기미독립운동 무렵에는 마침 제자 김창숙 등과 함께 파리장서사건을 일으켜 투옥되는 등 만절(晩節)을 지켜 한주의 제자임을 잊지 않았다. 곽종석에게 내리지 않는 학자로서의 성망을 얻었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재야 학자였으나 임금의 은혜로 산림(山林)의 대접으로 감역(監役), 장령(掌令),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라는 높은 지위를 받았으나, 나라의 일에는 재야학자가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서해의 섬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지냈다. 그때가 어떤 때인가. 나라는 전복되고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는 도탄에 빠지고 온 나라가 요동치던 때여서 어리석은 여자로서도 안방에서 눈물을 금하기 어려운 때였다. 그 때에 사류(士類)로서 도만 지키고 살면 된다고 일체의 나랏일에 관여 안했던 사람이 간재 전우였다. 대계 이승희, 심산 김창숙 등은 그런 점에서 간재학파의 색은행괴(索隱行怪)의 행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실천적 행위에 힘쓰지 않는 공리공언(空理空言)의 관념적 성리학이라고 비판했었다. 이 점은 현상윤(玄相允)의 ‘유학사’(儒學史)에서도 자세히 논했으니 참고할 일이다. 한창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해에 당대 문장가이자 학자이던 교리(校理) 이건창(1852~1898)이 한주를 찾아 한개마을을 방문했다. 한주의 높은 성망을 듣고 방문한 영재 이건창은 학문적 토론을 쉬지 않았다. 영재가 한주에게 학문하는 대도(大道)를 물었다. 한주의 답변이 바로 그의 실천철학이자 몸으로 실천하는 성리학의 논리였다. “학문을 연구함에는 반드시 실심(實心)을 지녀야 합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물(事物)에는 모두 실리(實理)가 있는데, 실심을 지닌 뒤에야 실견(實見)이 있게 되고 실견이 있는 뒤에야 실행(實行)을 하게 됩니다. 실(實)이란 정성(誠)일 뿐입니다” (爲學必須實心 天下事事物物 皆有實理 有實心而後有實見 有實見而後有實行 實者誠而已) 라는 명답을 해주었다고 <한주연보(寒洲年譜)>에 기록되어 있다. 공소한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실행, 실천, 실견의 행실과 행위가 없는 성리철학은 관념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행동이 없는 어떤 논리도 실익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주 학문의 요체였다. 이런 학문의 실체 때문에 실천과 실행에서 벗어난 간재학파의 논리는 한주학파로부터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형국이어서 인물의 보고임을 그냥 짐작할 수 있었다. 민속관광마을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마을 입구에는 큰 간판이 마을의 내력을 설명해주고 크고 넓은 와가들이 즐비해 있어, 이름 있는 마을임을 보아서도 알게 해준다. 판서댁, 진사댁, 한주댁 등의 입간판이 있어서 문화재로 지정된 주택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초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에 우리가 찾은 한주종택에는 다음 날이 종택의 시제(時祭)를 지내는 날이어서 주부 한 분이 열심히 제수를 장만하느라 바쁜 이유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 몸체 곁에 세가(世家)라는 이름에 걸맞게 3대(한주 · 대계 · 삼주)의 호를 판각한 현판이 걸린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를 지나 별채로 한주정사(寒洲精舍)라는 정자가 오래된 나무에 가려 고즈넉이 서 있었다. 이곳 사랑과 정자에 얼마나 많은 한주학단의 문제자들이 출입했을까. 당대의 학자 영재 이건창이나 노백헌 정재규도 출입했다. 심성철학이 논해지고 이기사칠(理氣四七)의 높은 학문이 논해졌으리라. 또 이 종가를 중심으로 일제하 가장 큰 유림단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사건도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모의되고 실천되었다. 망국을 당해 독립운동이나 의병활동에 동참하지 않는 나약한 성리학자들을 질타하던 대계 이승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주자(朱子)를 조술(祖述)하고 퇴계를 본받자던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의 현판이 뚜렷하여 주자와 퇴계의 혼까지 이 종택의 주변을 맴도는가 여겨졌다. 독창적이고 실천적인 성리학 체계를 새롭게 세워, 기호의 이항로, 호남의 기정진과 함께 영남을 대표했던 당대의 철학자 한주 이진상의 혼도 이 종택에 맴돌고 있겠지만, 그는 지금 한개마을에서 멀지 않은 뒷산에 다소곳이 누워계신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묘소다. 1886년 10월15일 대학자 한주선생은 눈을 감았고 그 다음해인 1887년 2월20일 2000여 명의 사림(士林) 등이 애도하는 가운데 장례가 치러졌다. 1895년 25책의 문집이 간행되었고 22편 10책의 ‘이학종요’라는 한주의 주저는 그 2년 뒤인 1897년에야 간행되었다. 아들 이승희가 지은 묘표(墓表)가 묘소 앞의 빗돌에 새겨져 전해지고 있다. 문인 곽종석이 지은 행장과 묘지명은 모두 문집에 수록되어 그의 일생을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묘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5세에 모든 경전을 꿰뚫어 이해하였고, 18세에 중부(仲父) 이원조공으로부터 인심과 도심, 정일(精一)의 뜻을 강론받자 그로부터 뭇 성인들의 학설을 널리 구하고 주리(主理)의 뜻을 얻어내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였다” (十五淹貫經籍 十八講人道精一之旨于仲父定憲公 因慨然博求群聖之說 得主理之訣 篤信而實踐之)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있음을 한개의 양반 마을은 보여주고 있었다. 화서 · 노사 · 한주의 제자들인 유린석 · 정재규 · 이승희의 만남에서 한말의 성리학이 이 마을에서 만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 경향,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25, 26
- 2008년 01월 04일/ 2008년 0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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