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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조선 최초의 수도 - 신도안(新都內)

Gijuzzang Dream 2008. 3. 14. 18:04

 

 

 

신도안, 조선 최초의 수도

 

 

 (1) ‘신도(新都)’와 계룡시

 

 

신도안 명당 기운이 여전히 음덕을 가져오는가.

계룡산 동학사로 접어드는 박정자 삼거리를 지나 학봉 삼거리에서 계룡시 방향으로

숨 가쁜 고갯길을 넘어 조금 내려가다 보면 몇 그루의 오래된 괴목을 만날 수 있다.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잠깐 쉴 수 있는 정자가 있다하여 ‘괴목정’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가장 오래돼 보임직한 괴목 아래 안내 표지석에 수령 오백년이 되었다 소개하고 있으니

정말로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절로 든다.

 

이야기인 즉, ‘조선 개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조 이성계가 이곳 신도안에 도읍을 정한 후

다시 개성으로 올라 갈 때, 자신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신도안 북쪽 초입에 해당하는

지금 이 자리에 꽂은 것이 살아남아 괴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러나 전설 수준의 이야기라 하여 태조 이성계가 직접 이곳을 답사 했었다거나

이곳이 한 때 조선의 도읍으로 정해졌었다는 부분이 함께 흥미 수준에서 넘어갈 일은 아니다.

 

개국 이듬해인 1393년 1월 중순에서 2월 중순까지의 『태조실록』 기록에는

신도안 도읍지도의 헌상, 태조와 신하들이 직접 이곳을 답사하고 여러 입지 조건을 살폈던 일 등

신도안이 조선의 국도로 정해지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계룡시 괴목정. 신도안 천도와 관련 태조 이성계가 던진 지팡이가

괴목으로 자랐다는 전설이 있다.

 

괴목정, 태조 이성계가 꽂은 지팡이가 괴목으로 자라다 

 

또 조선 전기 인문지리서라고 할 수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 25, 1530년)에도

“우리 태조가 처음 즉위했을 때, 계룡산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친히 와서 순시하고

길지를 택하여 대략 그 자리를 정하고는 역사를 시작하였다가 … …

지금까지도 그 곳을 ‘신도(新都)’라 부르고 있으며 개울과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충청도」 <연산현> 편)” 라고 하여 이곳에 도읍이 정해짐으로써

그 이름도 ‘신도(新都, 신도안)’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현재 신도안이라는 명칭은 공식 지명이 아니다.

계룡산 천황봉을 기대어 자리 잡은 이곳은

신군부정권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된 1983년 6·20 사업으로 삼군본부인 계룡대가 들어선 이후

(1989년 육·공군본부, 1993년 해군본부 이전)

2003년 9월 계룡시로 승격되어 현재는 계룡시로 불리고 있다.

 

신도안과 관련해 필자가 흥미를 갖는 부분 중의 하나는 무장 출신이었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이곳에 최초로 조선의 국도를 정했던 일과

군사쿠테타로 80년대 정권을 잡은 신군부정권이 자신들의 핵심 배경이었던 군부의 실질적 중심,

삼군본부(계룡대)를 이곳으로 옮겼다는 점이다.

 

또한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후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정감록(鄭鑑錄)’ 신앙에도

이씨의 조선을 멸하고 새롭게 등장할 정씨 정권의 도읍으로

바로 이곳 계룡산의 신도안 지역이 등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계룡산 신도안 지역은 군사쿠테타나 혁명을 통해 등장한 무장 출신의 정권들이

나름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관심가진 의미 있는 장소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이성계와 신군부 정권이 함께 관심, 우연의 일치인가

그렇다면 태조 이성계는 왜 신도안을 조선 최초의 국도로 정했을까?

여기서 조선 최초의 국도는 한양이지 어떻게 신도안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한양은 개국 후 최초의 천도 후보지로 언급이 되었을 뿐

실제 국도로 정해진 것은 신도안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태조가 신도안을 국도로 정한 이유,

즉 신도안이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국도가 되어야만 했던 이유를 짐작케 한다.

 

태조는 개국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전 왕조의 국도인 개경(개성)을 떠나

새로운 국도로 옮기는 작업을 시도한다.

바로 그 후보지는 고려 중기부터 경영되어 온 남경 즉, 현재 서울의 전신인 한양이었다.

그러나 태조의 한양 천도계획은 무산되고 이후 천도 논의는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필자가 태조의 한양천도계획을 순진하다고 보는 이유는

국도 이전과 같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에서 태조를 위시한 개국 세력이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전 왕조의 기득권 세력이나 반대세력의 현실적 힘을 무시하고 지나칠 정도로 성급하게

천도를 중심 안건으로 등장시켰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연히 한 왕조나 국가의 수도가 갖는 실질적, 상징적 중심의 의미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

조선 첫 천도 후보지는 한양, 기득권 세력 반대로 좌절

일정 소강상태를 거쳐 거의 반년이 지나서야 새롭게 천도 논의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 계기는 이듬해 정월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에 의해 올려지는 한 장의 지도 때문이다.

 

『태조실록』에서는 이 지도를 ‘계룡산 도읍지도(都邑地圖)’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지도에 담겨져 있는 지역이 바로 계룡산 아래 신도안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가 헌상되던 태조 당시에는 그 명칭이 도읍지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던 것이 『태조실록』이 1차 편찬되는 태종대에는 이미 지도의 신도안 지역이

도읍이 되었던 역사적 사실로 인해 ‘계룡산 도읍지도’라고 기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태실 증고사 권중화가 돌아와서 상언하기를,

“전라도 진동현(珍同縣, 현재의 금산군 추부면)에서 길지를 살펴 찾았습니다.” 하면서,

이에 산수 형세도를 바치고, 겸하여 양광도(楊廣道, 충청도) 계룡산의 도읍 지도를 바쳤다.

(『태조실록』 2년 1월 무신조) -

그런데 어떻게 태실 후보지 찾는 것을 주 소임으로 했던 태실증고사가

태실지도만이 아닌 국도 후보지가 될 수도 있는 지도를 헌상할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태조에 의해 제기된 한양천도계획도 무산되고

여전히 개경이 국도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천도 논의를 등장시킬 수도 있는 국도 후보지의 지도를 헌상한다는 것이

태조를 중심으로 하는 천도세력의 배경이 없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 부분은 신도안의 풍수적 상황을 들여다봄으로써 조금 더 현실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왜 태실지도만이 아닌 국도 후보지 지도 헌상했을까

   

 임진강 너머 멀리 개경(현 개성)의 송악산이 보인다.

   
 

풍수에서는 인간의 사용 목적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물들(묏자리, 주택, 관청 등)이나

장소(촌락, 도시, 국도 등)의 입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산수(山水)로 대변되는 여러 환경적 조건을 살피게 된다.

그럴 때 특히 산이 주된 입지조건을 구성하는 경우를 ‘장풍국(藏風局)’이라 하고,

물이 주될 경우를 ‘득수국(得水局)’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태조가 처음 천도하고자 했던 한양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과 함께 대표적인 득수국에 속한다.

그에 반해 신도안은 주산인 천황봉(845m)을 중심으로

좌우로 연계된 500-600m급의 고산지로 둘러싸인 대표적인 장풍국으로

고려의 국도였던 개경이 송악산(588m)을 중심으로

좌우에 170-200m 급의 낮은 산지에 둘러싸여 있는 것에 대비된다.

 

결국 신도안은 득수국인 한양 천도를 무산시킬 정도로 국가 최고의 명당으로 이해되던 개경에 견주어

오히려 개경을 능가하는 장풍국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도안은 풍수상 장풍국인 개경을 국가 최고의 명당으로 하여

도읍으로 유지하고자 했던 세력 즉, 득수국인 한양으로의 천도를 반대했던 세력에 대한

‘준비된 결과물’이 아니었나 한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반대 세력의 입장을 약화시키거나 무마시키는 효과적인 대응 중의 하나가

상대가 강조하는 조건이나 내용을 오히려 한발 앞서 맞추는 방법일 것이다. 

개경을 능가할 풍수조건 갖춘 신도안 카드로 반대 잠재워 

말하자면 득수국인 한양에 대해

장풍국인 개경이 조선의 국도로 계속 유지될 만큼 최고의 명당이라고 했으니,

풍수상 그러한 개경의 입지조건에 대해 비교가 되거나 심지어 능가할 만큼의 조건을 가진 장소를

제시한다면 충분히 개경 이외의 장소로 국도를 옮기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태조를 위시한 조선의 개국세력은 개경을 능가하는 장풍국의 조건을 갖춘 신도안을 통해

적어도 이제는 개경을 그대로 국도로 유지해야 한다는 천도 반대세력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실제 신도안이 개경을 능가하는 국가 최고의 명당인지 아닌지는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천도세력은 ‘풍수적 옷 입히기’를 통해 천도 작업의 1차적 단계인 개경으로부터의 천도,

즉 어느 곳으로 천도를 하든 일단은 전 왕조의 국도인 ‘개경으로부터는 떠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의도를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도안은 당시 공유되고 있던 풍수를 코드로 하여 천도세력이 계획한 ‘장소 담론의 구성’,

이른바 ‘담론의 정치’, ‘장소의 정치’의 대상이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도안은 천도세력이 계획한 풍수 옷입히기 ‘장소의 정치’ 대상

   

 1983년 6.20사업으로

신도안에 자리잡은 계룡대 표석.

   
 

그렇다면 80년 신군부정권의 계룡대 이전사업도

이와 같은 장소의 정치, 담론의 정치로

구분될 수 있을까? 그렇게 보기에는 그 사업의 추진이

너무도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지역 주민이나 천황봉 좌우 물길인

암용추와 숫용추에 자리 잡고 있던 100개 이상의

신흥종교 집단도 영문을 모른 채 깨끗하게

�겨 났어야 했으니 말이다.

 

또한 정권 핵심 인물들의 풍수와 관련된

개인 행태를 보면 선조 묘역의 이전이나 확장,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의 마련 등

오히려 풍수 본질적인 지기의 음덕을 중히 여긴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두규의 ‘권력과 풍수’ 참조)

 

혹시 그들은 정감록 신앙의 정씨 계룡산 도읍설을 자신들에 적용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말하자면 한 때 국가 최고의 명당이기도 했고, 정감록상 800년 도읍할 땅이라 했던 신도안에

자신들의 핵심 배경이 되었던 군부의 실질적 중심을 자리 잡음으로써

그러한 풍수적 음덕을 기대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물론 남북 간의 군사적 대치상황에서 국방을 위한 실질적 목적이 가장 중요했겠지만 말이다.

 

그들이 뿌리가 된 특정 정치집단이 그 겉옷을 바꿔 입으며 현재까지 힘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정말로 신도안의 명당 기운이 음덕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2007년 08월 16일 [권선정의 풍수 스케치] 권선정 webmaster@dtnews24.com

  권선정 : 서울대학교 및 동대학원,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지리학 전공(교육학박사). 현재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저서로 '풍수 그 삶의 지리, 생명의 지리'(공동), '대덕의 풍수', '풍수로 금산을 읽는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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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도안은 한양과의 경합에서 밀렸을까

“날씨보다 더 문화적인 것도 없고, 기후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인 것도 없다.”

이 말은 날씨나 기후와 같이 인간의 간섭이 불가능한,

인간의 역량으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자연현상조차

문화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물며 인간 행위와 관련된 인위적 현상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가령 화창한 봄 날 난데없는 먹구름이 들이닥쳐 갑자기 소낙비가 내린다고 가정해 보자.

비가 내린다는 것은 그저 자연현상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소낙비는 농부들에게는 생명수로,

우산장수에게는 밀린 재고품을 처리할 수 있는 최고의 마케팅 조건으로,

그러나 화사한 봄나들이 차림의 도시인들이나 여행객들에게는 심지어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소낙비라는 동일한 자연현상에 대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인간에 의해 생명수, 마케팅 조건, 원망 등의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의미는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다.


같은 소낙비도 상대 따라 제각기 의미 달라

그런데 의미하면 흔히 물질적인 것에 상대되는 정신적인 것,

실재를 떠난 관념적인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

쉽게 말해 현상과 관련된 의미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앞서의 사례처럼 소낙비라는 자연현상에 대해 부여되는 다양한 의미들이

단지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것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는가?

농부나 우산 장사에게 그것은 자신들의 생계가 달려 있는 중요한 조건인 것이고,

심지어 기우제를 통해 비 내리기만을 기다리던 권력자에게

그것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는 의미 있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의미를 염두에 두면서 ‘인간에 의한 명당’,

즉 인간에 의해 명당이 만들어 진다는 말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실제 주어진 환경을 바꿔주거나 개선하는 인위적 간섭을 통해

명당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른바 풍수 비보(裨補)나 압승(壓勝)이 그것인데,

이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환경 조건을 보완하는 인간의 적극적 대응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비보, 압승 : 인위적 간섭을 통해 명당 만들어

자연적으로 주어진 환경을 인위적으로 보완한 비보와

압승의 한 예. 충남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마을 숲.

가령 마을 입구나 하천 제방에

조성하거나 작은 둔덕, 산을 쌓아

지나치게 개방된 마을 공간을

갈무리해주거나 홍수의 유입을 방지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조선시대 편찬된 지리지,

그 중에서도 군현단위

(현재의 군이나 면단위 정도) 규모의

지역 실정을 상세히 기록한 읍지들에는

이런 사례들이 자주 등장한다.

다음으로

동일한 환경 조건을 갖춘 공간에 대해,

또는 비보나 압승의 방법을 통해

의미를 구성함으로써

명당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여기서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은 일정 형태적 조건을 갖춘 공간에 대해

생산자 입장에서 명당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거나,

경험자 입장에서 명당이라고 ‘의미를 읽어내’는 행위를 말한다.
 
역사상 조선 초 수도입지 선정과정에서 등장했던

신도안(新都, 현재 충청남도 계룡시)과 한양(서울)의 사례를 보자.

흔히 알고 있듯 한양이 처음부터 조선의 수도로 정해졌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한양이 국도로 정해지기 이전에

계룡산 아래 신도안 지역이 이미 수도로 정해졌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있는 것이다.

당시 한 왕조의 국도는 그 영토 내에서 최고의 명당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그런 최고의 명당이 될 만한 환경적 조건을 갖춘 곳이 국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양 처음부터 조선왕조 수도 아니었다

그럴 때 신도안이 한양에 앞서(어찌 보면 한양과의 경쟁에서) 국도로 정해졌었다는 사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도안이 아닌 한양이 조선의 국도가 되어

600년 이상의 역사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최고의 명당으로서 국도가 되었던 신도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태조 이성계부터 관료, 풍수전문가(지리학인, 풍수학인)들까지 동원된 국도 선정과정을 통해

결정된 신도안은 1년여에 걸친 궁궐 공사 이후 결국 국도로서 충분치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후 신도안과의 경합과정에서 후순위에 밀려 있었던 한양이 조선의 국도로 선정되는 것이다.

이런 물음을 던져 본다.

단지 1년여 만에 신도안의 풍수적 자연환경 조건이 변하면 얼마나 변했다고

갑자기 조선 최고의 명당이었던 신도안이 포기되었을까?
그리고 신도안이나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개성)보다 후순위에 밀려 있던 한양,

오히려 국도가 될 만큼의 명당이 아니라고 평가되었던 한양이 어째서 조선의 국도가 되었을까?


명당, 사회적 관계와 이해에 따라 달라져

바로 명당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게 하는 부분이다.

적어도 인간살이와 관련된 생물학적 차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환경 조건을 갖춘

명당이라면 모를까. 복잡한 사회적 관계에 묶여 있는 인간들에 의해 구성되는

명당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가 ‘인간에 의한 명당’이란 표현을 통해 풍수를 접근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명당 의미의 사회적 구성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앞서 조선 초 국도 사례는

결국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조선 왕조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정치적 의도에 의해)

여러 장소들이 조선 최고의 명당 반열에 올랐다가 바뀌고 또 바뀌고 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풍수이론 상 과연 신도안, 개성, 서울 중 어느 곳이 최고의 명당일까

궁금해 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느 순간 명당의 의미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 묶여 있는 인간들의 복잡한 이해(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권선정의 풍수 스케치]- 2006년 5월1일

 

 

 

 

 (2) 태조 태실과 계룡산 '신도(新都)’  

 

 

태실지 간택 명목 내세워 천도 후보지 찾아

 

대전광역시에서 금산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만인산 ‘태봉재’라 불리는 고갯길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이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의미 있는 장소임을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지금은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나 새로 건설된 국도 4차선을 주로 이용하다보니

태봉재가 아닌 마달령(馬達嶺)을 관통하는 터널을 지나게 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봉재는 금산, 무주로 가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지나야만 했던 주요한 통로였다.

 

그 명칭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태봉재의 태봉(胎封)은 태실(胎室)의 다른 이름으로

이곳에 태조 이성계의 어태(御胎)를 모신 태실이 자리 잡고 있어 그렇게 불렸다 한다.

 

조선 후기 편찬된 진산군(현재의 금산군 진산면, 복수면, 추부면 일대) 지리지에서도

본래 만인산이라 불리던 태봉재의 산세를 태실산(胎室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도 조선 초 태조의 어태를 모신 것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만인산(태실산)의 태실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곳이 조선 초 한양으로의 국도 이전과정에서

잠시 국도로 정해졌던 신도안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만인산의 태실은 조선 개국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된 태조의 한양 천도 작업이

실패한 이후 거의 꺼져가고 있던 천도 논의를 되살리는 중요한 불씨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의 태실. 

만인산 태실은 한양 천도작업 실패 후

천도 논의를 되살리는 불씨가 됐다.


꺼져가던 국도 이전 논의 살리는 불씨로 삼아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천도 논의가 다시금 본격화된 직접적 계기는

이듬해 정월에 헌상된 계룡산 도읍지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도안을 담고 있는 계룡산 도읍지도가 헌상되는 과정을 살펴보게 되면,

신도안의 등장은 어느 한 순간에 느닷없이 시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도 세력에 의해 사전에 준비된 계획상의 한 사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이미 고려시대 삼경(三京) 중 하나로 경영되던 한양으로의 천도도 실패한 상황에서

전혀 뜬금없이 개경(개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충청도의 한 장소가 국도후보지로 등장했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말하자면 개경을 국도로 유지하자는 입장이 강한 상황에서

새로운 국도 후보지의 등장이 겉보기에도 너무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면

그 정치적 효과는 크게 감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천도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수용할 수밖에 없게끔 

‘자연스럽게’ 천도후보지가 등장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도논의의 직접적 계기가 된 신도안의 등장과

만인산의 태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자.

 

본래 태실은 황제나 임금 그리고 왕족의 태를 모시는 석실을 말한다.

그런데 왕실에서 태실을 모시는 이유는

그것이 왕실의 적통성과 정통성을 확보하는 주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왕의 어태는 곧 선왕과 현재의 왕, 그리고 후대 왕을 연결하는 중요한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왕이나 황제가 거주하며 집무를 보는 곳을 궁궐(宮闕)이라 하고,

또 궁궐이 있는 장소를 국도(國都)라 하거나 왕이 죽어서 묻히는 장소를

일반인의 묘와 구분하여 능(陵)이라 하는 것도 이러한 상징성 때문이다.

신도안 등장은 천도세력 의도 숨긴 계획된 사건

따라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태실을 모시는 것은

곧 태조를 새 왕조의 왕으로 인정하는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말하자면 태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왕조 세력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태조 이성계의 어태를 모시는 일은 반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태실 후보지 찾는 작업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곧 태조를 왕으로 인정치 않겠다는 입장이나 마찬가지다 보니,

앞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반대하며 개경을 국도로 유지하고자 했던 세력들도

태실후보지를 찾는 작업은 당연히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태조실록』상의 태실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한양으로의 천도계획이 실패한 이후 세 달이 지나서이다.
<정당문학 권중화를 보내어 양광도(충청도) · 경상도 · 전라도에서 안태할 땅을 잡게 하였다.

(『태조실록』1년 11월 27일 갑진조)>

그런데 여기서 태실 후보지 찾는 것을 주 소임으로 하는 특별위원회의 위원장 즉,

태실증고사(胎室考證使)가 정당문학 권중화(權仲和 1322∼1408)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중화는 태종 대 영의정까지 오르는 문신으로 태조 대 천도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하게 되는데,

본래 지리과 과거를 통해 서운관에 배속된 풍수학인(風水學人)이 아니었지만

당대 고사나 지리, 복서 등의 최고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물론 태실, 특히 현재 왕의 태실이 모셔지는 자리는

궁궐이 있는 국도나 왕의 사후 거소인 능과 마찬가지로 풍수상 최고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규모는 다를지언정 말이다.

따라서 그것이 실제 국가 최고의 명당인지 아니면 최고의 명당이라고 의미가 부여된 것인지를 떠나,

어쨌든 현재 왕의 태실 자리는 최고 권력자의 어태를 모시는 만큼 최고의 명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태실은 국도나 능과 같이 풍수상 최고의 명당자리

이렇게 볼 때 태조의 태실 후보지를 찾는 책임자로 풍수전문가를 임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듬해 권중화의 태실 후보지 헌상 때 드러나는 것처럼

권중화는 태실 주변의 형세도만이 아닌 계룡산 도읍지도를 함께 헌상하고 있다.

<태실 증고사 권중화가 돌아와서 상언하기를,

“전라도 진동현(珍同縣, 현재의 금산군 진산면, 복수면, 추부면 일대)에서 길지를 살펴 찾았습니다.”

하면서, 이에 산수 형세도를 바치고, 겸하여 양광도(楊廣道, 충청도) 계룡산의 도읍 지도를 바쳤다.

(『태조실록』 2년 1월 2일 무신조)>

이는 태조가 권중화를 태실증고사로 삼은 것이 과연 태실 후보지 간택만을 주목적으로 했을까

하는 의문을 자아낸다. 다시 말해 권중화가 주 소임으로 맡았던 태실 후보지의 산세형세도 외에

다시금 개경으로부터의 천도논의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도읍후보지 지도를 헌상하고 있는 것이

천도세력의 뒷받침 없이 가능한 일이었겠나 하는 것이다.

특히 지도가 헌상된 뒤 5일 후 태실안택지로 결정되는 만인산은

지리적으로 국도후보지인 신도안의 계룡산과 같은 권역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는 도로나 철도 등 저지대의 계곡을 따라 마련된 교통로를 주로 이용하다보니

계룡산의 신도안 지역과 만인산의 태실지가 상당한 거리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전통적인 산맥체계상 이 두 지역은 같은 산줄기(금남정맥 錦南正脈)의 갈라진 자락들에 지나지 않는다.

만인산과 신도안 거리 떨어졌어도 같은 산줄기

   
금남정맥의 계룡산(신도안)과 만인산(태조 태실) 대동여지도. 전통적인 산맥쳬계상 이 두 지역은 같은 산줄기다.

다시 말해

진안의 마이산에서 분기한 금남정맥이 북진하다가

금산 서쪽의 병산에서 한 줄기는 병산 → 탄현(그림 2의 a) → 이치 → 대둔산 → 천호산 → 계룡산(A)

으로,

그리고 다른 한줄기는 병산 → 월봉산(그림 2의 b)

→ 송원치 → 만인산(B)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만인산의 태실 후보지 형세도를

올리는 과정에 같은 금남정맥 산자락인 인근의

계룡산 지역의 산천형세도를 헌상하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국도후보지라는 명목이 아닌

태실후보지 명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흔히 의사결정을 위해 안건을 상정할 때

단독으로 후보를 내는 일은 극히 드물다.

말하자면 적어도 두세 가지 대안을 올림으로써

의사결정자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상례인 것이다.

따라서 후대에 계룡산 도읍지도라고 기록하고 있는 지도도

기실은 태실 후보지 명목으로 올려진 지도였는데,

그 지도상의 신도안 지역이 결과적으로 조선 최초의 국도로 정해졌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명칭도 계룡산 도읍지도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처음부터 계룡산 주장했으면 국도 안 됐을 것

이렇게 볼 때 태실 후보지의 답사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는 천도세력에게 있어서

결국 개경으로부터의 천도 논의를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개경(장풍국의 명당)에 버금가는 국도 후보지를 제안하는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신도안, 조선 최초의 수도 ① : ‘신도(新都)’와 계룡시편 참조)

 

이는 계룡산 도읍지도가 헌상된 이후 진행되는 일련의 천도 논의과정이

일사불란하고도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따라서 만인산의 태조 태실은 태조의 한양천도계획이 실패한 이후

소강상태에 빠진 천도논의를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일차적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천도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세력 모두가

명목상으로라도 인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 아닌

정치적으로 바로 부딪힐 수 있는 과정을 통해 계룡산 신도안과 같은 천도후보지가 등장했다면,

그 결과는 초기의 한양 천도계획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태실 후보지 찾는 작업과 같은 공적인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천도후보지가 될 만한 장소를 접하게 되었을 때,

‘이미 끝난 천도논의를 다시금 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논리는

결국 천도를 무조건 반대한다는 입장 표명 외에 실질적인 설득력을 갖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정치적 의도 실현 위해서는 걸맞는 명분 필요

결국 조선을 개국하고 전 왕조의 국도인 개경으로부터 천도를 계획하는 세력은

만인산의 태실을 불씨삼아 계룡산의 신도안을 등장시키고

급기야는 개경으로부터의 천도를 기정사실화하는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를 실현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 초 천도와 관련된 일련의 과정을 보며

대선을 앞두고 성사되는 남북 정상회담을 생각해본다.

아무리 남·북 간의 미묘한 정치적, 군사적 상황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다양한 정치집단들에 의해 당연히 정략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오랜 시간동안 어렵게 인내심을 가지고 회담을 준비해 온 준비 측에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럴 때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예상되는 다양한 정치적 해석,

심지어 선거를 위한 국면전환용이라는 판단아래 회담 자체를 반대한다는 입장까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평화정착의 초석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명목상으로라도 ‘자연스럽게’ 수용되도록 하기 위해

어떤 불씨들이 필요하겠는가?

전쟁이 없는 세상과 평화는 특정 정파, 계층,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누구나의 바램 아닌가?

‘평화 담론의 구성’을 위한 구체적 과정이 필요하다.

- 권선정의 풍수스케치, 2007년 08월 30일

 

 

 (3) 계룡산 도읍불가설(都邑不可說)

 

 
계룡산 신도안에 남아있는 궁궐 주춧돌(충남 계룡시 남선면 부남리)

 

천도세력과 하륜,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을까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는 1977년부터 1996년까지 20년에 걸쳐

수도 서울의 역사를 집대성한 『서울육백년사』를 발간하였다.  

만일 조선 최초의 국도로 정해졌던 계룡산의 신도안이 도읍 역사를 통해

그대로 조선의 국도로 유지됐었다면, 이러한『서울육백년사』의 발간 작업은 둘째 치고

‘서울육백년’이라는 말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육백년사 표지(4권)

결국 현재 ‘서울육백년’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조선 개국 후 시도된 태조의 한양 천도계획이 실패한 이후,

다시금 개경으로부터의 천도 논의를 불러 일으켰던 신도안,

다름 아닌 조선 최초의 국도로 정해졌던 신도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과연 신도안에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일까?

 

신도안은 개국 이듬해인 1393년 1월 태조 이성계의 태실 찾기를

주 소임으로 했던 권중화에 의해 「계룡산 도읍지도」가 헌상된 이후

다음달 13일에 조선의 신수도로 정해져 도읍역사가 시작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궐터 자리의 주춧돌(115개)이나 신도안을 둘러싸고

있는 계룡산 줄기의 성문터(‘동문다리’, ‘서문다리’라고 불림),

신털이봉이나 괴목정과 관련된 전설 등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후 일 년 남짓 진행된 도읍역사는 같은 해 12월

당시 경기좌우도 관찰사였던 하륜(河崙, 1347~1416)의 상소에 의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일년동안 도읍역사 진행되던 신도안에 무슨 일이?

그렇다면 개경을 능가할 정도로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떠오른 신도안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개경은 다름 아닌 개국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시도된 태조의 한양천도계획까지 잠재우면서

유지됐던 풍수 최고의 명당이 아니었던가.

명목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신도안의 도읍역사가 중지된 직접적 계기는

하륜의 신도안 도읍불가 상소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하륜)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나라 호순신(胡舜臣)의 이른 바, ‘수파(水破, 물길이 나가는 방위)가 장생(長生) 방위에 들면

결국 쇠퇴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태조실록』 2년 12월 11일 임오조)

위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계룡산 신도안이 도읍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현재의 한반도와 유사한 영역을 갖게 된 조선의 영토를 생각할 때

국도로서의 신도안 입지가 중앙부가 아닌 남쪽에 지나치게 치우쳐져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풍수상 호순신(胡舜臣, 1131-1162)의 이론에 근거해 신도안의 명당수를 살펴보니,

그 나가는 물길(水破)의 방위가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편향된 입지‧물길 방위 적절치 못해 도읍 불가

소위 ‘수파장생쇠패입지(水破長生衰敗立至)’라는 것인데,
이는 명당을 형성하는 물길의 조건이

‘길한 방위에서 와서 흉한 방위로 흘러나가야 한다(吉方來凶方去)’라는 대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물은 흐름 그리고 생명이다」편 참조)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조건 중

어느 것이 더 국도로서의 신도안을 폐기시킨 결정적 이유가 되었을까?

필자는 순서상 먼저 제기된 신도안 남쪽 편향 문제보다는

오히려 신도안에 대한 풍수적 평가가 더 중요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당시 한 나라의 국도는 현재와 달리

단순히 정치, 경제, 행정의 최고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는 수위도시(首位都市)라고만 할 수 없는,

어찌 보면 곧 왕조와 동일시되는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전란이나 쿠테타에 의해 도읍이 함락된다는 것은

곧 왕조가 멸하는 것을 의미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 실질적, 상징적 중요성을 갖는 도읍 입지에 대해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의 군사전략적 상황을 모르고 섣불리 국도로 정했을 리는 만무하다고 본다.

그는 20살 무렵부터 무장으로서 수 십 년간 전국을 누비며 전장을 경험했던 군사전문가가 아닌가.

 

따라서 하륜의 상소 내용 중 주목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풍수였다고 할 수 있다.

『태조실록』에서도 하륜의 상소를 접한 뒤

신도안의 풍수적 평가의 근거가 된 호순신의 풍수이론을 검증하는 작업이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 후 호순신의 풍수이론이 검증을 통과함으로써

결국 그에 근거해 명당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계룡산 신도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신도안 도읍 전설이 남아있는 계룡시 괴목정.


풍수론에 의해 조선 최고 명당에서 역사 뒤안길로

"임금이 명하여 글을 바치게 하고 판문하부사 권중화 · 판삼사사 정도전 · 판중추원사 남재 등으로

하여금 하륜과 더불어 참고하게 하고, 또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山陵)의 길흉을

다시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에 봉상시(奉常寺)의 제산릉 형지안(諸山陵形止案)의 산수가

오고 간 것으로써 상고해 보니 길흉이 모두 맞았으므로, 이에 심효생에게 명하여 새 도읍의 역사를

그만두게 하니, 중앙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태조실록』 2년 12월 11일 임오조)

이 부분에서 필자는 한 가지 의문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어떻게 한 나라의 국도로 정해져 도읍역사까지 진행되던 장소가

상소 한 번에 의해 포기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 최초의 국도로 정해졌던 신도안은 한양을 능가하는 개경보다도 오히려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평가됐던 곳이었다. 그랬던 장소가 국도로 유지되지 못했다는 것은

채 일 년도 안 되는 사이 땅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하륜에 의해 ‘새로이’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호순신의 풍수 이론이

땅의 성격을 판단하는 더 적절하고도 확실한 이론이었기에 그럴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호순신의 풍수이론은 이미 조선 개국보다 훨씬 전인(200년 전) 12세기에 등장한 이론이다.

시간상으로만 보자면 바로 일 년 전 신도안이 도읍으로 결정될 당시 얼마든지

호순신의 풍수이론이 신도안에 대한 풍수적 평가를 위해 거론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호순신은 조선의 이념적 토대가 된 성리학의 대가이자 풍수에 박식했던

주희(朱子, 1130-1200)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럴 때 200년이 지난 조선 개국 초 호순신의 풍수이론이

성리학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식자층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상소 한 번으로 땅의 성격이 바뀐 것은 의도된 결과(?)

결국 신도안에 대한 풍수적 평가를 위해 호순신의 풍수이론이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의도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계획된 과정이 아니었나 한다.

 

필자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혹시 태조를 중심으로 하는 천도세력과 신도안 도읍불가를 상소한 하륜 간에

어떤 커다란 거래가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당시 젊은 관료였던 하륜이 정세분석에 뛰어난 감각을 발휘하여

태조의 천도계획 전반을 꿰뚫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개경도 아니고, 신도안도 아닌 ‘제 3의 장소’로의 천도계획 말이다.

 

이런 추측은 신도안 국도 결정 이후 보여지는 태조의 신도안에 대한 관심이나 도읍역사의 진척 사항,

그리고 하륜의 상소 이후 진행되는 호순신 풍수이론의 검증 과정 등을 볼 때

충분히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계룡산 도읍지도가 헌상될 당시 태조의 신도안 행차과정은

당장에라도 개경을 떠나 신도안에 옮길 것처럼 급박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도안이 결정됨으로써 개경으로부터의 천도가 기정사실화된 이후

태조의 신도안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소홀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심지어 도읍역사에 참여한 백성들이나 공장(工匠)을 돌려보내고

11월 들어서서는 오히려 노는 중들을 도읍역사에 투입하는 일까지 하게 된다.

"새 도읍을 건설하는 백성들을 놓아 보냈다."(『태조실록』 2년 3월 8일 계축조)
"새 도읍을 건설하는 공장(工匠)을 놓아 보내었다".(『태조실록』 2년 4월 1일 을해조)
“중들 중에 노는 사람이 많으니 마땅히 모아서 역사(役事)시켜야 되겠다.” 하니,

각 종파의 중이 이 말을 듣고는 중들을 권유 모집하여 역사에 나가고자 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 되었다."(『태조실록』 2년 11월 19일 경신조)

신도안을 통해 개경으로부터의 천도 기정사실화

또한 호순신의 풍수이론을 검증하는 과정을 보면

그 사례 대상이 다름 아닌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들이다.

당연히 결과는 풍수상 고려의 산릉들이 문제가 있다고 하는,

다시 말해 호순신의 풍수이론이 틀리지 않다는 풍수적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일 호순신의 풍수이론상 고려 왕실의 산릉들에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면,

당장 쇠한 기운의 고려를 대신한 조선의 등장이나

하륜의 풍수적 해석에 의한 신도안 도읍불가가 어찌 가능했겠는가.

 

이것은 결국 태조에게 있어서 신도안이 더 이상 도읍으로 유지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태조는 신도안이라는 장소를 통해 ‘개경으로부터의 천도 의지’를 기정사실화하는 것 외에

어떤 또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렇듯 조선 최초의 국도로 정해졌었던 신도안에서 일 년 남짓 시간동안 벌어졌던 일들은

몇 해 전 위헌 판결로 결정난 신행정수도 이전 계획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는 것 같다.

참여정부의 신행정수도 이전 계획의 결정과 이듬해 위헌 판결까지 걸린 시간도

채 일 년이 안 되니 말이다.

단지 신행정수도 이전의 주도권을 누가 잡았는지,

또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써 수도 이전이라는 국가적 대사업을 통해

관련자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가 다를 뿐 아니었나 한다.

- 권선정의 풍수스케치, 2007년 09월 13일


 

 

 (4) 한양, 조선 최고의 명당이 되다  

 

도성도(동국여도 19세기)         

 

 

 

 

신행정수도를 둘러싼 논란 조선 개국 초와 닮은 꼴

조선 개국 이듬해인 1393년 12월 신도안에 대한 하륜의 도읍 불가 상소가 받아들여짐으로써

조선의 국도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륜이 신도안의 대안처로 제시한 현재의 신촌 일대 ‘모악(母岳, 무악)’마저도

국도로 적절치 않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 사이 국도 후보지로 거론되었거나

정해졌던 장소만 하더라도 한두 군데가 아닌데,

처음 거론된 한양(현 4대문 안)에서부터 개경, 신도안, 모악 등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국도가 될 만한 장소들은 거의 등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장소 중 어느 한 곳도 국도로 정해질 정도의 풍수적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최초의 국도로 정해졌었던 신도안이 폐기되고

하륜이 제시한 모악 마저 국도로 정해지지 못한 상황에서

여러 신하들이 심지어 황해도나 강원도 등지에서

국도 후보지를 찾는 웃지못할 해프닝까지 만들게 된다.

서운관원이 와서 도읍될 만한 곳을 아뢰었다.

“불일사(佛日寺)가 제일이고 선고개[鐥岾]가 다음은 됩니다.”(『태조실록』 3년 7월 2일 기해조)

도평의사사에서 선고개에 가 천도할 땅을 보니, 그곳이 좋지 못했다.

이에 우복야 남은은 이양달을 꾸짖었다.

“너희들이 지리의 술법을 안다는 것으로써 여러 번 맞지 않은 곳을 도읍할 만하다고 하여

상총을 번거롭게 하니, 마땅히 호되게 징계하여 뒷날을 경계해야겠다.”

(『태조실록』 3년 7월 4일 신축조)


기존 후보지 폐기, 황해도 강원도에서까지 후보지 찾아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수 있었겠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국 직후 옮기려 했던 한양도 개경만 못하다하여 포기되었고,

그런 개경조차 뛰어넘는 막강한 풍수적 길지로 등장한 신도안마저 공사가 진행되다 폐기되었으며,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모악에서부터 기타 후보지들도

국도로 적절치 못하다는 결론이 난 상황에서

과연 어떤 길을 제시하고 선택할 수 있었겠는지 말이다.

 

이미 최초의 국도로 정해졌었던 신도안의 등장으로 인해

한양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던 개경조차 더 이상 국도로 유지될 장소는 못된다는,

즉 개경으로부터의 천도가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개경이 아닌

어디로든 반드시 국도는 옮겨져야 한다.

말하자면 풍수상 ‘한양도 안 되고 개경도 안 되며

신도안도 안 되는’ 상황에서 개경이 아닌 다른 장소로 반드시 천도는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쉽게 떠 올릴 수 있는 방안은 크게 두 가지 일 것이다.

우선 지금까지 살핀 후보지를 뛰어넘는 이상적인 장소를 찾는 방법이 하나일 테고,

아니면 기존에 언급된 장소 중에 어떤 식으로든 한 곳을 다시 정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전자의 방법은 더 이상 나올 후보지조차 없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기존에 거론된 장소 중에서 새로이 선택하는 방법뿐인데,

이것 또한 문제가 적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한 나라의 국도는 곧 그 나라 전체 땅 중 최고의 명당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풍수상 한양도 안되고 개경도 안되며 신도안도 안돼 

당시는 국도를 포함한 도시나 마을, 주택, 서원, 사찰, 묏자리 등의 입지를 결정할 때,

풍수를 하나의 공통된 약속(인식체계)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풍수를 인간의 공간적 행위와 관련된 하나의 코드(code),

즉 공통의 약속체계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제시했었다.(「풍수는 코드다」편 참조)

 

마치 현재의 입장에서 공간적 의사결정을 할 때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작동시키는 공통의 약속체계처럼 말이다.

현재는 흔한 것이 인간과 관련된 땅이나 편한 쉼터가 되어야 할 집,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심지어 조상의 묏자리나 납골당까지 ‘부동산(不動産)’이라 하여

주로 경제적 관심의 대상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한양, 개경, 신도안 등의 국도 후보지들이(신도안 이후 등장하는 땅들은 둘째 치고)

도읍으로 정해지지 못했거나 폐기되고 하는 것은

이들 장소가 풍수상 조선 최고의 명당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든 명목적으로든 말이다.

 

그럴 때 이미 거론된 장소 중 하나를 국도로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풍수적 의미를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그리고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

1394년(태조 3) 8월 한양이 국도로 최종 결정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를 반증해준다.

이는 한양이 조선 최고의 명당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미 조선 개국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시도된

태조의 한양 천도계획이 포기되고 말았던 사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한양은 전 왕조의 국도였던 개경보다도 풍수상 떨어지는 땅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개경을 능가한다 하여 조선 최초의 국도로 정해졌던 계룡산의 신도안까지 있었다.


천도는 기정사실, 풍수적 의미 입혀 명당으로 만들다

여기서 잠깐 아주 간단한 수학적 추리를 시도해 보자.

어려운 수학적 계산을 할 필요도 없이, 간단히 등호(=)나 부등호(<, >)를 통한

크고 작음을 구별하는 수준에서 한양, 개경, 신도안의 풍수적 등급을 따져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옴을 알 수 있다.

 

 

한양 결정 전후 시기『태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성립될 수 있는 명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A. 개국 직후 조선 최초의 천도후보지였던 한양보다는

    전 왕조의 국도인 개경이 낫다하여 개경으로 국도를 유지했었다.
B. 그러던 것이 개국 이듬해 신도안이 등장하고 곧 조선 최초의 국도로 정해져

    일 년 남짓 도읍역사가 진행되다 폐기되었다.
C. 신도안 도읍 결정은 같은 장풍국(藏風局)의 명당으로 신도안이 개경을 능가함을 의미하며,

    이후 개경으로부터의 천도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우선 개경과 한양간은 ‘개경>한양’ 으로,

그리고 신도안과 개경간은 ‘신도안>개경’ 의 부등호 관계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럴 때 이 세 장소를 함께 관계 짓는다면 ‘신도안>개경>한양’ 이 된다.

 

 

다시 말해 그 사이 국도로 유지되었거나 거론되었다가 포기된 신도안, 개경, 한양을 놓고 볼 때

신도안이 제일의 명당이고 그 다음이 개경, 그리고 한양이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3등이었던 한양이 다시 조선 최고의 명당이 되어 국도로 정해진 것이다.

즉, 3등이었던 한양이 포기된 지 만 2년 만에 다시 1등의 명당으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그 사이 한양의 산수조건이 지진이나 대규모 지형 변화 작용에 의해

이전과 엄청나게 다를 정도로 바뀐 것도 아니다.

결국 한양의 물리적 입지조건은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한양을 최고의 명당으로 만들어 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한양에 대한 풍수적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쉽게 말해 하나의 코드(약속체계)로 풍수를 공유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풍수와 관련된 ‘말 바꾸기’, ‘입장 바꾸기’를 통해 한양을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잠깐 실록을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국회의사당                                               헌법재판소

 

 

장소 변함없는데 말 뒤집기는 과거만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이어져야 할 관심이 이러한 ‘바꾸기’, ‘뒤집기’의 과정을 통해

왜 한양을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경과 신도안 이후 새로운 국도 대안처가 없는 상황에서

태조 이성계(또는 천도세력)의 궁극적 의도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살핀 결과가 아닌가 싶다.

 

즉, 태조는 이미 개국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한양 천도를 명했었다.

비록 그것이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 세력과 한양 천도를 시도한 신흥 세력 간의

현실적인 힘 관계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는 태조가 원했던 천도 대상지가 결국 어디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럴 때, 이제 개국 초와는 달리 개경으로부터의 천도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태조가 처음 제기했었던 한양을 다시 주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한다.

 

따라서 제 3위의 명당이었던 한양을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만들어 국도로 정하기 위해서는

한양의 주어진 산수 조건보다는

기존에 표현되었던 말이나 입장을 바꾸는 작업이 실제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 바꾸기, 입장 바꾸기를 통해

자신들이 판단하고 결정했던 것을 언제 그랬냐는 듯 뒤집어 버리거나 포기하는 모습이

비단 조선 초 국도문제와 같은 과거 어느 사건에서만 확인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시간상으로 볼 때

조선 초 국도 이전 상황과 거의 유사하게 전개된 몇 해 전

신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사람들이 떠오른다.

 

특별법이란 지위까지 부여되었던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의 제정,

폐기와 관련된 여러 과정들, 사람들이 분명하게 있지 않은가?

 

신행정수도 이전 계획의 폐기 이후 등장한 행복도시(행정복합도시)란 이름의 뭉게구름이

그나마 얼마 남아있지 않은 기억조차 삼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권선정의 풍수스케치, 2007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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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sennyaya pesnya (가을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