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이름으로 남겨진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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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목걸이(경주 노서리 215) |
노서리 215번지 금제경식세부
금귀걸이
노는 고리와 샛장식
중심고리
그저 처음 본 느낌의 첫 마디는 신음같은 옅은 감탄사와 함께
천 개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되었다.
손가락 두 개 정도 굵기의 둥근 고리 아래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황금나뭇잎들이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은 시선이 되어 나를,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눈을 돌려 보니 똑같은 황금나뭇잎이 매달린 둥근 고리들과 비취빛의 곱은옥이
고혹한 자태를 뽐내는 여인네의 가슴에 드리워져 있듯 가지런이 놓여 있다.
오늘도 나는 새 집, 용산박물관으로 이사 가기 위한 점검작업으로 신라실에서 유물과 씨름하고 있다.
일일이 사진을 찍고 수량과 상태를 점검한다.
헌데 유독 같은 출토지의 귀걸이 한 쌍과 목걸이가 나를 괴롭힌다.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에서 출토된 귀걸이와 목걸이가 두 개의 이름,
즉 두 개의 유물번호로 나뉘어져 있다.
난 그저 연유를 찾지 못한 채 작업을 마무리했고 어느새 이들은 새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시간은 활을 떠난 화살처럼 빨리도 지나가 버렸다.
어느덧 개관을 하고 간간이 숨어 피는 매화가 겨울을 넘길 즈음
평생을 박물관이라는 곳과 함께 하셨던 선생님의 『박물관 창고지기』 출판기념회를 다녀왔다.
수줍은 여인네의 소맷자락에 감추어진 웃음이 보일 듯 말 듯한 겉표지를 지나 안을 들여다보니
예전에 바쁘다고 지나쳐 버렸던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었다.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은 호우총(140호분)의 서남쪽에 위치한 고분으로
1933년 한 농부가 호박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갈다가 곡옥 1점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당시에는 우리 힘으로 조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터라
일본 조선총독부 사무국의 총독부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던 아리미츠 선생에 의해 조사되었다.
그리고 보고서를 작성해야 된다는 명목으로
노서리 215번지 고분에서 출토된 귀걸이 한 쌍 중 한 점과
목걸이 77점(여기에서 77점이라는 것은 목걸이 1련에 대한 각 개체수를 의미) 중 44점과
곡옥 1점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은 귀걸이 한 점과 목걸이 33점은 총독부박물관 시절의 등록번호로 등록되어졌다.
1966년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한일간의 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문화재가 반환되었다.
이 때 노서리 215번지 고분에서 출토된 귀걸이와 목걸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3년에 발굴되어 일본으로 반출된 지 33년 만에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광복 후 입수된 박물관의 수장품으로 등록되었고
결국 하나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지만 이 같은 연유로 인해 두 개의 등록번호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가혹하고도 찬란한 시절을 보냈던 이들이 가지게 된 건 두 개의 이름일지 몰라도
그들이 머무는 시선의 끝은 땅 위에 남아있는 자잘한 것들이 아니다.
이들은 새 중앙박물관에 신라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진열장에서
겹겹이 쌓인 당신과의 시선을 맞추기 위해,
당신과의 자유로운 유희를 즐기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김현희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학예연구사)
- 박물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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