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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윤 - 고사탁족도

Gijuzzang Dream 2008. 2. 23. 02:21

 

 

 

 

<이경윤-고사탁족도> 뜻 높은 선비, 발 씻은 후 속세를 벗다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이경윤, 16세기 말,
비단에 수묵담채, 27.8×19.1㎝, 국립중앙박물관

 

이경윤(1545~1611)은 조선 중기 화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왕족출신의 사대부 화가로
특히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畵)를 잘 그렸다.
그 중의 〈고사탁족도〉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선비와
그 옆에 술병을 받쳐 들고 서 있는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꽃향기 가득하고 산들바람 불어오는 한적한 맑은 시냇가 그늘 아래서
도포자락을 풀어헤쳐 불룩한 배와 가슴을 내보이며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다리를 꼰 채 발을 물에 담그고 있는 선비는 곧 술도 한잔 할 것 같아 무척이나 한가로워 보인다.

‘발을 씻는 놀이’라는 뜻의 ‘탁족지유(濯足之遊)’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즐기던 여름 풍속이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시원한 물에 발을 씻는다.’는 탁족행위는
조선시대의 세시풍속을 기록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유월조(六月條)에
“삼청동 남북 계곡에서 발 씻기 놀이를 한다.(三淸洞... 南北溪澗 爲濯足之遊)” 는 기록이 있듯
사대부들과 일반인들 모두가 즐겼던 여름 피서법이었다.
하지만 선비들에게는 탁족놀이가 단순히 피서나 더러워진 발을 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선비들의 이상과 군자의 덕목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등이 담겨져 있다.
창랑의 물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 흐리면 발을 씻는다

‘탁족’의 의미는 옛 중국의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이 지은 《초사(楚辭)》〈어부사(漁父辭)〉의 내용과 관련이 깊다.
어부와 굴원사이의 문답을 서술한 마지막 부분에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노를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사라지니
다시 더불어 말을 하지 못했다.” 라는 구절이 있다.
 
어부가 왕에게 옳은 소리를 하다 벼슬자리에서 쫓겨나서 방랑하는 굴원을 향해 이〈창랑가(滄浪歌)〉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 뜻은 인간의 세계는 좋건 그르건 그때그때의 세속을 따라야 하며,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는 것이 처세를 잘하는 것인데,
굴원처럼 초나라의 부패에 항거하여 청렴과 정의를 주장하다가는 도리어 몰락한다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내용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굴원은 결국 자기가 옳고 세상이 틀리다고 하며
죽어서 이 세상의 모범이 되고 간언하겠다는 결의를 노래로 지어 남기고는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혼탁한 세상에서 정의를 세우고자 한다

여기에서 창랑의 물이 맑다는 것은 정의가 지배하는 세상을 말하고,
창랑의 물이 흐리다는 것은 정의가 무너진 어지러운 세상을 비유하기도 한다.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는 것은 ‘세상의 정치의 도가 올바른 때면 나아가 벼슬을 한다.’는 뜻이고,
‘발을 씻는다.’는 것은 ‘부패와 비리에 찌든 속세를 백안시하고 권세에 미련없이 떠나서 은둔자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불의와는 타협할 수 없다며 왕에게 아첨하지 않아 결국
현실정치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던 공자는
“불의를 보고도 행동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시대 선비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공자의 의로운 선비,
즉 군자의 덕목은 선비들의 시문에 자주 인용되고,
또 〈고사탁족도〉와 같은 그림에 등장하게 된다.
이렇듯 ‘탁족지유’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있어 단순한 풍류가 아니라
마음속으로 성현들이 해석한 ‘탁족’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그림 속의 한가로워 보이는 선비를 통해
우리는 ‘탁족’이 인격수양이나 처신, 또는 은둔과 초월의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사회적 리더인 지식인으로의 현실과 이상과의 갈등 또한 짐작할 수 있다.
- 2007.04.04 조선 [명화로 보는 논술]
-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 경희대 강사
 

 

 

 

 

 이경윤, '고사탁족도'의 술병


 

삶의 쉼표 탁족…

술은 이상세계로 이끄는 묘약일세

 
 
시대가 변함에 따라 원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껍질만 남은 말들이 있다.
여름철이면 자주 언급되는 '탁족'도 그 중의 하나.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일반인에게 파고든 말이기도 하다. 탁족이란 흐는 물에 발을 씻는 행위를 일컫는다.
건강에 좋다는 정보 때문에 여름철이면 시원한 계곡에서 탁족을 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 탁족은 의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건강상식이다.
발은 온도에 민감해서 찬물에 담그기만 해도 시원해진다.
또 흐는 물이 발의 경혈을 자극해서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현대인에게 탁족은 이처럼 신체 건강과 직결된 말이다.
하지만 선조들에게 탁족은 정신 건강과 관련된 행동이다.
이경윤, 조영석, 김두,량 최북 등 문인화가와 직업화가 구분 없이 탁족을 주제로
다수의 그림을 남긴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낙파(駱坡) 이경윤(1545~1611)의 '탁족도' 한 점은
파격적인 소재로 눈길을 끈다.


너희가 '탁족'을 아느냐

한여름, 나무 그늘 아래서 선비가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린 채 다리를 꼬고 앉았다.
풀어헤친 도포자락 사이로 가슴과 배가 드러나 있다. 격식 없는 모습이다.
옆에서는 동자가 시중을 들고 있다.

탁족도의 정형화된 형식은 선비가 한 명 등장하는 '일인극'이다.
그런데 이 탁족도는 등장인물이 두 명이다.
낙파에겐 선비가 한 명만 등장하는 '고사탁족도'가 따로 있다.
뜻이 높은 선비('고사')만으로도 탁족의 의미는 충분한데,
왜 낙파는 동자까지 출연시켰을까? 아끼는 동자여서 그런 것일까?
 

전(傳) 이경윤의 '고사탁족도'

비단에 담채, 27.8×19.1㎝, 조선시대, 국립중앙미술관 소장


일단 탁족의 유래부터 살펴보자.
탁족은 중국의 고전인 '초사'와 관련된다.
'초사'의 '어부'편에 보면 늙은 어부가 부르는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을 것이다."
흔히 이를 줄여서 '탁영탁족(濯纓濯足)'이라고 한다.
이 노래는 도가 행해지는 좋은 세상일 때는 조정에 나아가 뜻을 펼치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난세일 때는 숨어산다는 뜻이다.
즉, 세상 사는데 있어서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탁족은 단순히 발을 씻는 행위가 아니다.
위와 같은 고사를 음미하며 마음의 이상세계에 깃드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술병 하나에 이렇게 깊은 뜻이

다시 문제의 인물인 동자를 보면, 손에 뭔가 들고 있다. 우아하게 생긴 술병이다.
그렇다면 동자는 술병 때문에 출연한 것이 된다.
만약 술병이 없었다면 동자가 나올 이유가 없다. 왜 하필이면 술병일까?

선비들에게 자연과 시와 술, 거문고 등은 인격을 수양하는 중요한 방편이었다.
특히 그중에서 술은 내면상태를 상승된 경지로 이끄는 매개체였다.
동양에서는 자연을 하나의 대상물로 보는 차원을 넘어 도를 구현하는 이상세계로 보았다.
그러므로 자연을 감상하는 것 자체가 내면을 충실하게 가꾸는 수양의 길이었다.

이때 술은 그곳으로 이끄는 동력이라 하겠다.
선비들은 술의 도움을 받으면 자연과 하나 되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술은 부정적인 매체가 아니라 긍정적인 매체였다.
이규보, 이병연, 박지원, 박제가 같은 문인들과 김홍도, 최북, 이정 같은 화가들이
술의 힘을 빌려 예술혼을 불태우고 자연에 마음을 주었다.

낙파의 술병도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탁족도 좋은 일인데,
거기에 술까지 곁들이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술을 통해 이상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술병으로 표현되어 있다.
게다가 선비가 머무는 곳도 물이 흐르는 자연이다.
지금 선비의 탁족 행위는 '술'과 '자연'이 함께하는, 최적의 여건 속에 진행되고 있다.


술맛 나는 탁족도의 묘미

선비들에게 피서는 더위를 식히되, 수신도 겸한 것이었다.
탁족도를 그리거나 감상하는 과정은
곧 세속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과 동화되고자 하는 인격수양의 과정이었다.

여담이지만 의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선비의 체형은 문제가 많다.
가는 다리에 불룩한 배, 바로 '올챙이형' 비만이다.
당뇨 같은 각종 성인병에 걸리기 쉬운 체형이다.
이런 선비에게 술은 독약이어서 간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사탁족도'에서 술은 독이 아니라 탈속적인 이상세계로 이끄는 묘약이다.
어쩌면 이 그림의 화룡점정도 은은하게 빛나는 술병일지 모른다.
술병은 화가의 마음이 프로그램된 '사유의 압축파일'이다.
- 정민영 (주)아트북스 대표
- 2008.08.20 ⓒ 국제신문(www.kookje.co.kr, 정민영의 그림 속 작은 탐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