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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亂 - 1627년(정묘호란) / 1636년(병자호란)

Gijuzzang Dream 2008. 1. 20. 02:58

 

  

 

 

 호란(胡亂)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던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난지 40여 년 만에

조선은 다시 걷잡을 수 없는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명의 요동주둔군이 조선에 파견되었던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만주의 여진족은 세력을 확장하여

1616년(광해군 8) 누르하치(奴爾哈齊)는 국호를 후금이라 칭하였고

1627년(인조 5)에는 1월 13일  명의 변경요지(邊境要地)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명의 원정군을 일으키고

조선에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여

조선은 1619년(광해군 11) 강홍립 등이 이끄는 1만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따라

강홍립에게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심하(深河)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하였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과의 명분을 내세워

금을 배척하고 명을 옹호(친명배금, 親明排金)하였다.

요동 등주(登州)의 명군과 연계하여 동남쪽 후금군을 괴롭히는

가도(椵島)의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다.

 

한편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즉위 전부터 중국본토 침입 때

자신들의 배후를 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미리 정복하자고 한 주전론자(主戰論者)였다.

또한 후금의 입장에서는 명과의 교전(交戰) 때문에 명과 단절된 경제교류 길이 막혀 

심한 물자부족 현상을 타개해야 했는데,

마침 이괄의 난이 실패한 후 후금으로 도망간 이괄의 잔당이

조선의 병력이 약하고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지졸이라며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후금의 태종은 침략의 뜻을 굳히고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것 등을 구실로

패륵, 아민(阿敏)  등이 중심이 되어 3만여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니 이른바 '정묘호란' 이다.

1627년(인조 5)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약 2개월간 지속되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1월 13일 의주를 돌파하고 남하하였는데
17일에야 후금군의 침입 소식을 접한 인조는

영중추부사 이원익, 판중추부사 정창연, 신흠, 좌의정 윤방, 우의정 오윤겸, 비국 당상 김류, 이귀, 이정구, 장만, 김상용, 이서, 서성, 신경진, 김신국, 구굉, 이홍주, 심기원, 최명길, 이현영, 장유, 대사헌 박동선, 대사간 이목, 승지 이여황, 김상 등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수원방어사 오윤겸의 건의로

남한산성은 이서가 관할토록 하고 이시백은 도성의 방어를 담당하게 하였다.

 

후금군이 안주 · 평양을 거쳐 1월 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조신(朝臣)들은 후금이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강화도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난한다.
한편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후금군은 평산에 머물면서 강홍립 등을 강화도에 보내어 화의를 교섭토록 하였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이정구, 호조판서 김신국, 이조판서 장유 등이 응대하였다.

 

후금과 조선의 강화 조건은

(1) 후금군은 평산을 넘지 않을 것

(2) 맹약 후 후금은 즉시 철병할 것

(3)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어서지 말 것

(4) 양국은 형제국으로 칭할 것

(5)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에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이었다.

 

화의의 성립으로 후금군은 침략 도중에 철수하였으나 정묘호란의 그 피해는 극심하였다.

이후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병선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가하면서

변경을 자주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므로

조정에서는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사상이 확산되었다.

 

또, 후금은 중국 본토인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조선과는 '군신(君臣)의 의(義)'와 무리한 세폐를 요구하였다.

조선에서는 점차 후금에 대한 선전포고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후금이 인조비 한씨의 문상을 겸해 사신을 보내오자

인조는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후금의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4월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은 왕자와 대신, 그리고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는 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당시 척화의 분위기가 고조된 조선 조정이 이를 거부하자

태종이 재차 침입을 감행하였으니 이것이 '병자호란' 이다.

 

청 태종은 1636년(인조 14) 12월 2일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 2만의 12만 대군으로

임경업이 수비하고 있는 백마산성을 피해 공략하기 시작하였는데

 

13일 적병이 이미 안주에 이르렀다는 도원수 김자점의 치계가 도착하였다.

 

14일 윤방과 김상용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의 신주, 세자비 강씨,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피란케 하고

인조는 급히 대궐을 떠나 오후에 숭례문으로 나와 강화도로 향하려고 했으나

오랑캐 장수 마부대의 군사가 이미 홍제원에 이르렀으므로

다시 도성 안으로 들어와 남대문 문루에 올랐다.

도성 안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가운데 울음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

최명길이 홍제원에 나아가 마부대에게 출병의 이유를 묻는 사이에

인조는 숭례문에서 광희문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한편,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고성(古城)으로 오랜 기간 방치되어 오다가

광해군의 후금에 대한 외교정책이 불투명해지면서

경도(京都)의 보장지지(保障之地)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광해군 15년(1623) 김류, 이귀, 심기원, 최명길, 이서, 김자점 등이

능양군(陵陽君)을 왕으로 세워 반정(仁祖反正)을 일으킨 후

이듬해(1624)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왕성이 함락되어

인조가 공주로 파천하는 등 임진왜란의 상처가 치유되기도 전에 조선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당시 인조반정을 주도한 사람들이 주로 반청(反淸) 세력이었고,

도성 인근에 있는 남한산성의 수축은

후금에 의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수 있는 적지(適地)로 거론되어 축성(築城)을 실시하게 된다.

인조 2년(1624) 7월에는 남한산성에 경청(京廳)을 설치하고

이서(李曙)를 총융사(摠戎使)로 삼아 승군(僧軍), 경도민(京都民), 군졸(軍卒)을 동원하여

2년 뒤인 인조 4년(1626) 11월 행궁(行宮), 누정(樓亭), 장대(將臺) 등의 성곽을 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년에 청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으로 들어오게 된 도체찰사 김류와 병조판서 이성구 등은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들어가기를 청하여

15일 새벽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왔으나 산길이 얼어 말이 미끄러지므로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은 동성 망월대를, 호위대장 구굉은 남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을,

수어사 이시백은 서성을 지키게 하고, 이현달, 이곽, 이직을 중군으로 삼았다.

 

성 안의 군사는 도성과 지방군사가 합해서 1만 2천여 명,

문무관이 2백여 명, 종실 등 2백여 명, 호종 관원이 이끌고 온 노복이 3백여 명이었다.

 

성 안의 창고에는 피잡곡이 1만 6천여 섬으로 만여 명의 군사들 한 달 양식이 있었다.

이것은 일찍이 수어사 이서가 갖은 애를 써서 비축한 군량미로,

산성 안에 있는 소금, 장유, 무명, 병기 등 또한 모두 이서가 비축해 놓은 것이다.

그는 1624년 1년 동안 남한산성 축성에 온 정성을 다하느라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한다.

한편, 비축한 군량미를 성 안으로 들이는 도중, 이서가 그만 병으로 물러나게되자,

광주목사 한명욱이 양식을 산성 안으로 들이는 것은 민폐라 하여

갑사창을 한강가에 지어 나머지 양식을 저장해 놓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모두 청군 적병이 차지하게 되었다.

 

16일 적병이 산성을 포위하고 18일 북문대장 원두표가 처음으로 출전하여 적병 6명을 죽였다.

 

1월 1일 청태종이 탄천에 30만군으로 진을 치고 동성의 망월봉에 올라 산성 안을 살펴보았다.

 

1월 2일 완풍부원군 이서가 군중에서 죽었다.

임금의 통곡소리가 곡성 밖에까지 들렸고 의복과 명주를 하사하여 염습하게 했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특별히 온왕묘를 세워 이서를 배향하도록 하였다.

 

5일 전라병사 김준룡이 용인 광교산에서 적장 양고리를 죽이고 승첩을 거두었으나

대부분의 구원병은 오지 않았고 일부 구원병은 패하였다.

홍서봉, 최명길, 이경직 등이 국서를 오랑캐 진영에 전하고

그동안 명과의 명분과 의리 때문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리고

청의 대국을 신하로써 섬기며 김류와 더불어 화친을 주장하였다.

 

22일 강도(江都)가 함락되자 많은 사람들이 순절하였고 봉림대군, 빈, 제신들은 포로가 되었다.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은 강화 남성의 남문루에 화약을 장치하고 올라가 그의 손자와 함께 죽었으며,

전 사헌부 장령 이시직은

청의 적병이 들어오자 송시영이 먼저 자결하니 두 개의 구덩이를 파서 '나를 묻어라'하고

그의 아들 이경에게 글을 남기고 목을 매어 죽었다. 

 

"장강의 요새를 잘못 지켜 오랑캐 군사가 나는 듯 강을 건넜다. 취한 장수가 겁을 먹고 나라를 배반한 채 욕되게 살려고 하니, 성을 지키는 일은 허사가 되고 만백성은 도륙을 당하였다. 더구나 저 남한산성마저 아침저녁으로 곧 함락될 운명인데,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는 없으니 기꺼이 자결하여 살신성인함으로써 천지간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한다. 아, 내 아들아. 조심하여 목숨을 상하지 말고 돌아가 유해를 장사 지낸 뒤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며 고향에서 숨어 살고 나오지 말라"  

 

이조참판 정온은,

"외부에는 충성을 다하는 군사가 끊겼고 조정에는 나라를 파는 간흉이 많도다.

늙은 신하 무엇을 일삼으랴. 허리에는 서릿발 같은 칼을 찼도다" 하고

한 편의 절구를 읊고 나서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신의 배를 찔러 자결하려 했고,

예조판서 김상헌은

여러 날 음식을 끊고 있다가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나만갑이 구조하여 죽지 않았다.

 

1월 26일에서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는

"형세가 이미 막다른 길까지 왔으니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고 한탄하며

출성(出城)을 결심하고 결박해 보낼 신하에 대해 논하였다.

 

1월 29일 최명길, 이영달을 파견하여 국서와 함께 척화신 윤집, 오달제를 오랑캐 진영에 보냈다.

홍익한은 평양부윤으로 평양에 있어 2월 12일 청의 군사가 물러가면서 체포, 압송하였다.

   

오랑캐 진영으로 떠날 윤집, 오달제가 인조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는데

윤집은 "이러한 때에 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만 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고,

오달제는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인조는 술을 따라 주고 눈물을 흘리며

"장차 죽을 곳으로 가면서도 오히려 나라를 걱정하는구나.

그대들이 죄 없이 죽을 곳으로 가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성에서 나간 뒤에 국가의 존망 역시 단정할 수 없다만

만일 온전하게 된다면 그대들의 늙은 어버이와 처자들을 돌보아 주겠다" 하고

"나라를 위하여 몸을 소중히 하라. 혹시라도 다행히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 기쁨이 어떠하겠는가"하였다.

 

1월 30일 인조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가 출성을 재촉하자

곤룡포 대신 남색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성을 나와

삼전도에 단(수항단)을 쌓고 앉아 있는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서 항복의 예를 행한 후

이날, 한강을 건너 창경궁으로 돌아갔다.

 

항복의 조건은,

(1) 조선은 군신의 의를 지킬 것

(2) 명나라가 준 고명책인을 바치고 수교를 끊고 그들의 연호를 버릴 것

(3)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

(4)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수만명의 군사를 기한 내에 보내고

     군사를 돌려 가도를 공격할 때 배 50척과 무기를 준비할 것

(5) 성절, 정조, 동지, 중궁천추, 태자천추 및 경조는 명나라의 구례를 따를 것

(6) 압록강을 건넌 후 도망자는 체포하여 보낼 것

(7) 성벽은 신축하거나 수리하지 말 것

(8) 올량합 사람들은 모두 쇄환할 것

(9) 일본과의 무역은 종전대로 허락하며

(10) 세폐는 기묘년부터 보낼 것.

 

2월 2일 청태종이 삼전도에서 철군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니 인조가 살곶이에 나가 전송하였다.

 

2월 8일 세자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로 떠났다.

인조는 청나라로 떠나는 모습들을 볼 수 없어 큰 길을 피해 산을 따라 환궁하는데

길에서 한 노파가 땅을 치고 울면서 

"여러 해를 두고 강화를 수리해 사민이 돌아가 의지할 곳이라더니 어떻게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검찰사 이하 나라의 중한 책임을 맡은 자들이 날마다 술 마시기를 일삼더니

마침내 온 나라 백성들 모두 오랑캐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탓이란 말인가?

내 남편과 아들 넷이 모두 오랑캐의 칼에 죽어버리고 이 몸만 남았구나!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어디에 이런 일이 다시 있을 수 있으리요" 하였다.

 

한편, 병자호란으로 잡혀갔다가 훗날 심양에서 속전을 물고 돌아온 사람들이 60만이 넘었다 한다.

 

2월 12일 홍익한은 평양 두리도에서 체포되어 압송되었는데 청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하였다.

청태종이 "네가 으뜸으로 화약을 배척하였는데 어째서 싸우지 않고 사로 잡혀왔느냐?" 하니,

"내게 있는 것은 다만 대의(大義) 뿐이다. 성패와 존망은 논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나라 신민이 한결같이 나의 뜻과 같다면 너희 나라는 벌써 망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죽더라도 나의 피를 너의 전고(戰鼓)에 바르고 넋은 하늘을 날아 고국으로 돌아가 노닌다면

이보다 상쾌한 일이 또 있겠느냐. 이 밖에는 다시 할말이 없으니 어서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이다."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 홍익한의 장자(長子) 홍수원은

적병에게 계모 허씨가 잡히게되자 자신의 몸으로 막아 적의 칼날에 죽게되었다.

아들이 죽자 허씨와 아내 이씨도 홍수원의 곁에서 자결하였는데 홍익한은 이 사실을 모른채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간 것이다.

   

양지바른 언덕에 새싹이 돋아나니

새장 속의 외로운 새 더욱 슬프구나

형의 풍속 답청 놀이 생각이나 할소냐

금성에서 들던 술잔 꿈속에 떠오르네

 

밤바람 돌을 날려 산이 진동하고

봄물에 눈이 섞여 월굴이 열리누나

기각 속에 실낱 같은 명을 이어가노니

인생 백년 오늘에 이르러 눈물이 뺨을 적시네3월 3일 심양에서 지은 시

 

홍익한은 이 날 처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윤집과 오달제 또한 대의와 절의로서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용골대가 힐문하기를, "척화를 으뜸으로 제창한 사람이 홍익한 한 사람뿐만은 아닐 것이니,

이제 사실대로 고하면 너희들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자,

"죽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으니 잘라야 할 것이면 즉시 자를 일이다. 더 이상 다른 말을 말라"

오랑캐들은 돌아가면서 두 사람의 절의에 감복하여 항상 존경하였다.

 

외로운 신하의 의리 부끄럼이 없고

임금 은혜 깊으니 죽음 또한 가벼워라

 

이승에서 한 없이 애통한 것은

동구에서 기다리실 어머니 정 버림이오.

.....................

 

남한산성 무너진 날 죽었어야 할 몸인데

포로가 되어 아직 못돌아간 신하라오

서로 오며 형 생각에 몇 번이나 눈물 뿌렸던고

동녘을 바라보니 아우 그린 형이 가련하네

 

넋은 기러기 따르고 그림자 서러워라

꿈속에서 놀다 깨니 가는 봄 서러워

우리 형님 색옷 입고 어머니께 나아가

늙으신 어머니를 무슨 말로 위로할까

 

부부온정 중하기도 한데

만난지 두 해도 못되었구려

이제 만리밖에 이별하여

백년기약 헛되었네

길이 멀어 편지 못 부치고

산이 길어 꿈조차 더디 넘네

나의 살길 알 수 없으니

뱃 속의 아이 잘 보호하소

 

‘금슬의 정은 깊은데/ 만난 지 이태도 안 됐지요/

오늘 만 리의 이별을 하였으니/ 헛되이 백 년 기약을 하였구려/

땅이 넓어 글 부치기 어렵고/ 산이 길어 꿈조차 더딥니다/

나는 살아서 돌아가기 어려우니/ 뱃속의 아이를 잘 지키시구려’

- 심양으로 끌려가는 길에 쓴 오달제의 시

 

4월 19일 용골대가 윤집, 오달제를 끌어내어 

"너희들의 죄는 의당 죽어야 하나 특별히 인명의 귀중함을 생각하여 온전히 살펴서

처자를 데리고 들어와 이곳에서 살도록 허락하려 하였다." 말하자 

윤집은 "난리통에 살았는지 모를 처자식인데 허튼 수작말라" 하였고,

오달제는 "이제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여기에 온 내가 만일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늙은 어머니를

다시 뵙게 될 것이니 만일 이렇게 된다면 사는 것이 도리어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심양 외성의 서문밖에 끌고가 처형하게 되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삼학사의 높은 기개에 경탄하여 그들을 추모하는 사당과 비석을 세우고

'조선의 태산북두와 같이 빛나는 인물'이란 뜻으로 비석의 이수에 '삼한삼두(三韓山斗)'라고 새겼다 .

 

1645년(인조 23) 2월 소현세자가 8년만에 돌아왔으나 4월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고,

그리하여 5월에 봉림대군이 돌아오게 된다.

1649년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곧 효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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