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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 세계 최대의 기록문화유산

Gijuzzang Dream 2007. 12. 24. 08:59

  

  

 

 

 

 

 세계 최대의 기록문화 유산 <승정원일기>

 

 

 

중국<25사>의 6배, 조선왕조실록 4배 분량

   

국보 303호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이 책이 세계의 보물로 인정됐다는 공식적인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이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서 인류가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역사적인 자료를 세계의 보물로 인정하자는 것으로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승정원일기>가 선정되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는 과정에서

‘국제자문위원회’의 까다로운 질문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이 이미 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는데

<승정원일기>도 지정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국가의 공식연대기가 두 가지나 된다는 것을 뜻한다.

국가의 공식기록을 여러 기관에서 체계적으로 편찬하는 사례가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없으므로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신병주박사는 적었다.

물론 <승정원일기>는 국제자문위원회 심사를 너끈히 통과함으로써

조선시대 기록문화가 탁월했음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승정원일기>란 이름 그대로 승정원에서 처리한 왕명출납과 제반 행정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한

일지(日誌)이다. 승정원은 조선시대 왕의 최측근에서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한다. 승정원은 정원, 후원, 은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은대는 중국 송나라 때 궁궐 은대문 안에 은대사를 두어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와 관아의 문서를 주관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승정원일기>에는 조선시대 왕의 모습이 어떤 사료보다 상세하게 담겨있다.

이 글은 ‘역사스페설’, 신병주, 전해종의 글을 많이 참조하였다.

 

 

왕의 비서실, 임금에 빗댈 정도로 위상 높아

 

고려시대에도 승정원과 같은 기능을 가진 부서가 있었고 일기도 기록되었다.

즉, 고려 성종대(981-997)에 은대남북원을 두어 왕명을 출납하였고,

현종대(1009-1031)에는 중추원에 정3품의 승선 4인과 정7품의 당후관 2인을 두어 왕명을 출납하고

그 출납한 공사(公事)를 기록하게 했다. 뒤에 그 부서와 관명은 변하면서도 그 기능은 계속되었지만,

당시에 기록된 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쉽게도 현존하는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 전 왕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창덕궁을 무대로 작성된 것이다. 경복궁이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으로

인조 이전의 기록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멸실되어

현존하는 것은 인조 1년(1623)부터 융희 4년(1910)까지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승정원일기>는 후일에 보수한 것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1623년까지의 일기도 이괄의 난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인조 때 1592년 이후의 일기를 보수하였으나 또다시 영조 20년(1744) 승정원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당시의 화재로 1592년-경종 1년(1721)까지의 일기가 소실되고,

1722년-1744년의 일기만 남자, 영조는 1746년 일기청을 설치하고 <승정원일기>의 보수를 명했다.

고종 25년(1888)에도 승정원의 화재로 1851년(철종 2)-1888(고종 25)의 일기가 소실되었으나

1890년(고종 27) 개수가 끝났다.

물론 <승정원일기>는 개수한 부분이 많으므로 원전과 다소 달라진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개수할 당시 원본가 다름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음이 틀림없으므로

사료적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추정한다.

 

<승정원일기>를 기록하는 승정원을 중요시한 것은

승정원이 창덕궁 인정전과 승정전 사이에 있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관청은 궁 바깥인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었지만

유독 홍문관과 승정원은 궁 안에 있었다.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기 위한 배려라 볼 수 있다.

승정원 직제는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를 비롯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의 정3품 6승지와 정7품의 주서(注書) 2명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서리, 사령, 수공 등 승정원 관리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하급 실무자가 60-70명 정도였다.

주서는 승지의 지휘를 받아 승정원 안의 기록과 문서를 관리했고,

왕명이나 승지의 지시에 따라 관청간 업무연락 등을 담당했다.

특히 주서는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게 하여 역사기록을 실질적으로 담당했고

<승정원일기>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또한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전쟁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사변가주서는 후에도 군무와 칙사 등에 관한 기록을 맡았다.

 

승정원의 기능은 승지들이 경연참찬관과 실록편찬기관인 춘추관의 수찬을 겸직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도승지는 홍문관 직제학과 내의원, 상서원의 장과 상의원, 사옹원의 부제조까지 겸직하는 등

왕의 측근에서 왕에 관한 거의 모든 실무적인 일을 관장했다.

상서원에서 옥새를 관리하지만, 옥새를 사용토록 하는 것은 승조원이다.

국왕의 경호는 선전관청, 궁궐 수비는 내병조를 비롯한 군대들이 맡았지만

궁의 열쇠와 자물쇠 관리에 대한 최종책임은 승정원에 있었다.

조선왕조에서 승정원의 중요성은 기본 역할인 왕명 출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시호를 받는 예를 보면 가장 먼저 시호 담당부서인 봉상시에 접수한다.

이어서 이조와 예조를 거쳐 의정부 결재를 거치며, 최종적으로 왕의 결재를 받는다.

왕의 결재가 떨어지면 결재의 의미로 '계' 도장이 찍히는데,

문서 마지막 부분에는 행도승지의 이름이 보이게 된다. 

문서를 왕에게 전하고 결재를 맡은 사람이 행도승지이다.

   

조선시대에 왕에게 보고되는 모든 문서는 먼저 승정원을 거쳤다.

승정원에는 도승지를 비롯한 6명의 승지들이 각자 이조, 호조, 예조 등 6조의 업무를 분담하여

문서를 검토한 후 왕에게 보고한다. 이것을 '계(啓)' 라고 하며,

왕이 결재를 마치면啓’ 라는 도장(계하인: 啓下印)을 찍어서 윤허하였음을 표시하는데,

이 왕명을 승지는 다시 각 관청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승지는 단순히 보고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왕이 읽기 쉽게 요약하고 정리하는 일도 수행했다.

이것은 왕에게 제출되는 보고서에 승지들의 영향력이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승정원은 각 부처에서 보고된 현안을 먼저 검토하고

나름대로 식견을 포함하여 왕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용재총화>에는 승정원을 가리켜 ‘후설지직(喉舌之職)’

즉 임금의 입을 대신하는 직책으로 묘사되어 있다.

절대권력자인 임금에 빗댈 정도로 승정원의 위상이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업무상 핵심 역할 때문에 승지직은 판서나 정승으로 승진하는 관문과 같은 요직이었다고

신병주박사는 적었다. 조선시대 역대 승지직을 거쳐 간 인물을 보면

조선조 초기의 권근, 황희 정승 등을 비롯하여 성삼문, 이수광, 박세당, 김창협 등

대부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나 학자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역사서

 

승정원의 많은 임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승정원일기>를 작성하는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신하들이 왕을 만날 때 반드시 사관이나 주서가 입회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낱낱이 기록했다.

당연히 말보다는 글로 적는 일이 늦기 때문에 사관이나 주서들은 속기로 기록했다.

그리고 공식적인 업무가 끝난 밤에 낮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속기록을 정리했다.

조선시대에 왕 앞에서 정사를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은 사관과 주서 두 사람뿐이었다.

사관은 <조선왕조실록>을, 주서는 <승정원일기>를 담당했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죽은 뒤에 편찬되고

당대에는 아무도 볼 수 없도록 내용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에 비해 <승정원일기>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볼 수 있는 공개된 자료였다.

국가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일기에 나타난 전례를 찾아서 정책결정에 참고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미 문종대에 <승정원일기>를 참고한 사례가 있을 정도로

조선 초기부터 <승정원일기>는 정책에 많이 사용되었다.

국가의 전례 검토나 행정의 적용, 표류민 처리문제 등 복잡한 정치, 사회 현안이 제기될 때마다

전대의 <승정원일기>를 자주 참고했다.

 

성종대에는 선왕인 세조의 전교를 찾기 위해 <승정원일기>를 참고한 사례가 보이며,

중종 대에는 일본에 잡힌 중국인을 조선에 송환하자 이에 관한 처리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신숙주가 통신사로 다녀온 후에 보고한 서계(書啓)를 참조했다는 기록도 있다.

 

서울대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승정원일기>는 한 달분의 일기가 한 책으로 묶여 있는데,

전체 길이가 3243책에 이르며 전통 한지 위에 초서체로 되어 있다.

원본의 책 크기는 대체로 세로 40㎝, 가로 28㎝이며, 총 장수는 38만2,487장이다.

그러므로 책의 장수는 79-200장 정도로 편차가 있으나 평균 125장이 한 책의 분량이며,

총 문자량은 무려 2억4,250여만 자에 달한다.

<승정원일기>는 분량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역사서를 자랑한다.

글자 수로는 중국 <이십오사>의 6배, <조선왕조실록>의 4배에 이른다.

 

<승정원일기>는 왕에게 보고되는 모든 사항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국왕 중심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승정원일기>는 일정한 틀에 의해 작성되었다.

우선 날짜와 그날 날씨를 먼저 적었다. 이것은 <승정원일기>의 특징이며,

다음으로 승정원 관리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특히 출근 상황을 정확히 적었다.

누가 출근했는지, 당직은 누구이고 몸아 아파서 출근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를 적었고,

관리 임명을 받고 왕에게 인사드리지 않은 것이나 휴가, 상을 당한 사람 등 꼼꼼하게 기록했다.

이어서 왕의 하루 일과를 장소와 시간대별로 기록했다.

왕의 동정뿐만 아니라 왕의 인간적 면모도 기록했다.

왕이 신세타령하는 장면도 그대로 묘사되어 있을 정도다.

 

<승정원일기>에는 본 내용을 기록하기 전에 책임관원들의 실명을 반드시 적었다.

앞에는 6명의 승지를 비롯하여 주서, 가주서, 사변가주서 등의 실명이 나오며,

병이나 사고로 출석하지 못한 상황까지 기록하여 기록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했다.

조선시대에는 각종 기록마다 참여자의 실명을 적었는데

<의궤> 같은 자료에는 화원이나 하급 장인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했다.

이런 실명제는 제작에 따르는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려는 뜻도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기록 작성자에게 사명감과 자부심을 고취시켰음이 틀림없다.

 

오늘날 <승정원일기>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사료적 가치 때문만이 아니라

최고통치자인 왕에 대해서도 숨기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했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밀실정치가 아닌 투명한 공개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이야말로

<승정원일기>가 돋보이는 진정한 가치라 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는 현재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글로 번역 중이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전산화작업 중이다. 전산화작업은 10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로,

현재 6년차에 해당하는데 인조 원년(1623)-영조까지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전산화되고 있다.

이들이 한글로 번역되어 전산화된다면 여태껏 볼 수 없던 자료를 학자들이 수월하게 볼 수 있으므로

한국의 역사 분야는 <조선왕조실록>의 예를 볼 때 다시한번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과의 차이점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왕조의 연대기로 볼 수 있는데

유네스코의 ‘국제자문위원회’가 지적한 것처럼 두 자료에서 어떤 면이 다른가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우선 <승정원일기>는 매일매일 기록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의 소사를 기록했으므로 조선의 정치흐름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국왕이 주체가 된 행사는 <조선왕조실록>보다 매우 세밀하여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이 어떻게 적었는지를 보면

더욱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숙종실록>의 숙종 26년(1700) 7월25일의 기록에는

좌의정 이세백 등이 평안도 지역에 학문 진흥의 분위기가 일어나 선비들이 학문을 전수받을 곳을 구하느라

문신 수령을 원하는 상황과 평안도 형세를 숙종에게 보고하고 왕이 이를 수용한 내용이 나온다.

<숙종실록>에서는 이세백이 건의한 핵심내용과 결과만 기술한 반면

<승정원일기>에는 왕과 이세백의 대화내용을 모두 기록했다.

특히 이세백은 문신 수령이 무신 수령보다 민폐를 제거하는데 훨씬 적극적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정주, 가산, 박천 등지에서 문관 수령 파견을 허락받았다.

<승정원일기>는 실록에 기록된 결론이 나오기까지 있었던 구체적인 논의 과정을 모두 적었으므로

당시의 정황을 유추하는 데는 <승정원일기>의 자료가 큰 도움이 된다.

 

<승정원일기>는 비서실의 기록인 만큼 왕과 신하들의 독대기록이 특히 자세하고,

왕의 표정이나 감정까지 상세하게 기술했다.

더구나 <승정원일기>에는 왕들이 자신의 병세에 대해 신하들에게 이야기하고

약방이나 의원들에게 자문을 구한 사실과,

국왕의 기분과 병세 및 나아가 왕실의 건강상태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어

당대의 조선왕조 동태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영조실록>의 영조 15년(1739) 5월 을해(30일)조에는 영조대에 덕적도에 군사시설을 두는 문제를 두고

강화유수가 지도를 작성해 올려보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더 이상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그런데 같은날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보면

지도 작성자는 강화유수의 군관인 심동상과 경기수사의 군관인 이세황임을 알 수 있다.

 

준천시사열무도’는 영조대의 청계천 준설공사 모습을 묘사했다.

이 그림에는 영조가 직접 공사현장을 지켜보고 있으며,

작업하는 인부들의 모습, 건설 장비, 공사 감독들이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 34년(1758) 5월6일 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공사의 가부를 물었다고

간단하게 한 줄로 적었다.

반면 <승정원일기>에는 이미 5월2일부터 청계천은 잦은 범람으로 홍수피해가 우려된다며

영조가 공사를 시작한 배경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종과 순종의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되어 엄밀한 의미에서 실록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고종 3년(1866) 3월3일의 <승정원일기> 기록을 보면 당시의 과거시험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고종이 창덕궁 춘당대에 나가 유생들의 시험을 보고 인재를 뽑는 시취의 정황이 나오는데

왕이 거둥한 시간과 입시한 신하의 명단이 나오고,

왕의 복장과 궁궐에서의 이동 경로, 시험 실시 과정, 시상에 관한 내용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시험 실시 과정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주고받은 대화, 유생들의 입장 여부,

강의할 서책의 낙점과 추첨에 의해 강의할 부분을 정하는 과정, 시권(시험답안지) 제출,

합격자 발표와 포상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현장의 모습을 실황중계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신병주박사는 적었다.

 

자료로는 <승정원일기>를 따를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광범위한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이와 달리 <승정원일기>는 사건이나 사업에 대한 배경. 동기, 과정을 모두 기록했으며,

논란이 되는 상황들과 결과도 광범위하게 기록했다.

치밀하고 철저하게 기록한 점에서 <승정원일기>가 <조선왕조실록>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국왕의 동정을 비롯하여 정치의 주요현안이 되는 자료나 각종 상소문 원문을 거의 그대로 수록하여

무엇보다도 1차사료로서의 가치가 돋보인다.

 

정조 16년(1792) 4월의 일기에

경상도 유생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때 연명으로 상소한 사람이 무려 1만명이 넘는다.

이들 모두의 이름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이 많은 선비들이 집단으로 올린 상소를 만인소(萬人疏)라고 하는데,

이것은 지방 선비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던 방법이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서원철폐 같은 사회적 쟁점이 있을 때마다 만인소가 자주 등장한다.

승정원에서는 당시 여론의 동태를 파악하고 상소를 올린 이들에 대해 증거를 남기기 위해

1만여 명이나 되는 명단이지만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물론 <승정원일기>가 모든 정보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국왕을 보좌하는 비서실에서 보고된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왕이 주관하지 않은 의식이나 지방의 사건 기록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보다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 많다.

 

실록의 장점 중 하나는 오늘날 신문의 사설이나 논평처럼 후대 사관들의 견해도 함께 제시하여

사건에 대한 해설을 얻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실록의 사론(史論)은 객관적인 사실을 정리한 <승정원일기>와 대비되는 부분이 많다.

따라서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서로 보완하여 이용할 때 자료로서의 가치가 커진다.

물론 정조 이후 국왕의 일기 형식으로 국정 전반을 서술한 <일성록>도

<승정원일기>를 보충해주는 자료로 꼽힌다.

- <자유공론> 2005년 4월호, 이종호, 우리역사문화읽기

- 자료사진은 기주짱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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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숨결이 느껴지는 기록,『승정원일기』

 Seungjeongwon Ilgi: Breathing Life into Korean Politics of the Past

 

 

『승정원일기』의 자료적 가치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出納)을 맡으면서 비서실의 기능을 했던 기관인 승정원에서 날마다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일자별로 기록한 책이다.

 

원래 건국 초부터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 288년간의 기록 3,243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다.

 

『승정원일기』는 세계 최대의 역사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1999년 4월 9일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9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치의 미세한 부분까지 정리된 방대한 기록, 빠짐없이 기록된 날씨,

1870년대 이후 대외관계에 관한 기록 등은 『승정원일기』의 가치를 보다 돋보이게 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실록 편찬에도 가장 기본적인 자료의 하나로 활용되었으며,

특히 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후설(喉舌: 목구멍과 혀)의 직책에 있었던 승정원에서 이루어진

기록인 만큼 왕의 기분, 숨결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록에 담았다. 


 『승정원일기』의 가치를 보다 돋보이게 하는 요소는 매일의 날씨를 기록한 점이다.

『승정원일기』의 날씨 관련 기록은 전통시대 기후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288년 간 빠짐없이 쓴 기록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서 작성하였다.

승정원이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한다.

승정원에서는 국왕의 지시사항이나 명령을 정부 각 기관과 외부에 전달하는 역할과 함께

국왕에게 보고하는 각종 문서나 신하들의 건의사항을 왕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정원(政院) 또는 후원(喉院)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후(喉)’는 목구멍을 뜻하는 한자어로 승정원이 국왕의 말을 바로 대변하는 요처임을 암시한다.

 

『승정원일기』의 편찬은 「승사(承史)」라 칭하는 승지와 주서가 공동으로 담당하였으며

최종 기록은 주서들에게 맡겨졌다. 승지는 무관도 임명될 수 있었으나

주서는 반드시 학문과 문장이 검증된 문관을 뽑아서 임명하였다.

주서는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승정원을 거친 문서나 실록 편찬에 참고했던 국내외 각종

기록들을 두루 검토, 정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주서가 기록한 매일의 일기는 한 달 분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았는데,

일기가 밖으로 유출되는 것은 엄격히 금지시켰다.

 

인조에서 경종대까지의 초기 기록은 2달 또는 3달의 기록이 한 책으로 편집된 예도 있었지만,

영조대 이후에는 한 달 분량의 일기가 1책으로 편집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편찬된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 보관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 근정전의 서남쪽 월화문 밖에,

조선후기에는 창덕궁 인정전 동쪽의 승정원에 보관하였다.


조선 전기에 기록된 『승정원일기』는 전쟁과 정변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후에도 영조 때와 고종 때 등 차례에 걸쳐 화재를 만나

『승정원일기』의 일부 책들이 소실되었지만

그때마다 『춘방일기(春坊日記)』와 『조보(朝報)』 등을 널리 수집하여 빠진 부분을 채워 나갔다.

 

『승정원일기』는 매일 쓰여 졌기 때문에 하루, 한 달, 일 년의 정치 흐름을 이해할 수가 있다.

국왕의 건강이나 심리상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물론,

국왕의 정무를 보던 장소와 시간대별로 국왕의 이동 상황 등을 기록해두었기 때문에

이를 보면, 국왕의 동선(動線) 파악도 가능하다.

또한 정치의 주요 현안이 되는 자료나 중앙이나 지방에서 올린 상소문의 원문을

거의 그대로 수록하고 있어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돋보인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비교

사례를 통해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자료적 가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숙종실록』숙종 26년 7월25일 기록에는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이 평안도 지역에서 문신 출신 수령을 원하는 경우가 많음을

보고한 내용이 나온다.

『숙종실록』에는 약 10행(1행은 30자)에 걸쳐 나오는데,

『승정원일기』의 같은 날 기록에 의하면 4면(1면은 30행, 1행은 27자) 21행에 걸쳐 있다.

『숙종실록』에서는 핵심내용만을 기술한 반면,

『승정원일기』에는 왕과 이세백이 대화하는 내용을 모조리 기록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왕과 신하들의 독대 기록이 특히 자세하며,

왕의 표정하나 감정하나까지도 상세히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

또한 역대 국왕들 스스로가 자신의 병세에 대해 신하들에게 이야기하고

약방이나 의원들에게 자문을 구한 사실과

국왕의 기분과 병세 나아가 왕실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이 할애되고 있다. 


『승정원일기』와 같은 명품을 남긴 선조들의 뛰어난 기록문화의 전통은,

우리들에게 과거라는 미지의 공간을 보다 정확하고 생동감 있게 들여다보게 한다.

『승정원일기』를 ‘현재의 거울’로 삼아

 21세기 문화대국을 지향하는 몫은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남아 있다.

Value as Historical Material


Seungjeongwon Ilgi, or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is the daily records on the documents and events handled by the royal secretariat Seungjeongwon, which was in charge of transmitting documents to and from the king in the Joseon Dynasty (1392-1910).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is thought to have been kept from the early days of the dynasty, but only 3,243 books covering 288 years from 1623 (1st year of King Injo) to 1910 (4th year of King Sunjong) are extant, now housed at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Comprising the world's largest collection of authentic historical recordings,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was designated National Treasure No. 303 in April 1999 and inscribed on the UNESCO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in September 2001. Its historic value is enhanced by its comprehensiveness, seen in the meticulous records on politics, weather observations without a single missing day, and foreign relations after the 1870s. Since Seungjeongwon Ilgi was written by the royal secretariat, which kept close attendance on the king, functioning as his "huseol" (literally "throat and tongue"), it reflects even subtle changes in the king's feelings. Hence it was used as the most basic reference material in compiling Joseon Wangjo Sillok, or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s mentioned earlier, one of the elements enhancing the royal diaries' historic value is the daily weather reports. Such detailed records on the weather provide valuable material for the study of climate. 

 

 

Not a Single Day Missed Over 288 Years


Seungjeongwon, corresponding to the modern day presidential secretary's office, delivered the king's instructions and commands to government agencies or provincial administrative offices as well as transmitting various kinds of documents and suggestions from retainers to the king. It was also called "jeongwon" or "huwon" (literally "throat agency"), indicating its important rule of speaking for the king.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was compiled by the seungji (royal secretaries) and juseo (scribes), together called "seungsa," with the latter responsible for the final recording. While military officials could be appointed as royal secretaries, the scribes were selected only from among scholar officials based on their learning and writing skills. As the scribes doubled as copyists for Chunchugwan (Office for Annals Compilation), they also reviewed and edited the records which had gone through the Royal Secretariat or been referred to in compiling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Entries in th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strictly prohibited from being taken outside the court, were made by a juseo every day and generally compiled into a volume every month to be presented for the king's approval. While two to three months' worth of entries were compiled into a volume during the early days of the dynasty from King Injo (r. 1623-1649) to King Gyeongjong (r. 1720-1724), one volume for each month became the norm after King Yeongjo (r. 1724-1776). The compiled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were kept at the Seungjeongwon building, located outside Wolhwamun gate, southwest of Guenjeongjeon Hall (the throne hall) in Gyeongbokgung Palace in early Joseon, and then moved to the east of Injeongjeon Hall in Changdeokgung Palace in late Joseon.
The early volumes were mostly destroyed during wars or internal conflicts, and again in later days such as under the reigns of Yeongjo and Gojong, some of the royal diaries were lost in fire. The missing parts, however, were soon restored based on comprehensive research of Chunbang Ilgi (Diaries of the Crown Prince), the Jobo (daily government gazette) and other materials.
As records were made on a daily basis, Seungjeongwon Ilgi indicates political changes during a particular day, month or year. Besides recording in detail the health and feelings of the king, the royal diaries also give a glimpse of the king's movements since they detail where the king administered state affairs and where he went every hour. Containing such content as major political issues and the original texts of petitions from the central and provincial government offices alik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is even more valuable as historical material.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vs.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Let us take a examples to see the value of the material provided by th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An entry on the 25th day of the 7th month of the 26th year of King Sukjong in Sukjong Sillok (Annals of King Sukjong) describes Jwauijeong (Second State Councilor) Yi Se-baek reporting to the king that many villages in Pyeongan-do province preferred scholar officials as their magistrates. While the Annals of King Sukjong records the event in only ten lines with 30 characters per lin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record the same event in four pages and 21 lines, with 30 lines per page and 27 characters per line. This is because the former presents only a summary whereas the latter records the dialogue between the King and Yi. As in this case, the 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makes detailed records on meetings between the king and his retainers, and frequently mentions subtle changes in the king's facial expressions or feelings. In addition, the royal diaries include a large volume of recordings on the health of the king as well as the royal family: the king would talk to his retainers about his illness and consult with the Palace Dispensary or royal doctors.
The outstanding documentary tradition that left behind a legacy such as Seungjeongwon Ilgi helps the present generation gain a more accurate and vivid view of the unknown past. It is now up to the present generation to use Seungjeongwon Ilgi as a "mirror of the present" to turn the country into a cultural power of the 21st century.


- 글 · 사진제공: 신병주 교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by Sin Byeong-ju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  2008-02-04 / 월간문화재사랑

 

 

 

 

 

 

 

 

 

Song For You(Feat.Chris Botti) / Michael Bu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