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 강도(江都)에 가면.,,
강도(江都)에 가면 ...
흔히 지붕없는, 국토박물관이라 하지요.
우리나라 섬 들 중에 제주-거제-진도 다음 네번째에 속하는 강화
대개 "강화" 다녀오면
잘 다녀왔다 소리 안합니다.
슬쩍 둘러보면서 볼 것도 없고 시시하다고만 합니다.
실은... 그러면 되게 용감무식하다 이야기듣기 딱이죠.
곳곳 다 둘러보려면 2박3일도 빠듯빠듯하지요.
▲ 선사시대 고인돌 - 강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세계문화유산
▲ 단군의 숨결 - 참성단이 있는 성역 마리산, 단군의 세 아들 전설있는 삼랑성(정족산성)
▲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고려산
향토사 <강도지>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서부의 세족으로 강화군 하점면에서 대인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산 치마대의 오정에서 무술을 연마하였다고 하며....
▲ 고려시대의 흔적
몽고군의 침입과 최씨 무신정권의 강화천도,
'관청리'라는 지명은 남고 지금은 쪼개지고 사라진 궁터,
팔만대장경 판각하던 선원사터
(요즘은 이곳의 목탁소가 더 유명, '세상에 이런일이' TV프로 출연^^)
남한에는 고려의 왕릉이 5기가 있는데,
고양시 원당 왕릉골마을의 공양왕(恭讓王)과 왕비인 순비 노씨(順妃盧氏)의 왕릉을 뺀
나머지 2명의 왕, 2명의 왕비의 왕릉이 강화에 ...
21대 희종(1169-1237)의 석릉(碩陵)과 석릉 주변의 100여 기의 고려시대 돌덧널무덤(석곽묘)
23대 고종(1213-1259)의 홍릉(洪陵)
22대 강종의 비, 고종의 어머니 원덕태후의 곤릉(坤陵)
24대 원종의 비, 충렬왕의 어머니 순경태후의 가릉(嘉陵)
그런데 홍릉을 제외한 왕릉과 왕비릉들은 모두 진강산 일대에 집중되고,
능내리라는
지명에서 짐작할 수 있는왕실 또는 최상위 지배층의 무덤이었을 같은 돌방무덤 3기,
왕릉은 아니지만 강화도 전역에 있는 고려시대의 덧널무덤(목곽묘)과 움무덤(토광묘) 등
최초의 금속활자 상정고금예문에 대한 기록을 남긴 '동국이상국집'을 편찬한 이규보(1168-1241),
환도이후 끝까지 항쟁하고자 뱃길을 잡던 외포리의 삼별초 이야기 들...
▲ 조선시대의 현장
조선시대의 국방유적들 - 진, 보, 돈(5진 7보 53돈대), 봉천대의 봉수
조선시대의 강화사상 - 정제두, 이건창
조선의 철종임금 원범도령이 벌떡 일어난 용흥궁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배지 교동도
끊임없는 간척사업으로 강화의 외형 변화 ...
조선시대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 중의 하나 정족산사고
외각으로 불렸던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 등을 도적맞던 그 안타까운 속사정
조선의 개항을 열고자 억지 강화조약을 조인한 연무당옛터
고려의 거란침략, 몽고침략,
조선의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의 외세충돌에 맞서야했던 섬 강화...
▲ 지금은
분단현실이 말해주는 해안선의 철책, 섬 곳곳에 있는 해병대를 비롯한 군 부대들
그리고, 고향잃은 실향민들의 망향단
또 강화도 출신이었던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과 체류이야기
함민복시인과 김남주시인 가족
요즘 생태기행으로 몸살앓는 갯벌들
관광을 위해 선착장으로 모여드는 석모도기행팀, 서도기행팀, 바다낚시팀.
덕분에 새우깡을 받기위한 '거지갈매기'는 ... Show를 하라, Show를 하라 ... 입니다.
지금부턴 가을전어, 양식대하가 한창인가요^^
해안가 횟집들 즐비하고, 해안도로 드라이브족 여유부리고 ...
뭐니뭐니해도
해넘이, 낙조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죠.
아, 적석사와 장하리 ...
그 펼쳐진 바다에 서서히, 갑자기 퐁당 빠져드는 해님.
한동안 바다 너머 사위어가는 붉은 빛과 곧 찾아드는 그 가뭇한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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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도 한도 없이 이어지는 역사 이야기의 현장 강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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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중에서 성공회강화성당을 좀 더 살펴본다면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 11월 15일 건립된 전통한옥 중층건물입니다.
100년이 훨씬 넘어버린 역사적인 건축물이죠.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고, 십자가를 새겨넣은 동종이 있는 종각,
백년이 넘은 회화나무와 보리수나무가 큰 그늘을 만들고
한문으로 적힌 주련과 십자가와 태극이 어우러진 문양들.
‘天主聖殿’이라고 씌어 있는 현판,
성당 안의 어릴적 '국민학교' 걸상같은 그 앙징맞은 나무의자에 앉기를 좋아합니다.
손때, 엉덩이때(?) 반들반들한 결을
손으로 가만 쓸어보고, 엉덩이 살짝 부벼대면서,
의자를 슬쩍 앞으로 끌어당겨도 나뭇바닥에 뒤엉키는 소리 나지않아 참 즐겁습니다.
반야용선(般若龍船) 같은 성당 건물은
요즘엔 되레 우리가 해외선교에 나서는 상황에서
‘약자의 문화’를 어떻게 배려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게 합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에서는 강화군내 문화유적 보존,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강화 고려왕릉(嘉陵과 坤陵) 발굴조사 하였다.
가릉(嘉陵, 사적 제370호)은 고려 제24대 원종(元宗)의 비인 순경태후(順敬太后)의 능이고,
곤릉(坤陵, 사적 371호)은 제22대 강종(康宗)의 비인 원덕태후(元德太后)의 능으로,
일제시대 이후 계속된 도굴과 무관심으로 폐허화되었던 것을
1974년 무너진 봉분과 주변 일대를 보수하여 사적으로 지정·보호하고 있으나,
정확한 능역과 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발굴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발굴결과, 가릉(嘉陵)은 다른 고려 왕릉들이 지하에 석실(石室)을 만든 지하식(地下式)인데 반해
지상식(地上式)으로 축조되어 있고,
봉토 내부에 방형(方形)으로 할석(割石)을 쌓아 봉분(封墳)을 조성하였으며,
정다듬한 화강암(花崗巖)을 사용하여 정교히 축조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석실크기 : 길이 255㎝, 너비 170㎝, 높이 175㎝).
석실 천장은 대형 덮개돌(蓋石) 3매를 동서방향으로 놓은 평천장(平天障)이며,
이 덮개돌위에 8개의 장대석을 8각으로 돌려 호석으로 사용하였다.
석실내 세 벽과 천장(天障)에는 회(灰)를 바른 후 벽화를 그렸으나
남아 있는 그림이 일부에 불과하여 전체적인 벽화내용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출토된 유물은 중국 송(宋)시대 주조된 원풍통보(元豊通寶)를 비롯하여
19종 77점의 동전과 옥장식품, 호박제 구슬 등으로
고려시대 유물 편년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곤릉(坤陵)은 고려 왕릉의 구조적인 전형(典型)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우선 장대석을 이용하여 경사진 부지를 3단으로 조성하고,
최상단에는 지하식 구조의 석실을 축조하였고(석실크기 : 길이 330㎝, 너비 245㎝, 높이 220㎝),
중단에는 문인석(門人石)을 비롯한 석물(石物)을 배치하였으며,
최하단에는 제례(祭禮) 공간인 정자각(丁字閣)이 축조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정자각은 정면 3칸(주칸거리 : 중앙어칸 370㎝, 좌우협칸 290㎝),
측면 1칸(주칸거리 250㎝내외로 추정)의 건물을 축조하고,
이 건물의 중앙어칸을 따라 남편으로 길이 530㎝의 돌출된 건물을 잇대어 놓아
전체적으로 볼 때 정자형(丁字形)을 띠고 있다. 건물의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전면에 깔아 놓았다.
출토된 유물은 석실 폐쇄석(閉鎖石) 앞에서 삼족향로(三足香爐)와
간결한 당초문(唐草文)을 역상감(逆象嵌)한 병뚜껑,
그리고 화형접시(花形접시) 등의 고려시대 최상급의 청자(靑瓷)가 다수 출토되었고,
정자각 주변에서 당시 유행했던 귀목문(鬼目文) 암수막새를 비롯한 다량의 와전류(瓦塼類)가 출토되었다.
이로써 강화도에 남아 있는 4기의 고려왕릉 중 이미 발굴된 석릉(碩陵)을 포함,
3기의 왕릉이 발굴됨으로써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개석상부 8각 장대석의 용도를 비롯한 고려왕릉의 구조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출토된 청자를 비롯한 다수의 유물은
이 시기 문화상을 보다 상세히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3) 박규수는 쇄국 동조한 대원군 측근
한·미관계의 틀이 갖춰진 것은 8·15 이후지만, 시작은 19세기 조선으로 올라간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그러나 앞서 두 나라 사이에는 충돌이 적지 않았다. 최초의 부딪침은 1866년 미국 상선이 대동강에 무단침입했다 격침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
이듬해 군함 와츄세트호가 황해도 근처에 내항, 통상을 요구했다.
1868년에는 군함 셰난도어호가 황해바다에 40일 가까이 체류하며 조선 정부와 신경전을 벌였다. 그리고 1871년에는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셔먼호 사건에서 신미양요에 이르는 6년간은 한·미관계를 형성시킨 원형질의 시기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대원군과 박규수가 있었다. 당연히 초기 한·미관계의 실상을 알려면 두 사람의 활동을 추적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쇄국·배외정책을 추진한 대원군의 외교방향에는 학계의 이견이 없다.
반면 환재 박규수(1807~1877)는 대원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며 대미수교를 이끌어낸 인물로 알려져 왔다. 한국기독교사 연구자나 근대 한·미관계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박지원의 손자로서 실학을 계승해 개화사상의 씨앗을 뿌렸다는 사상사적 연구 성과도 이같은 인식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김명호 성균관대 교수(한국한문학)는 최근 출간한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역사비평사)에서 학계의 통설과는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김교수는 이 책에서 “신미양요 시기에 박규수가 대미수교를 원했다는 종래의 논의는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확대해석한 결과”라고 밝혔다. 박규수는 척사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탄압정책에 동조했으며 교섭을 통해 서양을 중화문명에 귀의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박규수는 당시 평안감사로 부임한 직후 셔먼호 사건을 성공적으로 처리하면서 대원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어 셰난도어호 내항 때에는 미국측과 직접 교신하기도 했으며 미국·중국 등에 보내는 각종 외교문서를 짓기도 했다.
김교수는 승정원일기, 일성록, 고종실록 등 기본사료와 미국과의 관계를 기록한 ‘평양감영계록’ ‘동진어모일기’ 등 각종 문헌을 토대로 초기 한·미관계를 꼼꼼하게 복원해 놓고 있다. 사료를 바탕으로 한 실증주의적 고찰은 기존 연구의 오류들을 바로잡고 있다. 김교수는 셔먼호를 타고 온 토마스 목사가 조선에 들어오기 직전 베이징에서 박규수를 만나 선교활동의 지지와 후원 약속을 받았다는 설에 대해 전혀 사실 무근으로 당시 박규수는 베이징에 간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
또 토마스 목사를 ‘순교자’로 예찬하는 기독교계의 견해에 대해 “토마스는 셔먼호 일당의 불법적인 행동에 동참해 평양 군민들로부터 서양침략자들의 ‘괴수’로 오인되어 피살된 것”이라고 밝혔다.
김교수는 이와 함께 “박규수가 이항로의 상소를 칭찬했으며 서양 오랑캐와 화친 불허 등을 담은 대원군의 양이책을 전폭 지지했다”며 박규수를 대표적인 주화론자나 개국을 구상한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문학 전공자가 문헌을 통한 미시사적 접근 방식으로 초기 한·미관계사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일은 이례적인 일.
‘열하일기 연구’의 저자이가도 한 김명호 교수는 “근대사상의 원류를 규명하기 위해 연암의 손자 박규수를 주목하게 됐다”고 밝혔다.
- 2005년 1월 27일,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