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기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외교사] 4-5. 조선건국 직후의 조-명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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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불리는 삼봉 정도전(1337∼1398)의 영정. 원명교체라는 국제정세의 격동기를 살았던 정도전은 고구려의 고토 요동을 수복해야 한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명이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자신을 잡아 보내라고 하는 등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자 그는 요동 정벌을 실천에 옮기려고 시도했다. (경기도 평택 '정도전 기념관' 제공)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명의 공갈에 격분한 우왕과 최영은 요동을 공격하려고 시도했다.
우왕은 평양으로 나아가 요동 정벌을 위한 본영을 설치하고 원정군의 지휘부를 편성했다.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를 좌도도통사, 이성계를 우도도통사로 삼아
대략 5만여 명의 병력과 2만여 필의 전마를 동원했다.
하지만 이성계 일파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입하기 직전, 휘하의 군사들을 되돌린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는 명분을 비롯한 이른바 4가지 불가론을 내세워 회군한 뒤
쿠데타를 감행한다. 위화도회군이 그것이었다. 이윽고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은 잘 알려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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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에 바짝 엎드리다
1392년(태조 1) 7월, 즉위한 이튿날 이성계는 조반 등을 명에 보내 자신의 등극 사실을 알렸다.
“공민왕이 후사 없이 죽은 뒤 신돈의 자식인 우왕과 창왕이 연이어 즉위했는데
그들이 어리석고 무능했을 뿐 아니라 참람하게도 군대를 동원하여 요동을 공격하려 했다”며
‘이성계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회군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새로 건국한 왕조는 명에 순응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확실히 전하려고 했다.
이성계는 또한 국서에서 자신의 칭호를 ‘권지고려국사’라고 했다.
‘임시로 고려의 국사를 맡은 자’라는 뜻이다. 스스로를 낮춰 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조선의 공손한 태도가 효과를 발휘했던 것일까. 주원장의 반응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보고 내용을 믿을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고려는 산과 바다를 격하여 동쪽에 치우쳐 있는 오랑캐이니 우리 중국이 간여할 바 아니다”라고 하면서
‘향후 백성들을 잘 다독이면서 틈을 만들지 말라’고 유시했다.
왕씨에서 이씨로 바뀐 역성혁명에 대해 별달리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조선은 같은 해 윤 12월에도 사절을 명에 보내 새 왕조의 국호를 정해달라고 요청한다.
주원장은 “동이의 호칭으로는 조선이란 이름이 가장 좋다”며 조선을 국호로 낙점해 주었다.
애초 조선이 명에 선택해달라고 요청한 국호의 후보 가운데는 조선 이외에 화녕(和寧)이란 이름도 있었다. 만일 당시 주원장이 화녕을 선택했다면 고려의 뒤를 이은 왕조의 이름은 내내 화녕이라 불렸을 것이다.
1393년 2월, 조선은 명이 요구한 말 9800여 필을 요동까지 운반해서 납입했다.
명은 말 값을 비단과 면포로 결제했다.
조선은 곧이어 사신을 다시 남경으로 보내 공물을 바치고 조공했다.
이성계가 즉위했던 직후 조선은 명의 눈치를 살피며 참으로 조신한 태도를 보였다.
사그라들지 않는 요동에 대한 야심
요동을 공격하기 직전 위화도에서 회군을 감행한 것, 왕조 개창 직후 국호를 정해 달라고 하는 등
명에 대해 지극히 공순한 자세를 취했던 것 등을 고려하면 이성계 일파를 사대주의자로 인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이성계와 그의 가장 가까운 참모 정도전은 사대주의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왕조 개창 이후 그들이 보여준 일련의 지향을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명에 대해 공순하게 조공과 사대를 다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요동에 대한 영토적 야심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히 명과의 갈등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왕조 교체의 사실을 알리러 갔던 조반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귀국하자
1392년 10월, 조선은 명에 다시 사은사를 파견했다. 사은사는 문하시랑찬성사 정도전이었다.
그런데 당시 정도전이 귀국한 이후부터 주원장은 정도전을 대단히 위험한 인물로 규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도전이 귀국 길에 산해위를 지나면서 했다는 발언이 주원장의 귀에까지 들어갔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산해위에서 “(일이) 잘 풀리면 좋지만 잘 풀리지 않으면 와서 한바탕 공격하겠다”고 운운했다는 것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주역이었던 정도전의 이 발언은
사실상 명을 무력으로 공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정도전은 언제부터 요동에 대한 야심을 품었던 것일까?
1398년 이른바 왕자의 난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이후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에
정도전의 야심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요동을 ‘고구려의 고토’이자 언젠가는 회복해야 할 강토로서 여기고 있었다.
정도전은 일찍이 저술한 <경제문감별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을 아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왕건이 평양에 자주 거둥하여 친히 북변을 순시하면서 동명왕의 고토를 회복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제시함으로써 500년에 이르는 고려의 국맥을 배양했다’고 찬양했다.
태조 왕건의 북진정책을 찬양했던 정도전의 야심은 그가 이성계에게 했다는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일찍이 이성계에게 과거 오랑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자가 되었던 역사적 사례를 설파하면서
요동 정벌을 권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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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등의 야심을 인지했던 명은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주원장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조선이 요동의 여진족을 초무하는 것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선이 여진족들을 회유, 포섭하여 궁극에는 요동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393년 11월, 명의 요동도사는 이경선 등 조선인 6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여 남경으로 압송했다.
이듬해에는 명 사신을 영접하러 갔던 조선 지방관 일행을 붙잡아 가기도 했다.
조선이 요동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경계 의식 속에서 극단적으로 의구심을 발동했던 것이다.
조선을 압박하여 길들이려 했던 명의 강압적 태도는 이른바 표전 문제를 통해서도 불거졌다.
표전이란 ‘표문’과 ‘전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말한다.
‘표전 문제’란 명의 주원장이 조선이 보낸 국서 가운데 자신을 업신여기고 모욕한 내용이 있다고 하여
작성자를 잡아 보내라고 요구하면서 불거진 외교적 갈등을 말한다.
‘측근’ 정도전 공공연한 야심
‘표전 문제’로 명과 외교갈등
‘회군’ 9년만에 요동공격 준비
주원장은 1395년(태조 4) 10월, 신년 축하 사절 유구 등이 가져간 표전의 내용을 문제 삼아
유구 등을 남경에 억류했다. 주원장은 표전의 작성자로 정도전을 지목한 뒤
정도전을 보내야만 유구 등을 석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주원장은 이어 같은 해 11월에 남경에 도착했던 계품사 정총 일행이 소지했던 표전의 내용,
1397년 8월에 보낸 천추사의 표전 내용도 문제 삼았다.
명은 정도전 등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억류한 사신들의 처자까지 보내라고 강압했다.
급기야 조선이 표전 문제와 관련하여 보낸 정총, 김약항, 노인도 등을 처형하는 초강수를 뽑아 들었다.
표전 문제를 계기로 지속된 명의 강압적인 태도는 정도전 등의 요동 정벌 의지에 불을 붙였다.
1397년(태조 6) 8월 이후 정도전과 남은 등은 연일 이성계를 만나 요동 공격 계획을 밝히고
군사 훈련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불과 9년 전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며
위화도회군을 단행했던 개국 주체들의 시선이 다시 요동으로 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11. 11.11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