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술사 연구원의 집념, 잠자던 ‘純宗의 십장생도 병풍’을 깨우다
어느 미술사 연구원의 집념,
잠자던 ‘純宗의 병풍’을 깨우다
윤진영 씨가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으로 밝혀낸 구한말 역사와 삶…
대한제국기에 찍은 낡은 대가족 사진 한장이 국보급 십장생도 병풍으로 안내하는 문이 됐다.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마당에 펼쳐진 병풍 윗부분에 그려진 구름(위 사진 속 점선 부분)을 포착했다. 아래쪽은 실제 십장생 병풍 그림과 사진 속 인물을 합성한 사진.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제공)
한 장의 사진은 때로 수많은 사연이 엮인 ‘이야기 타래’가 된다.
시공간을 가르며 제각각 약동하던 이야기들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딱 한순간의 화면으로 고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 선임연구원(44)이 지난해 우연히 본 100여 년 전의 한 대가족 사진이 그랬다.
마당에 두 개의 병풍을 두르고 집안의 남녀노소가 모두 모여 찍은 사진 한 장.
한국미술사를 연구하는 윤 연구원의 눈을 그 사진은 비켜가지 못했다.
집요하고 끈질긴 추적 끝에 사진 속 마당에 서 있던 병풍 중 하나가
순종의 천연두 회복을 기념해 만든 국보급 십장생도 병풍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궁중에 있어야 할 병풍이 어떤 사연으로 여염집 마당에 있게 된 것일까.
○ 빛바랜 대한제국기 사진을 만나다
윤 연구원은 2010년 2월 대한제국기 생활상을 소개한 책 ‘민족의 사진첩 Ⅲ’(1995년·서문당)을 읽다가
74쪽에 실린 가족사진 한 장에 눈길이 갔다.
특별한 날을 기념해 찍은 듯한 사진 속에는 집안의 가장과 아들 딸 며느리 손녀들이 함께 했다.
가족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등장했다는 사실이 먼저 윤 연구원의 시선을 붙잡았다.
‘재산이 많더라도 웬만큼 개화된 의식을 갖지 않고서는
가족을 모조리 불러 사진기 앞에 앉히기 어려운 때가 아니던가.’
남성들의 모자는 갓뿐 아니라 정자관(산 모양으로 2, 3개 층이 있는 모자), 사모(관복을 입을 때 쓰던 관),
중산모(꼭대기가 둥글고 높은 서양모) 등 다양했다. 모자들에 담긴 정보도 윤 연구원은 놓치지 않았다.
정자관은 신분이 양반임을, 사모는 관직에 몸담고 있다는 것을, 중산모는 신식교육을 받았음을 말했다.
일가족의 생활을 상상하던 그의 눈에 남자들이 가리고 서 있는 병풍 그림이 들어왔다.
‘재력뿐만 아니라 신분까지 높아 보이는 집안에 있는 병풍이라면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그의 직관은 이렇게 속삭였다.
수리 받기 위해 한국 온 국보급 십장생도 병풍
미국 오리건대 박물관이 소장해온 십장생도 병풍이 수리를 받기 위해 10월 한국에 들어왔다.
병풍을 살펴보는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왼쪽)과
수리를 맡은 고창문화재보존연구소 송정주 소장. 양회성 기자
그런데 그림은 대부분이 가려져 있었다.
모자를 쓴 남성들의 머리 위로 하얀색 형체가, 어깨 사이로 검은색의 윤곽 정도가 보일 뿐이었다.
그가 하얀색의 형체로 ‘구름인 것 같다’고 추측하는 순간 새로운 정보가 떠올랐다.
‘그림의 위쪽에 구름을 주로 그려 넣는 것은 십장생도(十長生圖)다.’
미국 오리건대 박물관에 있는 ‘십장생도 병풍’이 떠올랐다.
2008년 경기도박물관 박본수 학예연구사가 ‘순종이 왕세자였던 당시 천연두 회복을 기념해
1880년에 만든 병풍’이라는 사실을 학계에 보고한 바 있었다.
○ 사진 속 주인공을 뒤쫓다
우선 두 그림이 같은지 확인이 필요했다.
흑백 사진에서 병풍이 보이는 부분을 확대해 오리건대 병풍과 비교했다.
사진 속에서 병풍을 가리고 있던 인물들을 컴퓨터 화상 상태에서 ‘떼어낸’ 뒤
오리건대 병풍 그림 앞에 세워 합성사진을 만들었다.
합성사진 속 남자들의 머리 위와 어깨 사이로 보이는 병풍 그림 윤곽이 흑백 사진과 정확히 일치했다.
같은 그림이었다.
이제 사진 속 주인공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인물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실마리는 똑같은 가족사진이 실린 ‘한국신문사진사’(1992년·열화당)에서 나왔다.
이 책에 실린 사진 위쪽에는 ‘大韓京城商業家朱公寅燮之家庭(대한경성상업가주공인섭지가정)’,
아래쪽에는 ‘朴氏夫人壽宴日撮影(박씨부인수연일촬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울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주인섭이라는 사람의 부인 60회 생일을 기념해 찍은 것이었다.
어느덧 5월이었다. 이제 이름과 직업만으로 주인섭이 누구인지 찾아야 했다.
윤 연구원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일주일을 꼬박 뒤져 신안 주씨 족보에서 주인섭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이를 바탕으로 ‘승정원일기’와 ‘궁정녹사(宮廷錄事)’에서도 주인섭의 행적을 찾아냈다.
그는 1839년생으로 42세 때인 1881년 무과에 합격하고
51세 때에는 오늘날 군단장급인 오위장(五衛將)에 올랐다. 그가 관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이유였다.
1890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인 박씨의 생일이 1846년 12월 25일이므로 사진 촬영 날짜를 1906∼1907년 겨울로 추정할 수 있었다.
사진에 ‘상업가’로 쓰인 데 따라 윤 연구원은 당시 신문 광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1901년 6월부터 1907년 1월까지 ‘황성신문’에 주인섭이 낸 광고가 여럿 있었다.
주로 책을 팔기 위해 낸 광고였다.
내용은 ‘흠흠신서(欽欽新書) 1질 4책 합 800매, 정가 금 1원 16전’과 같은 것이었다.
광고에는 초창기 서점인 서사(書肆) 근방에 지전(紙廛)과 자신의 집이 있다고도 나와 있었다.
고위 무관인 오위장을 지낸 주인섭은 종이와 그림을 함께 판매하던 지전과 서점인 서사를 경영했던 것이다.
광고에는 그의 점포 주소가 한성의 중서동 입구인 파조교 건너편으로 나왔다.
지금의 종로 3가 단성사가 있는 자리다.
1880년 궁중에서 만든 십장생도 병풍이 26년 뒤인 1906년 주인섭의 집 마당에 있었던 것은
그가 그림을 매매하는 지전을 운영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매물로 확보해 놓은 병풍을 부인 회갑연 때 펼쳐놓은 것이다.
○ 병풍은 왜 미국으로 건너갔나
오리건대 박물관은 1924년 서울의 테일러 상회를 통해 이 병풍을 구입한 계약서를 갖고 있다.
테일러 상회의 주인은 앨버트 테일러(1875∼1948)로, 서울 종로구 행촌동의 서양식 벽돌집
(지금도 남아 있으며 힌두어로 이상향을 뜻하는 딜큐샤로 불림)에 살았다.
유피아이(UPI) 통신원과 무역업을 겸했던 그는 3·1독립운동 때 갓 태어난 아들의 병원침대 밑에
독립선언서를 숨겨두었다가 세계에 타전한 주인공이었다.
조선의 독립운동을 돕다가 서대문형무소에 6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오리건대가 병풍을 구입한 1924년은 사진 촬영 시기로부터 18년이 지난 뒤로,
당시엔 주인섭의 손자인 주재관이 지물점을 운영했다.
윤 연구원은 “테일러가 주인섭의 가게에서 직접 병풍을 구매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했다.
관료였던 주인섭은 어떻게 상인이 되었을까.
그의 손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상 회화를 그린 화가로 알려진 주경(1905∼1979)의 증언이 단서였다.
주경은 자신의 조부에 대해 “관직에 있으면서 궁으로 들어가는 물품을 공급했다”고 말한 바 있다.
윤 연구원은 주경의 증언과 당시의 일반적인 지전 경영 방식을 토대로
주인섭이 관료에서 상인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추정했다.
주인섭은 전직 관료라는 이력을 바탕으로 궁중에 종이를 공급하고 지전 경영권을 획득했던 것이다.
그렇게 궁중을 드나들면서 궁중에서 제작된 병풍을 손에 넣었을 것으로 윤 연구원은 추정했다.
○ 그 후… 한국에 온 십장생도 병풍
오리건대 박물관이 소장해온 십장생도 병풍은 지금 한국에 돌아와 있다.
정부의 해외 문화재 보존 사업 일환으로 수리를 받기 위해 지난해 10월경 들어왔다.
경기 용인시에 있는 고창문화재보존연구소(소장 송정주)가
낡은 병풍의 틀을 보완하고 그림에 낀 먼지와 얼룩을 지우는 일을 맡았다.
내년 하반기 국내에 한 달 정도 공개된 뒤 오리건대 박물관으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다.
지난달 28일 십장생도 병풍이 있는 고창문화재연구소를 찾은 윤 연구원은 깨끗해진 그림을 만난 뒤
“생생한 채색과 힘 있는 필치가 틀림없는 궁중 병풍”이라며 감개무량해했다.
윤 연구원은 병풍을 찬찬히 살핀 뒤 “여러 개를 만드는 일반 기념병풍과 달리 돈을 댄 사람 이름 앞에
‘臣(신)’을 붙인 것으로 보아 신하들이 단 하나만 만들어 임금께 진상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십장생도 병풍의 수리를 책임진 송 소장은 “병풍을 해체해 보니 일본 방식으로 보수된 흔적이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수리를 받은 적이 없으니 한국에 있는 동안 일본식으로 고친 것 같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국내의 많은 문화재는 정확한 매매 계약이나 증여 증서가 없어 이를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역대 소장자를 표기해둔 부분을 훼손시킨 문화재도 경매나 매매를 통해 거래되는 실정이다.
이런 관행이 도난을 부추긴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문화재의 유통 경로를 명확히 아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윤 연구원의 작업이 흥미로운 발굴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011-11-24 ,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