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민영환 집터

Gijuzzang Dream 2011. 11. 26. 04:47

 

 

 

 

 

 충정공 민영환 집터

충절 정신이 깃든 옛 터전

 

 

 

“무릇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나 민영환은 죽음으로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구한말 대한제국의 존망이 풍전등화같이 가물거리던 1905년,

치욕적인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죽음으로 온몸을 던져 항거한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하기 전 유서에 남긴 글이다.

일제의 강압과 매국노 이완용 등의 합작으로 조선왕조 500년의 왕업이 끝나가던 시기였다.

 

서울 종로1가 사거리에서 오른편 인도를 따라 조계사 쪽으로 가노라면 다시 사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꿔 50여 미터, 인사동 입구에 이르면

오른편 1층에 어느 여행사 간판이 걸린 한미빌딩 앞마당에

'충정공 민영환 어른께서 자결하신 옛터'라는 기념물이 자리 잡고 있다.

자그마한 대리석 기단 위에 우리 한옥의 격자문양 문짝처럼 생긴 기념물이 서있고,

아래 부분에는 대나무 문양도 보인다. 이곳이 바로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한 이완식의 집이 있던 곳이다.

 

민영환이 자결한 옛터를 둘러보고 다시 종로구청 쪽으로 길을 건너 조계사로 가면 

조계사 입구 근처 길가에 작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에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집터’라고 쓰여 있다.

터는 지금의 조계사 경내에 있었던가 보다.

조금 더 걸어가면 우리나라 최초로 우편업무를 주관했던 ‘우정총국’ 옛 건물이 예스러운 모습으로 서있다.

그 뒤뜰로 돌아가면 조계사 옆으로 푸른 대나무가 즐비하고 그 앞에 동상 하나가 우뚝 서있다.

높직한 6각형 기단 위에 옛 관복차림의 동상이 있고,

기단 앞면에는 ‘계정 민충정공영환지상’이라고 한문으로 쓰여 있다. 바로 민영환의 동상인 것이다.

동상은 1957년 안국동 로터리에 세워졌는데 도로확장에 따라 율곡로 돈화문 앞으로 옮겨졌다가

2003년 현 위치로 다시 옮겨진 것이다.

 

 

충정공 민영환은 누구인가?


충정공 민영환은 1861년 한양 땅 지금의 종로구 견지동에서 출생,

1905년 11월 30일 망국의 의분으로 죽음을 택하여 자결하기까지

예조판서와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문신이다.

본관이 여흥민씨니 고종비 명성황후의 친정 문중인 왕가의 외척인 셈.

 

민영환은 1878년 대과에 급제하여 수찬 등 낮은 관리에서부터 시작했지만

동부승지와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빠른 승진을 거듭하였다.

임오군란 때 친부인 민겸호가 살해당하자 벼슬에서 내려와 삼년간 거상을 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대원군과 정적관계에 있던 민씨 권문세가에 속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후일 동학농민군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종의 각별한 신임으로 다시 벼슬에 복귀한 후

도승지와 홍문관부제학, 그리고 이조참판을 거쳐 한성우윤 등을 지냈다.

1896년엔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고종의 특명으로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밀약을 맺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외무대신 로마노프를 만나 협상을 벌였지만 성과는 신통치 못했다.

 

민영환은 이런 연유로 중국과 일본, 캐나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을 외유하며

서구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후에 그때의 경험을 ‘해천추범(海天秋帆)’이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귀국 후 의정부찬정과 군부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 다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직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그는 잦은 해외여행으로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게 되어 개화사상을 실천하려고 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제도를 모방,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신장을 꾀할 것을 고종에게 상소하기도 했다.

 

그는 구한말의 격변기에 개화파 정치인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그 물살을 헤쳐 나갔던 풍운아다. 그런가하면 명성황후의 친정조카라는 특별한 신분에

28세 젊은 나이에 요즘으로 치면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를 역임했던

고종황제의 측근이자 화려한 경력의 행운아이기도 했다.


“황제 폐하! 부당한 조약을 폐하시고 저 역적들을 처단하옵소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시종무관 민영환은 대궐 편전 앞에 엎드려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나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의정대신 조병세와 몇몇 대신들뿐이었다.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고종황제에게 아뢰고 일본을 성토하는 자리였다.

민영환 일행은 곧 일본 헌병들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다시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다음날 의정대신 조병세가 약을 먹고 자살했고, 민영환도 울분이 가득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나는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여러분을 도우리라."

 

국권을 상실한 조국에 대한 애통함을 못 이겨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이 남긴 유서의 한 구절이다.

그의 옷소매 속에서는 2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와 함께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독일 등의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가 나왔다.

1905년 11월 30일 아침이었다.

 

그가 자결한지 8개월 후 그의 피 묻은 옷이 보관되어 있던 그의 집 대청마루 밑에서

푸른 대나무 한 그루가 돋아났다.

돋아난 대나무에는 자결할 당시 그의 나이 45세와 같은 숫자인 45개의 잎이 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고 불렀다.

그의 자결이 알려지자 민심은 술렁였고 전국에서 독립운동의 거센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서울특별시, 하이서울뉴스, 숨겨진 명소(1)

- 이승철 시민기자, 2011.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