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문헌으로 보는 <단원 김홍도>

Gijuzzang Dream 2011. 11. 18. 03:01

 

 

 

 

 

 

 

 문헌으로 보는 김홍도

 

단원 김홍도는 풍속화가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산수화, 인물화, 영모화조, 사군자, 초상화, 기록화 등을 비롯해,

심지어 불화와 판화에 이르는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두루 명작을 남긴 대가였다.

 

 

 

 

 

 

<군선도>, 호암미술관 소장

 

 

 

 

<군선도> 각 세부 모습, 호암미술관 소장

 

국왕인 정조의 절대적인 후원이라는 최상의 건 속에서 30여 년 동안 중기차게 제작에 임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있는 작품의 수는 300점 정도가 된다.

그러나, 김홍도 자신을 그린 자화상 한점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외모는 물론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은 그의 지인들이 문헌에 표현한 김홍도를 통해 김홍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단원 김홍도는 누구인가?

 

     단원 김홍도는 영조 21년 1745년에 나서 정조 재위 24년을 거쳐

     순조 6년 1806년경까지 62년간 이 땅에 살았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성군절대주의'하의 평화로운 조선이었습니다.

     그가 담았던 세상이 좋았던 만큼 그의 그림도 낙천적인 분위기가 돌고

     조선의 산천, 조선 사람의 풍속이 그림의 주된 소재로 떠오를 만큼

     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뚜렷하였다.

     김홍도는 화원이었다.

     화원은 양반이 기피하는 중인들의 전문직종이었으며

     그 벼슬도 높아야 종 6품에 그쳤다. 그러나 김홍도는 예사 화원이  아니었다.

     정조는 30명이었던 화원 가운데서 뛰어난 10명을 따로 규장각에 소속시켜

     각별히 우대하였지만 김홍도는 이 규장각 화원의 정수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홍도는 이미 약관 21세에 <경현당수작도>라는 작품을 그렸고,

     29세, 37세 47세 세차례에 걸쳐서 나라의 화역 가운데 가장 중차대한 임무인

     국왕의 초상화 제작에 빠짐없이 참여하였고,

     44세때는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금강산의 절경을 그려와서 수십미터가 넘는 대작을 완성하였고

     46 세에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원 용주사의 후불탱을 주관하여 완성시키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그림들은 어떤 자격으로 그린 것이었을까?

     지금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단원 김홍도의 실상은

     '대조화원' 즉 국왕 직속으로 어명을 전적으로 대기하는 특급화원이 아니었나 추측한다.

 

이러한 추측은 다음에서 뒷받침된다.

 

 

 

김홍도 <삼세불>, 화성 용주사 대웅전 소장

 

 

정조 184권 100책 10갑이나 되는 방대한 문집 <홍재전서>를 남겼는데,

재위 마지막 해인 1800년 정초에 쓴 시 뒤에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았다.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30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화원은 관례로 새해 초에 병풍을 그려 바치는 규정이 있다.

  금년에 홍도는 웅화가 주로 붙인 주자의 시로 소재를 삼아 8폭 병풍을 그렸는데

  주자가 남긴 뜻을 깊이 얻은 작품이었다.

  이미 (김홍도가 화폭에 주자의) 원운시(를 썼으므로 나는 그에 더하여) 화운시를 썼는데,

  이를 늘 눈여겨 보아 감계의 자료로 삼으려 한다.

 

이처럼 김홍도는 국왕 정조의 지극한 아낌과 깊은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김홍도는 우리에게 낯익은 풍속화를 떠올리게 하는 서민적인 화가의 이미지가 있다.

 

백성들의 생활상을 익살과 해학으로 그려낸 화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해 준 화가로

'상당히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 이라는 식의 영상이 그것이다.

 

 <길쌈>

 

대학자 서유구(1764~1845)가 남긴 글에서 그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여관 앞 나그네 모양새며 때나무와 오이 파는 모습, 중과 여승, 불자들과 봇짐꾼이며 거렁뱅이 등등을  

  형형색색 각기  그 묘를 다하여 그렸다.

  부녀자와 어린아이들도 한번 화권을 펼치면 모두 턱이 빠지게 웃으니 고금의 화가 중에 없던 일이 

 

 

 

 

  김홍도의 <반차도>, 개인소장

 

대문장가 홍석주(1774-1842)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단원을 안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특히 그가  풍속화에 솜씨있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 몸이 돌아가심에 미쳐,

   해산도를 얻어보고서 비로소 그가 풍속화에만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님을 알았고,

   이제 그의 서첩을 얻어보고서 또 그 예술이 그림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알았다.

   글씨와 그림은 모두 바깥으로 드러나 보기 쉬운 것인데도

   오히려 이처럼 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아아. 사람을 안다고 어찌 쉽게 말할 수 있으리오.

 

김홍도는 이처럼 좋은 시절에 태어나 국왕으로부터 여염 백성에 이르는

각계 각층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행복한 화가였다.

그러므로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으며 또 그림 재주로 말미암아

화원에게는 드물주어지는 상당한 벼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단원도>, 개인소장

 

나라 안에서 으뜸 가는 화가 였던 만큼, 그 살림도 풍류 있는 생활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였다.

자신의 집을 그린 <단원도>와 평소의 생활을 묘사한 <포의 풍류도>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단원이 가난한 생활을 했다고 해한 것은 주로 다음의 유명한 일화 때문이었다 

단원의 아들 김양기의 친구 조희룡이 전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문자 그대로 믿어져 왔다.

 

 

 

   벼슬이 연풍 현감에 이르렀으나 집이 가난하여 혹은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이가 매화 한분을 파는데 매우 기이한 것이었지만 (매화와) 바꿀 돈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돈 3천냥을 예물로 보낸 이가 있었으니, 그림을 그려달라는 사례였다.                       

   곧 2천냥을 던져 매화를 바꾸고 800냥으로 술 몇 말을 사서 친구들을 모아

   매화 술자리를 열었으니 (남은) 200냥으로 쌀과 땔감 밑천을 삼았으나 하루 생계도 되지 않았다.

   그 사람됨이 오활하기가 이와 같았다.

 

 

이러한 통 크고 멋스러운 풍류는 듣는 이들에게 현실의 꾀죄죄함을 일순간에 잊게 하고

답답한 가슴까지 시원하게 풀어 주었던 것으로  여러 책에서 수차례 재인용되어 왔다.

 

 <단원도> 세부 , 개인소장

 

거문고를 타고 있는 단정한 모습의 김홍도

   김홍도는 잘 생긴 백석미남이었다.

   그는 풍채가 마치 신선같았다고 하며 키 또한 훤칠하게 컸다.

 

 

그의 스승 강세황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김홍도는 어릴 적부터 내 집에 드나들었는데 눈매가 맑고 용모가 빼어나서

  익힌 음식 먹는 세속 사람 같지 않고 (신선 같은) 기운이 있었다.

 

 

 

  <포의 풍류>, 개인소장

 

김홍도의 <포의풍류>는 여러 사람이 전하는 김홍도의 이미지와 들어맞아

김홍도의 자화상이 아닌가 추측되어진다.  

시인 홍신유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과연 속세 가운데의 사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이와 같은 고로 그림 역시 그와 같다.

   내가 그 인물과 그림을 사랑하고 사능 역시 나의 시와 글씨를 사랑하였다.

 

김홍도의 훤칠한 외모에 성품까지 보탠 찬사는 조희룡의 <호사외사>에서도 반복된다.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

 

 

화가 김홍도는 한 시대를 그려내었다.

그의 작품에는 그 자신의 생김생김 온화한 성품과 음악과 시·서·화에 걸친 교양이 보이고,

그가 살았던 고향의 모습이 엿보인다. 또 자신과 스승 강세황의 해학적인 기질이 배어 있고,

그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정조의 폭넓은 학식과 위민정치의 양상이 그대로 배어 있다.

 

- 오주석, <단원 김홍도의 생애와 예술> 발췌, 정리한 것

-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소식, 포토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