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특별전] 초상화이야기 8 - 자화상

Gijuzzang Dream 2011. 11. 17. 08:21

 

 

 

 

 

 

 

 

 초상화 이야기 - 자화상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린 자서전적인 그림이다.

단순히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기 보다는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내면의식을 드러내 보이는 그림이 바로 자화상이다.

 

이것은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보듯이

자신을 성찰하는 자아의식에서 시작한다.

우리나라 초상화 사상 자화상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등장했다고 볼 수 있으

기록상으로는 공민왕의 <조경자사도(照鏡自寫圖)>와 조선 초 김시습의 자화상 두 폭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자화상이 활발하게 그려지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문예부흥기인 18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조선 후기 화단의 선구자격인 윤두서는

18세기 남인 지식인들 사이에 자아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였던 인물이다.

그의 자화상에 그려진 부리부리한 눈매에 관자를 매섭게 노려보는 듯한 눈동자,

이것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아울러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말없는 외침이다.

한올 한올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수염과 꼭다문 입술은 자신의 외모와 표정,

얼굴의 대칭과 조화에 대한 법칙을 얼마나 깊이 연구하고 관찰하였나를 시범적으로 보여준다.

윤두서가 자신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게 된 데에는 그의 냉엄한 관찰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 관찰은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이자 선비 정신의 표출이라고 하겠다.

 

서양에서는 화가의 신분이 점차 상승하게 되고 근대적 자아 의식이 싹틈으로써

자화상이 활발하게 그려졌다. 르네상스 이후 18세기까지 많은 화가는

자신의 직업을 단순한 기능이 아닌 고귀하고 지적인 직업으로 여겼다. 

 

 윤두서 자화상

윤두서 1668-1715 /조선, 18세기 /국보 제 240호, 해남 녹우당

 

 

<윤두서 자화상>은 외형 묘사와 내면섹의 표현이 조화를 이룬 한국 초상화상 획기적인 작품이다.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으로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그이 자화상은 몸체가 생략된 파격적인 모습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사료집진속에 수록된 <윤두서 자화상> 도판이 공개되면서

애초에는 윤두서가 몸체를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실시한 과학적 조사로

이 초상에 대한 추가적인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동안 흑색도판으로만 볼 수 있었던 몸체의 표현,  

즉 도포의 옷깃이나 주름을 적외선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없어졌다고 추정했던 옷깃이나 주름을 묘사하는 요소가

현재까지도 <윤두서 자화상> 자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세황 자화상

강세황(1713-1791)/ 조선 / 1782

보물 제 590호 / 진주 강씨 백각공파 기탁

 

강세황은 소북 명문가 출신으로 조선 후기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문인화가이자 평론가로서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졌다.

우리나라 초상화에서는 보기 드문 자화상을 다수 남겼다.

특히 이 70세 상은 관모인 오사모와 야복에 해당하는 도포라는 예법에 어긋난 복식이 특징인데,

관복은 관직 생활을 야복은 산림에 대한 추구를 나타낸 것으로

출사와 은일간의 이중적 자의식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자화상에 자신의 세속적인 성공을 과시하거나 사회적 지적 자부심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이며, 낭만주의 시대 이후 화가들은

자신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별난 차림의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마치 조선 후기 강세황이 오사모를 쓰고 도포를 입은 채 자신의 모습 을 그린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는 자신이 탁월한 학식과 재능을 지녔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실제로 보잘 것 없는 외모를 그리기 보다는 자신이 희망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강세황은 자신이 그린 자화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임희수에게 가져가 가필하여 매우 흡사하게 그려주자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강세황의 강한 자아의식과 자기 표현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잘 일러준다.


 고희동 자화상

고희동(1886-1965) / 1915년 / 도쿄예술대학 박물관

 

춘곡 고희동은 도쿄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다.

역관집안 출신으로 한성법어학교 재학 당시 교사 에밀 마르텔(1874-1949)을 그리던

레오폴드 르미옹으로부터 처음 서양화를 접하게 된다. 

이 작품은 그가 유학생활 중 남긴 세점의 자화상 중 하나이다.

그는 스스로를 청색 두루마기에 정자관을 쓴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그렸다.

서구적인 기법과 재료를 사용하였지만, 소재는 전통에 기반을 두고 이어,

여전히 전통사회에 머물러 있는 작가의 내면의식을 보여주는 듯 하다.

 

 

 화실

장우성(1912-2005) / 1943년, 삼성미술관 리움

 

월전 장수성은 충주의 명문 한학자 집안 출신으로 유교적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는 그림과 신문학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19살부터

이당 김은호(1892-1979)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차례 입상을 하여 기성작가로서의 발판을 다졌고,

해방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대교수를 지내며,

일본적인 색채를 배제한 한국적인 그림을 추구하는 한국 전통화단의 선도적인 작가로 활동하였다.

이 작품에서 장우성은 자신의 화실에서 모델을 그리다가

파이프를 물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스스로를 근대적인 지식인으로 표현하였다.

 

 

 

이쾌대 자화상

1912-1953, 148×49㎝/ 이한우 소장

 

이 작품에서 그는 전통 복장인 청색 두루마기를 입고 서양식 모자를 쓴 채

팔레트, 붓은 든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배경에는 평화로운 한국의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다.

서양의 고전미술과 한국 전통회화의 특성이 어우러진,

한국의 서양화가로서의 당당한 자의식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그려진 자화상 중에서는

자기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으면서 뚜렷한 자의식을 드러낸 측면도 있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존재를 확인하고, 내면의식을 드러내려는 자화상은

근대화단에도 계속 이어졌다. 동경유학을 다녀온 근대 서화가들에게 자의식은

정자관을 쓴 모습 혹은 두루마기 입은 모습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화가로서 서구적인 양식과 전통적인 요소를 결합시켜 그들의 의지를 자화상에 담아냈다.

 

- <초상화의 비밀> 전시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소식, 포토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