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전] 초상화이야기 2 - 그림으로 보는 초상화 展
그림으로 보는 초상화 展
그림 1. 태조 어진 太祖1335-1408 御眞
조중묵(趙重默, ?-?), 박기준(朴基駿, ?-?), 백은배(白殷培, 1820-?), 유숙(劉淑, 1827-1873)
조선, 1872년, 비단에 채색, 218.0x150.0cm, 보물 제 931호, 전주시
1872년 4월 8일에 시작되어 5월 30일에 완성된 태조어진은
9월 20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7박 8일 만인 9월 27일에 전주에 도착하게 된다.
이 과정은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에 기록되어 있다.
숙종실록에서는 태조 어진의 복식이 청색인 것을 고려의 유습으로 해석하였다.
양탄자[彩氈]는 화면의 중간까지 높이 그려져
청색의 곤룡포, 적색의 어좌와 어울려 장엄하면서도 매우 화려하다.
이러한 특징과 어진 제작의 관행으로 볼 때
조선 초기에 형성된 태조 어진의 도상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 2. 오보이 초상(鼇拜 肖像)
淸, 18세기 중반-20세기초, 비단에 채색, 193.7x125.0cm
스미소니언 프리어새클러갤러리
오보이(鼇拜, 1615-1669)는 만주족 무관 출신이며,
순치제(順治帝, 1638-1661)가 임명한 4명의 보정대신(輔政大臣) 중 하나로
강희년간(康熙, 1662-1722) 초반에 어린 황제를 대신해 8년 동안 섭정을 하며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인물이다.
강희제는 황후의 숙부인 송고투(索額圖, 1636-1703)의 도움으로 그를 궁정에서 축출하여
숙청하고 친정을 시작하였다. 강희제는 후에 그의 개국공신으로서의 무공을 기려 1713년 그를 복권시켰다.
인물은 조복 차림으로 오른손 엄지에는 궁수를 상징하는 반지를 끼고 있는데,
이것은 무술로 이름난 개국공신임을 나타낸다.
그림 3.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德川家康 像)
일본, 에도(江戸) 초기
비단에 색, 교토대박물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는 에도막부의 창시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 사후, 그는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 전에서
도요토미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고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도쿠가와 300년의 기초를 세웠다.
사후에 도쇼다이곤겐(東照大權現)이라는 시호를 받고, 신격화되어 도쇼쿠(東照宮)에 모셔졌다.
인물은 궁궐 내의 운겐시키(繧繝錦: 붉은 바탕의 세로줄 사이에 꽃 · 마름모 등 색무늬를 짜 넣은 비단)가
둘러져 있는 다다미 위에 의관속대(衣冠束帶) 차림으로 앉아 있다.
배경에는 도쿠가와 가의 문장이 새겨진 수막이 드리워져 있고, 그 위로 금니로 채색된 구름이 피어있다.
수막 너머로 펼쳐진 산수화에는 사후에 그를 모신 사당인 도쇼구로 짐작되는 건물이 그려져 있다.
앞 마루에는 신사 앞에 배치하는 사자모양으로 된 한 쌍의 석상인 코마이누(狛犬)가 그려져
도쇼다이곤겐으로 신격화된 이에야스를 나타내고 있다.
그림 4. 윤두서 자화상(尹斗緖 自畵像)
조선, 18세기, 비단에 채색, 국보 제 240호, 해남 녹우당
<윤두서 자화상>은 외형 묘사와 내면세계의 표현이 조화를 이룬 한국 초상화상 획기적인 작품이다.
윤두서(尹斗緖, 1668-1715)는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으로,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서울로 옮겨 생활하다가 집안이 당쟁의 혼란 속에 휘말리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46세(1713년)에 고향 해남으로 낙향하여 48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2006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실시한 조사로 그동안 흑백도판으로만 볼 수 있었던
몸체의 표현 즉 도포의 옷깃이나 주름을 적외선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
이는 이미 없어졌다고 추정했던 옷깃이나 주름을 묘사하는 요소가
현재까지도 <윤두서 자화상> 자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 5. 이봉상 초상(李鳳祥 肖像)
조선, 18세기, 비단에 채색, 교토대박물관
이순신의 5대손인 이봉상(1676-1728) 초상은 무관의 기골 장대함과 용맹무쌍한 인상을 풍긴다.
1702년(숙종 28)무과에 급제하여, 1720년 경종이 즉위하고 포도대장 · 훈련원도정을 지냈다.
이듬해 삼도 수군통제사를 거쳐 총융사(摠戎使) ·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에는 형조참판으로서 훈련금위대장을 겸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켜 청주를 함락하였을 때
작은아버지 홍무(弘茂)와 함께 반란군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당시 충청감영에 들어온 이인좌가 그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였지만
충무가(忠武家)의 충의(忠義)를 내세워 끝내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어사 이도겸(李道謙)이 청주로부터 돌아와 그 순절을 전하자, 영조는 정려를 세우고
좌찬성에 추증하였으며, 후에 헌종이 청주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안면은 광대뼈 아래 음영을 가하고 있고, 곰보 자국이 보일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 6. 페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
네덜란드, 1617년, 폴게티박물관
안또니오 꼬레아로 널리 알려진 이 인물은 임진왜란 중에 왜병에 의해 강제로 끌러간
조선 평민 내지는 포로 병사로 인식되어왔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에도시대 일본에 와 있던 네덜란드 스펙스 무역 관장(체류시기 1606-1621)에게
발탁된 조선의 전직 관리였다고 한다.
화면 왼쪽 뒤에 그려진 작은 배 한 척은 이 인물이 멀리서 배를 타고 온 방문객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림의 연대를 안또니오 꼬레아가 피렌체에 도착했던 1600년대 초가 아니라
그림의 기법적인 측면에서 루벤스의 안트베르펜 시절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스펙스 수종이 네덜란드에 다녀온 것으로 추정되는 1615년경과
작품 제작연도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인물의 인상 착의를 살펴보면 탕건 유사한 준모(駿帽)를 쓴 다음 그 위에 투명한 사방관을 착용하고,
조선시대 관리들이 입던 16세기 철릭에 가까운 옷을 입고 있다.
당당한 풍채와 위엄과 덕망이 드러난 공수 자세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 관리였으리라는 인상을 준다.
눈썹과 눈사이의 미간이 움푹 패인 서양사람과는 달리 콧수염이 짧은 젊은이로 보이는
이 인물의 표현을 보면 까만 분필로 몸체와 얼굴의 형용을 한 다음,
양볼과 콧등, 입술 등을 붉은 색을 칠하여 생기를 불어넣고, 명암을 넣어 철릭의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
그림7. 황현 초상(黃玹 肖像)
1911년, 비단에 색, 보물 제 1494호, 개인소장
황현(1855-1910)은 본관은 장수,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으로,
조선 조의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의 후손이기도 하다.
1885년 장원급제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에 전남 구례에 은거하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데에 통분하여 절명시(絶命詩)를 짓고 음독 자결한 항일우국지사이다.
이 초상은 당시 교유하였던 석지 채용신이 그가 세상을 뜬 직후인 1911년,
1909년에 찍은 황현의 사진을 보고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사진 속 황현은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채 손에는 부채와 책을 들고 있는데,
이를 범본으로 하여 얼굴의 각도나 안경을 쓴 모습, 부채와 책을 든 모습은 비슷하나,
보다 큰 풍채에 유복을 입고 문인으로서 당당한 풍모가 엿보이는 모습을 띠고 있다.
초상화와 초상사진이 공존했던 시기를 산 채용신은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제작하면서도
사진에서 드러나지 않는 인물의 내면의 모습을 담아 표현하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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