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청주문화전자대전
디지털청주문화전자대전
<디지털청주문화대전>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편찬사업을 통해 완성된 2번째 디지털문화대전이다.
청주의 디지털백과사전으로 청주시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모든 정보를 집대성하여
인터넷을 통하여 누구든지 이를 쉽게 활용할 수 있게 제작되었다.
2004년 4월부터 2006년 1월까지 약 2년에 걸친 작업 기간을 통해
원고 집필, 멀티미디어 제작, 서비스 시스템 구축사업이 진행되었고,
총 2,360개의 항목, 원고지 12,500매, 사진과 동영상 등 총 3,620종의 멀티미디어 자료를 담고 있다.
2004년 4월 청주시와의 협약을 통해 추진된 이 사업은
2004년 8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기초자료 조사 연구 및 항목 개발사업 추진을 위해
청주시의 향토문화 자원을 조사, 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후 특별항목, 마을항목 현지조사 연구사업, 콘텐츠 제작사업, GIS 제작사업 서비스 시스템 구축이
수행되었다.
(1) 용두사지 철당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위치한 고려시대 사찰 용두사의 터에 있는 철당간.
철당간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있다.
팔도를 순례하던 운등사(雲燈寺) 주지 혜원(蕙園)스님이 청주 고을을 지나다가
청주 북쪽에 있는 율량(栗陽) 객방(客房)에서 하룻밤 쉬어가게 되었다.
자정이 넘자 큰 비가 내렸고 먼동이 틀 무렵 서쪽 하늘에 영롱한 무지개가 다리를 놓은
위로 부처님이 나타나 혜원스님에게 “용두사에 들어가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세워라”고 말했다.
비몽사몽간에 부처님의 현시(顯示)를 받은 혜원스님은 급히 행장을 수습하여 용두사 주지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도 혜원스님과 꼭 같은 현시를 부처님으로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두 스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님이 현시한 돛대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며칠 뒤 한 초립동이 나타나 목암산(牧岩山)에 올라가서 조용히 살펴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고 사라졌다.
혜원스님이 혼자 목암산에 올라가 초막을 짓고 청주 고을을 살펴보다가
어느 날 밤중에 고을이 북쪽으로 움직이는 착각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 길로 내려와 용두사 경내에 지주(支柱)를 모아 김예종에게 철당간을 세우도록 하였다.
청주는 풍수지리적 형국이 배가 지나가는 모양인 이른바 행주형(行舟形)이어서
주성(舟城)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청주가 행주형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심천(無心川)은 청주 시가지를 가운데 두고 석교초등학교 부근에서
동쪽은 서운동, 문화동, 우암동 쪽으로 직류(直流)하여 청주농고 앞에서 서류(西流)하였고,
서쪽은 대체로 현재의 하도(河道)에 따라 흘러 내덕동 부근에서 두 내(川)가 합류하였다고 전한다.
(지금은 1939년 및 1969년 무심천 제방공사에 의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청주의 지형은 마치 물 위에 배가 떠 있는 형상과 같아서 주성(舟城)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용두사지 철당간 / 철당기(龍頭寺 鐵幢竿 / 鐵幢記)
龍頭寺幢竿記 前翰林學生金遠撰兼書 鐫者孫錫」 早聆幢竿所製餝佛門之玉樓播盖由來」 下霄立之者旁發信心望之者心傾丹」 : 판독 - 허흥식 龍頭寺幢竿記 前翰林學生金遠撰兼書 鐫者孫錫」 早聆幢竿所製 餝佛門之玉標 幡盖由來」 粧寶殿之神旆 其狀也 鶴翔碧空 龍躍」 靑霄 立之者旁發信心 望之者必傾丹」 愿 固知伏魔鐵杖 拂賊霓旌 頃有堂大」 等金芮宗者也 州里豪家 鄕閭冠族 偶因染」 疾 忽約」 佛天 仰祈則敬造鐵幢 俯誓則莊嚴玉刹 然而」 難停逝水 易沒黃泉 已間數歲遲延 隔時」 容易 於時從兄堂大等」 金希一等 彼爲還願 此繼頹繹 遂令鑄」 成三十段之鐵筒 連立六十尺之幢柱 穿雲」 捧日 貫霧倚空 魯氏雲梯 難攀龍盖 甘」 寧錦纜 未敵璅繩 可謂奉往心深 興亡情切」 植金剛之不朽 營玉刹之無窮 僕者膠柱頑」 流 剋舟膚物 忽蒙勸我 聊表短章 其詞曰」 幢竿始立 天半可及 巧成物像 莊嚴佛法 兄」 弟兩家 合脩善業 鑄之植之 无窮永劫」 當寺令釋紬大德 檀越兼令金希一正朝 金守▨」 金釋希大 金寬謙 監司上和尙信學▨」 前侍郎孫熙大 前兵部卿慶柱洪大 學院卿韓明」 寔柰末 前司倉慶奇俊大舍 學院郎中孫仁謙 鑄大▨」 維峻豊三年太歲壬戌二月二十九日鑄成」 : 판독 - 정병삼
粧寶殿之神旆其猶也鶴翔碧空龍躍」
愿固知伏魔鐵杖挫賊霓旌頃有堂大」
等金芮宗者也州里豪族鄕閭冠族偶因染」
疾忽約」
佛天仰祈則敬造鐵幢俯擔則莊嚴玉刹然而」
難停逝水易沒黃泉已間數歲遲延隔時」
容易於時從兄堂大等正朝賜丹銀魚袋」
金介一等彼爲還願此繼頹繹令鑄」
成三十段之鐵筒連立六十尺之幢柱穿雲」
捧日貫霧倚空魯氏雲梯難攀龍盖甘」
寧錦纜永敞璅繩可謂奉仁心深典亡情切」
植金剛之不朽營玉刹之無窮僕者膠柱頑」
流剋舟膚物忽蒙勸我聊表短章其詞曰」
幢竿始立天半可壓巧成物像莊嚴佛法兄」
弟兩家令脩善業鑄之植之无窮永겁劫」
當寺令釋紬大德 檀越兼令金希一正朝金守▨」
金釋同釋希▨ 金寬謙大等監司上和尙信學▨▨」
前侍郎孫熙 前兵部卿慶柱洪大學院卿韓明」
寔柰前司倉慶 奇俊大舍學院郎中孫仁謙鑄▨▨大」
維峻豊三年太歲壬戌二月二十九日鑄成」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용두사철당간기(龍頭寺 鐵幢竿記)
전 한림학생(翰林學生) 김원(金遠)이 짓고 아울러 썼으며, 새긴 이는 손석(孫錫)이다. 일찍이 듣건데 당간(幢竿: 장대를 높이 세워 깃발을 매다는 것으로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찰이나 법당 앞에 세움)이 만들어진 바는 佛門을 꾸미는 玉같은 표지이며, 번개(幡蓋: 깃발로서 불보살의 위덕을 나타내는 장엄 도구)의 유래는 법당을 장엄하는 신령스러운 깃발이라 하였다.
그 모양은 학이 창공을 날아오르고 용이 푸른 하늘을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 세운 사람은 크게 신심을 일으키고, 바라보는 사람은 반드시 충정의 정성을 기울일 것이니, 진실로 마귀를 항복받는 쇠지팡이요 도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임을 알겠다.
근래에 당대등(堂大等: 고려 향리 중의 최고위직, 983년에 戶長으로 바뀜) 김예종(金芮宗)이라는 이가 있으니, 고을의 큰가문이요 지방의 손꼽히는 집안이다. 우연히 병에 걸려 문득 부처와 하늘에 약속하기를, 우러러 철당간을 삼가 만들기를 빌고, 엎드려 훌륭한 사찰을 장엄할 것을 맹서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멈추기 어렵고 죽음에 빠지기는 쉬워 그 사이에 몇 년이 늦어지고 때는 쉽게멀어졌다. 이때에 종형인 당대등 김희일(金希一) 등이 저쪽에서 돌이킨 서원이 되게 하고 이쪽에서 끊어진 인연을 이어 마침내 30段의 철통을 주조케 하고 이어 60尺의 당주(幢柱)를 세웠다.
구름을 뚫고 해를 받들고 안개를 관통하여 공중에 기대어, 노반(盧班: 수레에 사다리를 달아 성을 공격하는 도구를 만든 사람)의 사다리로도 용개(龍蓋)에 오르기 어렵고 감녕(甘寧: 吳나라 사람으로 호사를 즐겨 비단으로 배를 묶음)의 비단 밧줄로도 옥돌줄을 당하기 어렵겠다. 죽은 이를 받드는 마음이 깊고, 망한 이를 일으키는 정이 간절하여, 금강의 썩지않음을 심고 옥찰(玉刹)의 무궁함을 영위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아교처럼 완고한 사람으로 어리석고 천박한데 문득 나에게 권유함을 입게 되어 겨우 짧은 글을 나타낸다.
사(詞)에 이르기를, 당간이 처음서서 하늘 가운데에 미치니 공교롭게 물건의 모양을 이루어 불법을 장엄하도다. 형제간의 두 집이 합쳐 선업을 닦아 주조하고 세우니 영겁토록 무궁하리라.
이 절(龍頭寺)의 영(令)은 석주(釋紬) 대덕(大德) 단월(檀越) 겸 영(令)은 김희일(金希一) 정조(正朝), 김수▨(金守▨), 김석희(金釋希) 대등(大等 : 고려 향리의 유력자 직임으로 당대등에 이은 둘째 직책. 성종 때 副戶長으로 이름이 바뀜), 김관겸(金寬謙) 감사(監司)는 상화상(上和尙) 신학(信學), ▨▨, 전시랑(前侍郎) 손희(孫熙) 대등, 전병부경(前兵部卿) 경주흥(慶柱洪) 대등, 학원경(學院卿) 한명식(韓明寔) 나말(柰末 : 나마(奈麻), 신라의 17관등의 11관등), 전사창(前司倉) 경기준(慶奇俊) 대사(大舍 : 신라 17관등의 12관등), 학원낭중(學院郎中) 손인겸(孫仁謙) 주대▨▨(鑄大▨▨)
준풍(峻豊 : 고려 광종의 연호, 960~963) 3년(962, 광종 13) 임술년 2월 29일에 주조하여 완성함. - 정병삼 해석 -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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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경위]
원래 건립한 당간이 남아있는 드문 예로서 현재 원 위치에 보존되어 있는데 30단 중 현재 20단이 남아 있다. 당간은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남은 당간 전체의 높이는 12.7m이며, 당간의 둘레에 24줄로 새긴 글자의 크기는 2㎝ 정도이다.
김원(金遠)이 짓고 해서로 써서 손석(孫錫)이 새겼는데
밑에서부터 세 번째 철통에 철당간을 만들게 된 내력이 양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주성(鑄成) 기록에 의하면 이 철당간은 준풍(峻豊) 3년(962년, 고려 광종 13)에 건립되었다.
30단(段)의 철통(鐵桶)으로 60척(尺)의 높이로 건립되었음이 주성기에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당간의 의미를 설명하고
당시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호족(豪族)세력인 당대등(堂大等: 戶長) 김예종(金芮宗)이 병이 들어
당간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죽고 그 종형(從兄)되는 김희일(金希一)이 만들었음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사(詞)에 이어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시주 명단을 열거하고
건립일(維峻豊三年太歲壬戌二月二十九日鑄成)을 명시하면서 광종의 연호인 준풍(峻豊)을 명기하였다.
시주들이 지방 유력자들로 구성되어 향리직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형태]
현재 철당간의 높이는 12.7m로 충청남도 공주시 갑사에 있는 철당간,
경기도 안성시에 남아 있는 칠장사 철당간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제 당간이다.
철제당간을 받치고 있는 석조(石造)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으며,
양쪽 밖으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단순한 기둥 형태이다.
또한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당간지주의 윗부분을 고리로 연결시켰다.
철통은 현재 20단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고려시대 대표적인 사찰인 용두사 터에 전해오는 유물이지만
현재는 청주시내의 중심지인 상당구 남문로 2가 48-19번지에 위치한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참고문헌]
• 『청주시문화유적(淸州市文化遺蹟)』(청주대학교 박물관, 1991)
• 『청주시지(淸州市誌)』(충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청주시, 1997)
• 『문화유적 분포지도』- 청주시(충북대학교 박물관·청주시, 1998)
• 『譯註 羅末麗初金石文』上下, 한국역사연구회, 1996, 혜안
• 『韓國金石全文』中世上, 허흥식, 1984, 아세아문화사
• 「龍頭寺幢竿說話考」『人文科學』12, 최진원, 1983, 성균관대학교
• 『韓國金石文大系』, 조동원, 1981, 원광대학교출판부 • 『海東金石苑』上, 유연정, 1976, 亞細亞文化社 • 「<龍頭寺鐵幢記〉에 보이는 高麗初 淸州豪族」『湖西文化硏究』14, 이혜선, 1996, 충북대학교 • 「忠北 地域 幢竿과 幢竿支柱 考察」『博物館誌』5, 엄기표, 1996, 충청전문대학 박물관 • 「충북지역 당간과 당간지주」『충북의 석조미술』, 엄기표, 2000, 충북학연구소 • 『韓國中世度量衡制硏究』, 이종봉, 2001, 일조각 •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엄기표, 2004, 학연문화사 |
「영문본문」
When there is an event in a temple, they hang a flag called Dang at the entrance of the temple. Two posts support the flagpole. Nammunno, Sangdang-gu in Cheongju-si City where the flagpole stands is the place where Yongdusa Temple used to be situated. The temple was founded in the 13th year (962) of King Gwangjong in Goryeo Era, but it was shut because of frequent warfare and fighting late in Goryeo Era. Now the road has changed to the busiest one in the city of Cheongju. The flagpole remains as it used to be with the supporting stone and two posts. The two posts have protruding vertical lines in the middle of the outside face, making some variation on the monotonous surface. Between the two pasts, twenty cylinder-like iron tubs gear into each other of, making up the flagpole. There is a fastening device like a crossbar at the top of the stone posts to firmly fasten the flagpole. Especially, there is a record about the motivation and process of building iron flagpole at the face of the third iron tub. It says that they cumulated thirty iron tubs at first. The flagpole was set up together with the temple in the 13th year (962) of King Gwangjong in Goryeo. It is considered as a precious relic because we can know the exact time. The case that flagpoles remain is rare in Korea and we can see flagpoles only at three places of Gabsa Temple in Gongju, Chiljangsa Temple in Anseong, and here. So this is one of rare and precious flagpoles. There is a legend concerning this relic in Cheongju. The story is as follows. From the old times, the people in Cheongju suffered from a lot of disasters due to floods. Then an astrologer said that they would be able to avoid the disaster if they built a large mast, because the area would take a ship-like shape. After all, they say, the area avoided the disaster by building a flagpole as a mast. From this, Cheongju came to be named Juseong (Ship Castle).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2)세계기록유산 직지(直指)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비롯한 금속활자본을
직접 인쇄한 곳이 바로 청주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창조정신의 집결체이며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고시키는 우리 민족의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 우리 전통문화를 만방에 빛낸 세계기록유산 『직지』
[직지의 일반개념 및 정의]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줄여서『직지』는 청주흥덕사에서 1377년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의 이름이다.
원 제목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이 책의 이름을 줄여서『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직지심체(直指心體)』, 『직지』 등으로 부르고 있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주최한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책' 전시회에
『직지심경(直指心經)』이라 소개되면서 한때 잘못 불리기도 하였다.
불교에서 '경(經)'은 불교경전을 뜻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불경이 아니고 교육용 서적이므로 『직지심경(直指心經)』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렇게 볼 때 판심제(版心題)에 나타나 있는 객관적인 뜻을 포괄하면서 간략하게 줄인
『직지』가 일반적인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금속활자본 『직지』는 고려 우왕 3년(1377)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하였으며,
본래 상·하 2권이었으나, 현재 상권은 전해지지 않고
첫째 장이 떨어져나가고 없는 하권 1책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Manuscrit Orianteaux)에 소장되어 있다.
[직지의 가치]
『직지』는 비자본재이다. 간단히 말해서 문화자산이다.
『직지』는 지극한 정성, 욕망의 절제로서의 보시(布施), 경건함, 기원(祈願), 겸손, 자비(慈悲),
그리고 깨달음 등의 정신문화의 측면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대량생산이라는 상업화의 자본주의적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직지』는 존재하고 있다.
문화사적으로 보면『직지』는 금속활자라는 진품성과 불교문화의 분위기(aura)가 그 정수(精髓)였다.
고려 말의 고승 백운화상의 뜻을 ‘널리 오래’전달하기 위하여『직지』가 간행되었다.
금속활자본『직지』는, 그 내용보다는 인쇄의 형식 때문에 중요하다.
금속활자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간기인 ‘鑄字印施’의 해석은
1) 주자하여 인쇄했다는 뜻과 2) 주자된 글자로 인쇄했다는 뜻의 두 해석이 가능하다.
청주의 흥덕사지(興德寺址)에서 주자하여 인쇄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흥덕사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를 주조했다는 뜻이 되므로
세계문화사에 빛나는 자산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이미 주조되어 있는 활자를 이용했더라도『직지』의 문화사적 가치는 반감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이미 사용된 활자나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활자로 인쇄했다면
한국의 인쇄문화가 융성했음을 증명하면서, 『직지』가 존재하는 현실적 징표가 되는 것이다.
[금속활자본 직지의 간행]
한국문화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화재나 문화자산은 많지 않다.
그 중에서 『직지』는 세계문화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한국 민족문화의 빛나는 자산이다.
『직지』가 중요한 것은 교육서이자 불교문화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다는 데 있다. 따라서 금속활자본『직지』를 누가 어떻게 간행했느냐가 중요하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직지』가 간행된 것은 1377년이다.
청주목(淸州牧) 밖에 있는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배포하였으며
연화문인(緣化門人) 석찬(釋璨), 달잠(達湛), 시주 비구니 묘덕(妙德)이라는 간행 기록이 있다.
백운화상의 제자이면서 시자(侍者)였던 석찬은
스승이 편집한『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을 금속활자로 인쇄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비구니 묘덕은 흥덕사 금속활자본과 취암사 목판본의『직지』간행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다.
석찬과 달잠은 모두 백운화상의 제자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펴기 위해
묘덕의 시주를 받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직지』를 간행하게 되었다.
[직지의 구성]
『직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수식이 따라 붙는다.
『직지』는 본래 상 · 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흥덕사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은 현재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 1책(총 38장)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전한다.
경기도 여주 취암사에서 간행된『직지』목판본은 상 · 하권이 완전한 1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및 영광 불갑사에 소장하고 있다.
금속활자본만으로는 알 수 없는 체제나 내용을 목판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직지』는 석옥선사가 전해준『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에
『선문염송(禪門拈頌)』과 『치문경훈(緇門警訓)』 등에서 그 내용을 보완하고
과거 7불(佛)과 인도 28조사(祖師), 중국 110선사 등 145가(家)의 법어를 가려 뽑아
307편에 이르는 게 · 송 · 찬 · 가 · 명 · 서 · 법어 · 문답 등을 수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선사로는 유일하게 신라 대령선사(大領禪師)가 하권에 수록되어 있다.
『직지』의 중심 주제는 〈직지심체〉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불도를 깨닫는 명구(名句)에서 비롯된 것으로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직지의 편찬자]
『직지』를 편저한 백운화상의 호는 백운이고, 법명은 경한(景閑)[1298~1374]이다.
백운은 충렬왕 24년(1298)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출생하였다.
충정왕 3년 54세(1351) 5월에 중국 호주의 석옥(石屋)선사에게 불법을 구하였다.
석옥선사로부터『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1권을 전해 받고 불도를 닦아,
공민왕 2년 56세(1353) 정월에 마음을 밝혀 불도를 체득하였다.
또한 백운은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에 황해도 해주의 안국사(安國寺)와 신광사 등에서 주지를 지내고,
후진 양성에 힘쓰다 공민왕 21년 75세(1372)에 성불산 성불사에서
145가(家)의 법어를 가려 상·하 두 권으로『직지』를 편집하여 저술하였으며,
공민왕 23년 77세(1374)에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入寂)했다.
[직지의 프랑스 소장 경위]
한국인들은 『직지』가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허탈해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세계문화사에 길이 빛날『직지』가 한국에 없다는 이 상실감은
그러나『직지』를 사랑하고 아끼는 운동으로 드러나면서『직지』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직지』는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소장되어 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가 우리나라에 근무하면서
고서 및 각종 문화재를 수집하였는데,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직지』의 수집 경로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이 1901년에 저술한『조선서지(朝鮮書誌)』의 보유판에
게재된 것으로 보아 1900년경에는 이미 수집되었으며, 1911년 드루오호텔에서 경매되었다.
쁠랑시가 우리나라에서 수집해간 대부분의 고서는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하였다.
그러나 금속활자본 『직지』는
앙리 베베르(Henri Vever)[1854~1943]가 180프랑에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1950년경에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흥덕사지(興德寺址) 발굴]
흥덕사지(興德寺址)는
충청북도 청주시 운천동에 있는 통일 신라시대의 절터로 사적 제3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홍덕사는 우왕 3년(1377)에 백운화상이 초록한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주자하고 발간한 절이다.
오랫동안 흥덕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으나 그 위치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국토지개발공사에서 1984년부터 청주시 운천동에 택지를 조성하면서
한 이름 없는 절터가 발견되었다. 곧 충청북도와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을 하게 되었는데
1985년 긴급구제 발굴을 할 때 출토된 ‘서원부흥덕사(西原府興德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쇠북과
‘황통십년흥덕사(皇統十年興德寺)’라고 새겨진 큰 그릇 뚜껑을 땅 속에서 찾게 되어
이 곳이 흥덕사지(興德寺址)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절터는 택지를 조성하면서 반파되어 발굴 결과 금당지, 강당지, 회랑지의 유구만 확인되었다.
이를 토대로 흥덕사의 규모를 재구한다면 남북 중심축에 중문·탑과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
그리고 정면 4칸, 측면 2칸의 강당이 놓이고
금당의 좌우에 정면 12칸, 측면 1칸의 동서회랑이 배치된 단탑 가람으로 추정된다.
[직지의 재발견과 공인]
『직지』는 1901년 모리스 꾸랑이 저술한『조선서지(朝鮮書誌)』보유판에 수록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실물과 내용은 확인되지 않다가
1972년 "세계 도서의 해(International Book Year)"를 기념하기 위한 '책' 전시회에 출품됨으로써
세계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직지』의 간행 장소인 청주 흥덕사도 1985년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됨으로써
오늘날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번지임이 확인되었다.
이를 계기로 1986년 충청북도 주최로 열린 〈청주 흥덕사지 학술회의〉를 통해
흥덕사가 학계에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1992년에는 흥덕사지(興德寺址)의 정비와 함께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개관하였다.
2000년에는 『직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직지』를 등재시킴으로써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그 의미를 다시 공인받게 되었다.
[금속활자본 직지의 서지적 특징]
금속활자본『직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서지적 특징이 있다.
『직지』 하권의 판식(版式)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고, 계선이 있다.
반엽(半葉)의 행자수(行字數)는 11행 18~20자이며, 주문(註文)은 쌍행이다.
판심에 어미는 없고, 판심제는 「직지(直指)」이며,
권말제(卷末題)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책의 크기는 24.6 17.0㎝이며, 다섯 구멍을 뚫고 붉은 실로 꿰맨 선장본(線裝本)이다.
종이는 전통한지에 인쇄되었으며, 전체가 상당한 솜씨로 배접되어 있다.
표지는 능화판 문양과 종이로 보아 배접하면서 조선 후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표지에 “1377년이라는 연대와 함께 주조된 활자로 인쇄되었다고 알려진
가장 오래된 한국 인쇄본이다”라는 모리스 꾸랑의 기록이 있다.
종이는 닥나무 종이이다. 오랜 기간에 비하여 종이색이 그렇게 많이 퇴색되지는 않았다.
흰빛깔이고 아주 얇다. 배접할 때 다리미질을 하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좀 미끄러운 감이 있다.
인쇄상태는 생각보다 아주 양호하다. 먹 빛깔은 진하지 않다.
책장마다 찍혀진 먹색의 농후도가 거의 같다. 특히 첫장이나 마지막장에 찍혀진 먹색이 비슷하다.
금속활자본『직지』에 나타나는 금속활자본으로서의 특징은
1) 본문의 항렬(行列)이 바르지 않고 비뚤어져 있으며,
그 중에는 글자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경우도 있다,
2) 인출(印出)된 자면(字面)에 나타나는 묵색(墨色)의 농도 차이가 심하고
반점(斑點)이 나타나 있는 경우가 많다,
3) 일(日)이나 일(一) 등의 글자는 아예 거꾸로 식자된 경우도 있으며,
어떤 글자는 인쇄 도중에 탈락된 경우도 있다,
4) 동일면에서 동일한 활자의 같은 글자모양이 보이지 않으나,
동일한 활자가 다른 장에서는 사용되고 있다,
5) 글자의 획에 너덜이와 티가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는 점 등이다.
[직지의 문화사적 의미]
『직지』의 문화사적 의미는 여러 가지다.
인류문화사에서 『직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교육과 정보의 공유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인류는 의사 전달을 위해 네 번에 걸친 정보혁명을 거쳐 발전하였다.
첫째로는 몸짓이나 소리에 약속된 의미를 부여하여 의사를 전달한 것을 말할 수 있으며,
둘째는 각종 부호나 문자를 사용하여 기록하기 시작했다.
셋째로는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책을 간행한 일이며,
넷째로 컴퓨터와 사이버 체제의 확립이다.
이 가운데 가장 위대한 혁명은 금속활자의 발명을 꼽고 있다.
그 이유는 활자를 이용하여 책을 간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정보의 대량 전달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화의 가장 핵심인 금속활자의 발명이 13세기 초에 한국에서 일어났다.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로 인쇄한 기록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와 『상정예문(詳定禮文)』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는 1239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 전하는데,
여기에 당시 최씨 무신정권의 우두머리였던 최이(崔怡)가
원래 금속활자본을 목판으로 다시 새긴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것으로 보아 1239년 이전에 이미 금속활자 인쇄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규보(李奎報)가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에 저술한『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의하면,
『상정예문(詳定禮文)』28부를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각 관서에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안타깝게도 기록으로만 전할 뿐 실물이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려 우왕 3년(1377) 7월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직지』는
실물이 전하며, 한국인이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를 발명한 슬기로운 문화민족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직지』는 인류문명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의 소산인 동시에 오늘날의 인터넷 문화를 연 것이다.
[금속활자본 직지의 재생산]
『직지』의 정신과 의미를 재생산하기 위하여 청주시민과 청주시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청주시에서는 고인쇄문화 전수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기능보유자 동림 오국진(吳國鎭) 선생으로 하여금
고인쇄문화 및 금속활자와 관련된 후계자 양성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기관이다.
오국진 선생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 달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우송(又松) 이상복 문하에서 금석문과 서예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성오 신학균 선생 문하에서 각자술을 익혔으며 철제 오옥진 선생으로부터 서각기법을 전수 받아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목판을 복원하는 등
그 동안 서예와 서각(書刻)을 연구해 왔다. 또한 주물공장에서 주물의 기능을 익히기도 하였다.
오국진은 이러한 기초를 바탕으로 1985년 무렵부터 금속활자 복원의 기초를 쌓고 기능을 익혀
금속활자를 주조하게 되었다. 그 후,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직지』의 첫째 장을 복원한 것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의 활자를 복원하는 등 고려에서 조선 초기의 금속활자 제작방법을 실증적으로 재현해 내고 있는
유일한 기능자로 조사되어 1996년 2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 101호 금속활자장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충북 청주시 소재의 고인쇄문화공방과 고인쇄문화전수관을 함께 운영하면서
금속활자와 관련된 후계자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오권진, 임인호, 맹창균 등의 이수자들에게 금속활자 제조기법, 보필작업, 밀납새김, 활자보관함 제작 등의
실습을 지도하고 있으며, 또한 금속활자장 기능의 보존과 육성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직지오페라]
『직지』를 예술로 재창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97년부터 충북의 예술가들을 중심으로『직지』의 예술화가 논의되었으며,
그 형식적 결과로 오페라를 만들기로 했다.
강태재, 윤석위, 도종환[1954~ ], 김승환, 남기헌, 송재봉 등의 발의로
청주대학교 교수이자 충북오페라단 단장인 김태훈(金泰勳)교수, 성악가 이상현, 성악가 강진모를 중심으로
일이 진행되었으며 대본은 김승환 교수와 김민형 시인이 공동 창작했고
작곡은 중앙대학교의 박범훈 교수가 맡았다.
제 1막은 「청산별곡」과 「머나먼 이국의 하늘에」이며, 제 2막은 「가시리 가시리잇고」이다.
제 3막은 「진흙 속에 피는 연꽃」이며, 제 4막은 「직지」이다.
오페라의 음악은 한국전통의 가락을 중심으로 하는 쉽고도 아름다운 화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음악 고유의 선법과 장단을 사용해 풍부한 한국적 색채와 익숙한 국악적 선율,
「가시리」와 「청산별곡」 등 가사만 전해지는 고려가요 등을 활용한 아리아 등이 색다른 오페라이다.
초연은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 개막을 전후한 2000년 9월 22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었으며,
2000년 11월 9일에서 12일까지 청주예술의 전당 대공연장에서 공연되었다.
「직지」오페라는
‘오페라 전체를 국악으로 연주하겠다는 착상과 시도가 지방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국 오페라에 새 장을 열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직지 오페라 추진위원회는 이 같은 성공에 힘입어 작품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고
청주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이자 세계적인 작품으로 키워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직지찾기 운동]
『직지』찾기 시민운동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청주시민회(현재의 참여자치연대)는
『직지』를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승화시켜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광범위한 시민운동을 벌여 나갔다.
『직지』찾기 운동은 청주지역의 고인쇄 출판문화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과
세계기록유산『직지』에 대한 보전운동을 통하여
역사적·문화적으로 청주지역의 찬란했던 고인쇄 출판문화를 재인식하고
우리나라 인쇄출판문화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홍보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운동이었다.
『직지』찾기운동은 1996년 5월 유네스코 충북협회의〈유네스코와 고인쇄문화〉학술세미나의 토론회에서
청주지역은 고인쇄출판문화의 도시이며, 『직지』야말로 세계적인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인 만큼
국내에 어딘가에 있을『직지』의 원본을 찾도록 노력하고 이를 널리 홍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져 시작됐다.
그것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며 세계기록유산인『직지』가
청주의 흥덕사에서 인출되었으나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하권 1권만 유일본으로 전래되고 있을 뿐,
국내 어디에도 소장된 곳이 없다는 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 후, 『직지』찾기와 함께
청주를 고인쇄출판문화의 세계적 명승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새로운 취지 아래
각 기관과 단체들은 물론 각계, 각층 인사들이 동참한 가운데 『직지』찾기 운동이 전개되어 오고 있다.
「직지」찾기 운동은 1997년 3월에 청주시민회에서 처음 시작한 이래,
1998년 10월부터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직지』찾기 전담반을 두고
전국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활동을 펴고 있다.
『직지』찾기 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이 운동에 동참하는 단체들도 차츰 늘어나
지금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또한, 『직지』가 해외에 유출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1995년부터는 해외에까지『직지』찾기운동의 대상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직지』 금속활자본은 찾지 못하고 있다.
『직지』찾기 운동은 우리 조상들의 소중한 고인쇄출판문화 유산인
삼국시대의 목판본『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인『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상정예문(詳定禮文)』,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 등의 원본을 찾는 운동으로도 확대·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자본 직지]
『직지』는 문화자본이면서 동시에 문화자산이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즉 『직지』는 1972년에 그 실체가 확인되었다.
그것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책의 해〉에 출품되면서부터다.
그러던 중 1984년,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지(興德寺址)가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로부터 청주는『직지』의 문화적 가치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그에 따른 특별하고도 정성스런 노력이 뒤따랐다.
청주시민들은 세계적 문화자산의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대내외적으로 많은 일을 추진했다.
그 결과 2001년 9월 4일,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가 하면
2004년에는 유네스코가 직지상 제정을 승인하였다.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만든 개념이다.
경제자본, 상징자본(symbolic capital), 사회자본(social capital)과 함께
중요한 자본의 개념으로 설정한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것은 사회화 과정 속에서 획득한 오랜 특성과 습관(체화된 문화자본),
가치 있는 문화적 대상물의 축적(객관적 문화자본),
그리고 공식적인 교육자격과 훈련(제도적 문화자본)을 포함한다.
이 중에서 『직지』와 같은 유형물은 객관적 문화자본이다.
이 객관적 문화자본은 문화적 가치를 축적해 나가는 과정과 사용하는 과정으로 나뉜다.
현재『직지』는 문화자본을 축적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청주인들의 몸에『직지』를 기억시켜서 체화(embodied)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면에 체화되어서 습관으로 드러난다.
이 때의 습관은 버릇이 아니라 자동반사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청주 =『직지』’의 자동반사적 등식화는 1990년대 이후에 급속히 강화되는 현상이다.
이 역시 그 자체의 진위나 가치판단과는 달리 문화 주체인 청주인들의 의식변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비교문화사적 관점에서의 직지]
『직지』를 비교문화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 후기의 사회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려 후기는 원나라의 오랜 지배 하에서 민족문화가 황폐화되었던 시기다.
그리고 성리학(性理學)의 대두로 인하여 불교는 역사의 주도권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중세 유럽과는 달리 자본주의나 상업화의 징후(徵候) 또한 보이지 않는다.
이 시대의 금속활자 발명과 산업은 별개였다.
반면 구텐베르크 활자는 유럽 문명의 전기(轉機)였으면서 산업화의 신호탄이었다.
특히 구텐베르크 활자는 근대화의 원동력인 부문형 생산과
대량생산의 규범과 형태를 띠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구텐베르크 활자는 ‘아름다운 예술성과 정교하다는 점,
그리고 근대의 과학화와 산업화라는 거대한 사회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중세 한국의 금속활자는 산업과는 별개로 정신적인 차원에서 주조된 정신문화적인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산업적 관점에서 고려 금속활자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대량복제의 상업성이 목적이 아니라
금속활자라는 '진품성과 유일무이한 현존성의 분위기(aura)'가『직지』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시대적으로 볼 때 1300년대 후반에는 불교적인 아우라(aura)가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반면 새로운 이데올로기인 유교가 중심축으로 대두하는 변혁기에『직지』는 간행되었던 것이다.
이 불교적 아우라와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정신적 교차 지점에『직지』는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고려의 금속활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려 금속활자의 정신은 대량생산의 상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량생산과 정신문화에 있다.
『직지』는 지극한 정성, 욕망의 절제로서의 보시(布施), 경건함, 기원(祈願), 자비(慈悲)
그리고 깨달음 등의 정신문화의 측면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그 밖에 종이의 대량 생산, 먹의 생산, 책에 대한 수요, 금속활자 주조 기술과 불상 주조,
기름, 먹물 등에 대한 종합적 이해도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정신문화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직지」의 뜻에서도 정확하게 드러나 있다.
달리 말해서 직지(直指)는 ‘곧바로 가르쳐 주고 정확하게 깨닫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상업화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이라는 각도에서 『직지』를 바라보지 말고,
정신문화의 깨달음과 교육과 통합문화의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따라서 정신문화와 물질문화의 교차점에서 만난 한국문화의 정점이 금속활자 인쇄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분업과 협동의 과정이 생략된 채
하나의 통합원리에서 『직지』가 간행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직지』는 정신문화가 물질문명을 지배하고
정신문화의 목적에 의해서 물질문명이 뒤따르는 총체적 통합원리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반면 구텐베르크 활자는 산업화의 욕구에 의해서 대량복사의 형태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부구조의 욕구가 필연적으로 활자로 드러난 것이다.
활자의 발명은 가속작용을 일으켜 필사공들의 직업을 박탈하면서 상업적인 인쇄를 허용하도록 만들었다.
고려활자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 활자는 활자로만 기능할 뿐이지 산업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이유는 지향목표가 달랐기 때문이다.
고려 금속활자는 대량생산의 상업화가 목표가 아니라 소량생산의 반상업화였다.
그랬기 때문에 목활자나 목판인쇄의 효율성보다는 활자주조의 정신적인 측면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처럼 고려의 금속활자는 인쇄된 객체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고
활자 주조 과정과 인쇄의 정신적 측면이 중요했던 것이다.
[정신문화로서의 직지]
‘직지’의 뜻은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해탈의 경지로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문화와 정신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주의적 관점이다.
『직지』는 언어 표현방식의 혁명이었다. 점진적 변화였지만 돌이켜 보면 혁명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 표현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종이와 인쇄라는 고전적 방식은 가상공간에서 그 표현형식이 새롭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새로운 문법을 가진 전자언어가 생겨나고 있다.
전혀 새로운 문법 체계를 가지고 탈규준화를 가속화시키는 전자언어는
테크노 문화의 카오스적 흐름을 선도한다.
『직지』의 시대에는 종이라는 실체와 인쇄방식이라는 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종이 대신 마음대로 지우고 쓸 수 있는 사이버 공간(cyber space) 속에서
인간의 표현방식은 다양해졌다. 종이책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지만
전자책이나 사이버 공간에서 표현되는 감정과 사상이 더 많아지고 있다.
삽시간에 표현방식의 무한한 용량을 제공해 준 이 디지털 원리는 표현 형식 자체를 바꾸어 버린다.
정보산업화로 인하여 정보의 저장 속도나 재생 속도는 더욱 놀라워졌고
정보 접속과 이용 시간은 무척 빨라졌다. 이것은 시간의 압축이다. 그리고 공간의 압축이다.
압축을 넘어서서 시간과 공간의 변형과 해체다. 그 변형과 해체를 지나서 새로운 창조다.
이렇게 볼 때 아날로그적 사고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틀이 바로 디지털의 원리다.
그 대표적인 매체 인터넷이 오늘날의 금속활자가 되어
예전에 금속활자가 했던 지식 확산과 정보 보급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다.
[사이버 시대와 지역문화의 재창조]
『직지』는 정보 사이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세상이 바뀌면 인쇄형식 즉 정보전달체계 또한 바뀐다.
때문에 인쇄는 상호소통적(interactive)이면서 융합(fusion)의 정신을 가지고
유연하게 새로운 인쇄 환경에 적응해야만 한다. 이것이 새로운 출판형식의 전자책(e-book)이다.
전자책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케케묵은 서고(書庫)’에 처박힐 것이다.
인류는 머지않아서 전자책과는 전혀 다른 정보전달체계를 완성시킬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정보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 역시 사이버에서 이루어진다.
디지털은 활판인쇄의 시공간성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식과 정보를 정리한다.
디지털 원리는 공간을 압축시키는 데 있다.
압축된 정보는 사이버 공간에 저장되어 익명으로 유통되고 소비된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정보화의 편차 역시 과거 자본과 권력의 편차만큼 벌어져 있다.
정보의 집중화 현상에 더하여 정보산업의 중앙집중화는 여전히 심각하다.
표면적으로 정보의 생산과 분배가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고급정보를 독점하고 소비하는 패턴(pattern)은 심화된 측면도 있다.
그러므로 산업사회의 봉건적 질서라는 이 패턴을 해체하는 것이야말로『직지』의 정신이다.
오늘날 근대자본주의 사회와 현대 산업사회에서 형성된 중앙집권의 형태는
시간과 공간의 재편성으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틀로 교체되고 있다.
여기서 독점의 해체, 영토의 탈영토화, 중앙의 탈중앙화라는 문제가 대두한다.
[직지축제]
직지축제의 정식 명칭은 청주직지축제(Cheongju Jikji Festival)다.
2003년 처음 시작한 이 축제는 청주시가 주최하고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직지축제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주관하도록 하고 있다.
1999년부터 충북민예총을 중심으로 청주의 시민사회단체가
시민주도의 직지축제를 청주시에 제안하여 연구 검토를 거쳐서 시행된 축제이다.
직지축제의 배경 및 목적은
청주의 정신·문화적 자산인『직지』를 지역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하자는 데 있다.
그 방법으로『직지』가 갖고 있는 과학·정보적 가치를 구현, 『직지』의 문화적 가치를 표현하고
『직지』의 학습적 가치를 실현, 『직지』를 알고, 사랑하고,
널리 알릴 수 있는 축제로 정착, 행사를 통해『직지』의 의미와 가치를 알 수 있는 축제로 발전시킴,
『직지』를 청주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함,
『직지』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로 활용, 청주를 학습문화도시로 발전시킴 등이다.
『직지』축제의 기조는 누구나 · 언제나 · 어디서나 · 원하는 학습에 참여할 수 있는
평생학습 인프라 구축, 학습을 통해 지식을 생성하고, 네트워크 정보망으로 확산 · 공유하며
이를 통해 청주를 지식기반 중심도시로 발전시킴,
문화를 통해 지역공동체를 재생 · 회복하여 풍요롭고 행복한 청주를 건설하는 것 등이다.
『직지』 축제는 청주시 일원에서 매년 개최되고 있으며
앞으로 민족적이고 세계적인 축제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청주의 정체성과 직지]
청주시민과 청주시는『직지』를
민족문화자산의 상징이자 세계문화자산으로 공인받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청주시민들과 충북인들은 가장 중요한 상징이나 지역적 정체성으로『직지』를 꼽는다.
청주시에서는 직지계를 설치하여 청주고인쇄박물관과 함께『직지』를 전담하도록 했다.
그 결과로 『직지』는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직지상 제정을 유네스코가 승인하고 청주시가 주관하는 직지상이 제정된 것은 2004년 4월 28일이다.
특히 세계기록유산 최초의 상이며 지방자치단체에서 제정한 유일한 상으로서
청주의 위상이 함께 높아졌다. 외교통상부와 한국유네스코위원회가 함께 노력하여 결정한 직지상은
프랑스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 제 169차 총회에서 심의 및 결정하였다.
직지상의 수상후보는 인류기록문화의 보존과 접근에 지대한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로 하며,
수상 시기는 2005년부터 2년마다 직지의 날에 시상하고, 상금액은 미화 3만 달러이고,
시상은 청주시나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하며 개최 장소는 유네스코 본부와 협의를 통하여 결정할 것 등이다.
직지 세계화는『직지』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 세계문화사에서 공인을 받는 것이 그 목적이다.
사업으로는 청주를 『직지』의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향후 장기 계획을 수립하여
직지문화산업특구 조성,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구 유치, 대규모 직지국제 학술대회 개최 등으로
세계기록문화의 연구와 교류 전시의 중심지로 발전시킬 것이며,
『직지』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활용하는 문화콘텐츠, 교육·게임프로그램,
특화상품개발 등으로 관광과 산업화가 연계되는 경제적 부가가치가 큰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민간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직지포럼은 『직지』를 주제로 하거나『직지』를 계기로 삼아 시민의 담론을 이끌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
민간주도로 직지세계화추진단도 결성되었고,
그 밖에 수많은 직지애호가, 전문가들이 직지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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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본문」
Baegunhwasang Chorokbuljo Jikjisimcheyojeol」 contains the essentials of Zen Buddhism compiled by Priest Baegun in the 21st year of King Gongmin(1372) at the age of 75. It is apparent the ideas inherited from his teacher Seogok Cheonggong, a Zen(Buddhist Mediation) master to continue and transmit the ideas of his teacher. It was printed into the metal type by his students Seokchan and Daldam under the auspices of Myodeok, who was a Buddhist nun, in the seventh lunar month of 1377 at Heungdeoksa Temple of Cheongju city.
Jikji comprises historical biographies such as Gyeongdeok jeondeungnok and Seonmun yeomsong, which were to be studied by the student monks after completing the study of the teachings necessary to understand the essence of Zen, including the Buddha's sayings from his last moments, letters of praise, letters and poems on drawings, educational phrases and sentences, songs, writings, orthodox teachings, and dialogues.
It introduced all kinds of literature for providing an understanding of Buddhism, and one hundred and forty-five Priest and Monks of India, China, and Korea are related in the contents of the book.
The key words of the title of the name of the book, "jikji simche" were derived from the famous phrase about attaining enlightenment through the practice of Zen, "Jikji insim gyeonseong seongbul" meaning the attainment of an enlightened state by direct appeal to the mind. It also means that when we come to see through Zen what the mind is, then we come to understand that mind to be that of the Buddha.
Because human nature is pure from the beginning, when the mind sees that it is pure and practices asceticism, one becomes a part of Buddha and one's mind becomes that of the Buddha. In other words, when one is enlightened through Zen, one's mind becomes the Buddha. The old priest put together a book of high standard by selecting only the essentials of Zen to teach and propagate to pupils.
Priest Baegun who is author was born in the 24th year of King Chungryeol(1282) in Gobu, Jeollabuk-do province and passed away in the 23rd year of King Gongmin(1374) at the age of 77 at Chwiamsa Temple of Yeoju-gun. Priest Baegun entered the priesthood when he was young and devoted to religious ansterities. He was inherited the ideas from Seogok Cheonggong, a Zen(Buddhist Mediation) master, and learned doctrines from Priest Jigonghwasang of India. After returning home from abroad, he stood abreast with National Preceptor Taego Bowoo and Priest Naonghwasang Hyegeun as Royal Mentor.
Priest Baegun entered the priesthood when he was young and devoted to religious ansterities. He was inherited the ideas from Seogok Cheonggong, a Zen(Buddhist Mediation) master, and learned doctrines from Priest Jigonghwasang of India. After returning home from abroad, he stood abreast with National Preceptor Taego Bowoo and Priest Naonghwasang Hyegeun as Royal Mentor.
The circumstances under which the book left Korea were as follows. It had been in the collection of Collin de Plancy, a charg d'affaires with the French Embassy in Seoul in 1887 during the reign of King Gojong. The book then went into the hands of Henri Vever, a collector of classics, and when he died in 1950, it was donated to the National Library of France, where it has been ever since. Although Buljo jikji simche yojeol consists of two books, the first volume has not been found yet and only the second volume is currently kept at the National Library in France. It originally consists of 39 chapters, of which the first chapter is missing.
Although we do not know the year Cheongju Heungdeoksa Temple was built or its size, there is an inscription at the last page that the second volume of Jikji were printed with movable metal type at Cheongju Heungdeoksa Temple at the reign of King U in 1377. The time was about 70 years earlier than the Gutenberg Bible printed in Germany. It was introduced in one of the articles of the UNESCO Courier in 1972 that the work is the oldest extant example of printing with movable metal type in the printing history of the world.
However, no one knew the exact location of Heungdeoksa Temple until a drum and Buddhist bowls made of bronze and inscribed with the word Heungdeoksa Temple were unearthed. The location of Heungdeoksa Temple, where the book was printed, was confirmed when the museum of Cheongju University excavated that sites in 1985.
This book was printed using metal type, which makes printing technology more convenient, economic, easier of correcting, and makes production of book more quickly. Also, it served as a momentum to invent an oiled ink which is appropriate to print metal type. This practical printing method invented by Korea influenced the history of Oriental printing, and it is thought that it was spreaded to Europe.
It is the world's oldest movable metal type printing evidence available and shows us an important technical change in printing history of humanity. According to these values, this book was registered as Memory of the World in September 2001.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3) 망선루(望仙樓)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자 안동으로 피난하였다가
공민왕 10년(1361) 11월부터 수개월간 청주에 머무르면서
과거시험을 치르고 합격자의 방을 망선루에 붙여 고시하여 백성의 교육의식을 제고하기도 하였다.
-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는 청주목 관아의 누각 ‘망선루’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bae6607/7848103
[건립경위]
망선루는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었는데,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1361년(공민왕 10)에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을 피하여, 안동으로 몽진하였다가
이곳에 옮겨와 수개월 동안 머물렀었다.
도적이 평정되자 문과와 감시(監試)의 합격자의 방을 붙였었는데,
훗날 사람이 그 방을 써서 루에 게시하였다.
누각은 오랫동안 헐어 있었는데, 1461년(세조 7)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새로이 중수하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다.
[변천]
또한 목사(牧使) 이섬(李暹)이 중수하였고, 목사 이수득(李秀得)이 수즙(修葺)한 일이 있다.
이후 청주보통학교 여자부 교사로 이용되다가,
1921년 망선루가 헐리고 무덕전(武德殿)이 이 자리에 신축됨으로써,
1923년 남석교(南石橋) 언저리 제일교회로 이전되어 청남학교, 또한 세광고등학교 교사로도 쓰였다.
이때 원형에 많은 변형이 있었다.
더 이상의 훼손과 변형을 막기 위해 학계와 시민단체에서 이전 복원을 주장하던 중
제일교회 측에서 청주시에 건물을 기증함으로써
2000년에 지금의 위치인 청주 중앙공원(中央公園) 안으로 옮겨 원형을 찾아 복원하였다.
[형태]
복원한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공포형식은 초익공이며, 가구는 1고주 5량집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구조는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동측 내부에 목조계단을 만들어 누마루에 오르게 하였다.
누대는 우물마루로 되어있으며, 사면에는 계자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망선루는 청주가 임시수도가 된 상황에서 치러졌던 문과(文科)와 감시(監試)의 합격자 방을 게재했던
유서 깊은 곳으로 전해지며, 고려시대 읍성의 존재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문화재이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여진다.
[참고문헌]
• 『청주시 문화유적 분포지도』(청주시 · 충북대학교 박물관, 1998)
「영문본문」
Originally built during the Goryeo Kingdom(918-1392) in the compound of the local government offices to the east of the official guest house, this building was first known as Chwigyeongnu. There is a record stating that, when King Gongmin(1351-74) visited Cheongju on his way back to Seoul after having vanquished the Red Turbans, a powerful group of Chinese bandits, in 1361, the 10th year of his reign, he gave a special civil service examination to commemorate the royal visit and announced the roster of the successful applicants from this pavilion. Yi Baeksang, the magistrate of Cheongju, renovated the pavilion in 1461, the seven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jo(1455-68) of the Joseon Kingdom(1392-1910), and his contemporary Han Myeonghoe renamed it Mangseollu. It was again renovated by Magistrate Yi Seom. Dismantled and moved here in 1923, the two-story wooden structure with a hipped-and-gabled roof is the oldest building extant in this area, though the original shape of the first story is almost completely lost.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식지 Vol.34, 2011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