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딸 사랑
영조의 딸 사랑
오호라! 여기는 나의 어린 딸 향염이 묻힌 곳이다. 딸은 정유년(1717, 숙종 43) 4월22일 장의동 집에서 태어났다. 성질이 영민하고 미목이 청수하여 내가 늦게 이 딸을 얻은 후 기뻐함과 사랑함이 자못 심했다. 뜻하지 않게도 무술년(1718) 4월 초8일 병이 □□하니 나이 겨우 한 돌이 지났다. <중략> 아아! 후인은 내가 쓴 것을 보고 느낄 것이며 내 마음을 생각하고 불쌍히 여길 것이니 어찌 덕에 보답하는 이치가 없겠는가? 이해 무술년 8월 일 아비 연잉군은 눈물을 뿌리며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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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염(香艶, 1717.4.22~1718.4.8)은 영조가 24세의 늦은 나이에
훗날 정빈(靖嬪)으로 추증된 이씨에게서 얻은 첫 자식이자 딸이었다.
영조의 첫째 세자였던 효장세자가 남동생이 된다.
1717년 4월 22일 영조의 왕자 시절 사저였던 창의궁(彰義宮)에서 태어나
돌을 보름 남짓 남겨두고 갑자기 죽었다.
그러나 당시 영조는 불과 한달 전인 3월9일 어머니 숙빈(淑嬪)최씨를 잃은 상중이라
어린 딸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결국 다음날 양주에 있는 딸의 외할아버지 산소 옆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5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8월에야 비로소 자리를 잡아 숙빈최씨의 무덤 아래로 옮겼다.
위의 글은 이때 영조가 직접 짓고 써서 무덤에 넣은 광지(壙誌)이다.
첫 딸이었던 만큼 영조의 향염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향염의 짧았던 삶을 광지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말년인 1773년 10월7일에는 향염을 화억옹주(和憶翁主)로 추증하고 무덤의 비를 직접 써서 세웠다.
영조는 두 명의 아들(효명세자, 사도세자)과 열두 명의 딸을 두었다.
열두 명의 옹주 중 일곱 명만이 장성하여 하가하였고, 다섯 명은 일찍 죽었다.
그런데 영조는 일찍 죽은 옹주 중 유독 향염을 옹주로 추증하고 비문을 직접 써서 새겼으니
그 애절함을 짐작할 수 있다.
- 유녀향염 광지(幼女香艶 壙誌)
영조가 직접 짓고 쓴 <유녀향염광지(幼女香艶壙誌)>는
앞과 뒤를 화조(花鳥) 문양의 비단으로 꾸민 세로 10㎝, 가로 7㎝ 남짓 되는 작은 첩이다.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이 첩에는 어린 딸 향염에 대한 아비의 애달픔이 글자마다 담겨 있다.
- 박용만(장서각 선임연구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식지 Vol.34, 2011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