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의 새로쓰는 불교미술] 11. 보주(寶珠)는 우주의 축소판으로 영기가 충만
11. 용의 입에서 나오는 보주(寶珠)
보주는 우주의 축소판으로 영기가 충만
월지(안압지)에서 출토한 보주(寶珠)에 관한 논문을 1976년에 쓴 이후,
보주에 대한 화두를 놓은 적이 없다. 보주를 인식하여 가는 과정은 매 단계가 드라마였다.
용과 마찬가지로 보주에 관하여 1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생명이 없는 무기물인 장식에 쓰이는 구슬로 알 뿐,
보주가 우주의 축소로서 우주에 충만한 영기가 그대로 작은 보주 안에 충만하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영기가 응축된 보주이기에 구태여 말한다면
그 폭발력이란 원자폭탄보다 더 위력적이어서, 하나의 보주에서 일체가 탄생한다.
그런데 최근 그 보주는 용의 입에서 나오는가 하면,
연꽃의 씨방에서도 무량하게 나온다는 진리를 깨달았을 때,
불교미술의 중요한 많은 문제가 풀려지리라 확신하고 기뻐했다.
항상 두 가지를 따로 따로 생각하여 왔었는데
어느 날 용과 연꽃에서 보주가 무량하게 나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기억해 내었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메모와 생각이 쌓여서 그 진리에 이르렀는가, 이 글을 쓰면서 감회가 깊다.
하나의 보주에서 일체가 탄생
용의 입에서 나오기도 하고
연꽃 씨방에서도 무량하게 나와
용의 입에서는 백제 제석사 출토 암막새 기와에서처럼,
이미 자세히 다루었지만 생명생성의 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모양의 영기문들이 나온다.
그 다양한 영기문들은 월지(안압지)출토 용면와의 입에서 발산하는 영기문처럼
제1영기싹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제1영기싹은 물을 상징한다.
따라서 모든 영기문들은 물을 상징한다.
모든 영기문들이 물을 상징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은, 실은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인데,
수천 개의 영기문을 채색분석하면서 생명생성의 과정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은 일찍이 알았으나,
그 영기문들이 물을 상징한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도 영기문이 물을 상징한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 영기문을 우리는 아무 의미 없는 당초문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용의 입에서는 영기문만이 아니라 한편 매우 중요한 ‘보주’가 나온다.
그동안 귀면이라고 불러왔으니 왜 귀면의 입에서 당초문이 나오고 보주가 나오는지
의문조차 가질 수 없었다. 용과 보주는 땔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보주의 개념도 미술사학의 개념 가운데 가장 포착하기 어려운 것들 가운데 하나다.
족히 10년은 걸려야 보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연재를 계속하는 동안 서서히 인식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보주는 용의 입에서 나오거나 손에 들고 있거나 이마에 있거나 몸의 등에 있다.
그러나 용의 얼굴을 정면으로 표현한 와당의 조형에서는 입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으나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비록 입에 보주가 없다고 하더라도 보주가 나온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입에서 정면으로 나오는 것이 조형상 어색한 때문인지
보주를 이마에 표현하거나 머리 위에 두기도 한다.
보주가 입에서 나오는 경우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다.
보주가 하나뿐 나오는가 하면(도 1-1),
이마에 두는 경우가 있는데 그 때에는 입에서 표현할 수 없는 불꽃무늬 모양같은 영기문을 표현한다.
(도 1-2, 1-3, 도 1-4).
용의 입에서 두 개가 함께 나오는 이면보주(二面寶珠)가 있다.
그동안 보주가 둘인 것을 보지 못했었는데 서울대 박물관에서 보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면(面)이란 개수를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일본에서 만든 용어이지만 틀린 것은 아니어서 그대로 쓴다.
‘두 개의 보주’라고 풀어서 쓰면 용어의 힘을 상실한다.
그런가 하면 보주를 세 개 결합한 삼면보주(三面寶珠)가 있다(도 3-1, 3-2).
아직까지 입에 삼면보주를 문 것은 보지 못했다.
나아가 네 개를 결합한 사면보주(四面寶珠)가 있다(도 4).
그런데 사면보주는 불화에서 연꽃의 씨방 자리에 두는 경우가 많은데
미술사학계에서는 사엽화문(四葉花文)이라 부르고 있으며,
삼면보주도 삼엽화문(三葉花文)이라 부르고 있으니,
우리나라 미술사학계가 보주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낮은가 알 수 있다.
거의 인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논문과 도록에 삼엽, 사엽화문 등 꽃모양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보주를 다섯 개 모은 모양은 없다. 네 개가 조형상 한계인가 보다.
그런데 무량보주가 있다. ‘무량한 보주’가 아니고 ‘무량보주’다.
이 ‘무량보주’는 내가 만든 용어이다. ‘무량한 보주’는 용어가 아니다.
그런데 무량보주를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우리나라 용면와에는 아직 그런 조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청자에서 기막힌 무량보주를 투각한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다음 기회에 밝히려 한다.
화로인지 대형 향로인지 확실히 용도를 알 수 없는 중국의 청나라 청동기의 다리에 용의 얼굴을 두었는데
그 입에서 무량보주가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도 5).
용의 입에서 무량한 보주가 나온다는 것은 깨닫는 순간,
용의 입에서 보주가 하나, 혹은 둘, 셋 혹은 넷 나온다는 것은
모두 무량보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뇌리를 스쳤다.
용의 입에서 하나가 나오면 뒤이어 또 나와서 무량한 보주가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일면보주(一面寶珠)라 하더라도 무량보주이지만,
그렇게 생각할 뿐 무량보주라고 부를 수는 없다. 따라서 사면보주도 무량보주라고 부를 수 없지만
가장 개수가 많으므로 무량보주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사면보주가 가장 무량보주의 개념에 가깝게 조형화된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연꽃 가운데 씨방 자리에서 사면보주가 자리 잡은 도상을 불화는 물론
향로 같은 금속공예나 특히 복식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왜 용의 입에서 무량한 보주가 나오는가.
영기문이 만물의 근원인 물을 상징하듯, 보주도 만물의 근원인 물을 상징하고 있다.
여러분은 앞으로 보주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용의 입에서 보주가 나온다는 것은 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나는 2년 전 봄에 경복궁 근정전의 천정에서
용의 입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옥으로 만든 조형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도 6)
그 물은 여러 개의 제1영기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싯다르타 태자가 탄생할 때 아홉 분의 용의 입에서 물을 쏟아내며
탄생한 태자를 정화하고 영화하고 성화하는 장면을 아무 생각 없이 보아왔다.
그것은 목욕시키는 것이 아니라 만물생성의 근원인 용의 입에서,
역시 만물의 근원인 물이되 용의 입을 통하여 영화된 물에서 영기화생하는 모습인 것이다.
용은 가장 존귀한 존재이므로 용을 동물을 세듯 한 마리, 두 마리가 아니라
용 한 분, 두 분이라 말해야 하고, 용의 이빨이 아니라 치아라 해야 한다.
용의 입에서 물이 쏟아지는 거룩한 광경을 옛 예술가들은 다양한 아름다운 영기문과 보주로 나타낸 것이다.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불교신문, 2768호, 2011. 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