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기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외교사] 2-3. 고려와 조선을 몰아붙이다
1393년 6월, 명의 주원장은 조선에 국서를 보내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너희가 믿는 것은 바다가 넓고 산이 험준한 것인데 너희는 우리 군대가 한나라와 당나라 시절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짐은 군대를 일으켜 강남, 회남을 복속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여 북쪽 오랑캐를 쫓아버렸다. 수군과 육군을 모두 갖췄으니 어찌 한당에 비할 것인가? (…) 병력이 백만이고 전함이 천리에 뻗치니 발해의 수로와 요동의 육로로 쳐들어간다면 너희 조선쯤이야 아침 한끼 거리도 되지 못하니 무슨 수로 당해낼 수 있겠는가.”(<명태조실록>)
주원장은 ‘백만 대군과 수많은 전함을 이끌고 정벌에 나서면 조선은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주원장은 왜 조선에 대해 이런 협박을 늘어놓았을까?
원의 쇠망과 명의 굴기
14세기 중반 원은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왕위 찬탈이 빈발하는 등 정치적 갈등이 이어지고, 만연한 사치 속에 가렴주구가 기승을 부렸다. 화폐를 남발하여 인플레가 심화되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하층민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1344년 황하가 범람했을 때, 하층민들을 가혹하게 사역시켜 치수 사업에 나서자 민심은 폭발했다. 백련교도들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유복통, 장사성, 곽자흥, 진우량 등 한족 출신 반군 지도자들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어났다. 그들 가운데는 머리에 붉은 띠를 둘러 홍건적이라 불리는 자들도 있었다.
원은 대운하와 바다에 목을 매고 있었다. 곡물과 소금 등 물자의 대부분이 강남에서 대운하와 바다를 통해 북경으로 운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사성 등 반란군이 대운하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바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강남의 연해에서도 반란을 꾀하는 무리들이 일어났다. 절강 연안에서 활동했던 방국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반란을 진압해야 할 원의 군사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육군도 약해졌지만, 유목민 출신인 원이 수군으로써 바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훨씬 어려웠다.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중원에 정착한 지 오래되어 유목민의 야성을 잃어버린데다 소수의 몽골족 으로 다수의 한족들을 통제하는 것이 한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반란군 지도자 가운데 최후의 승자는 주원장이었다. 안휘성의 빈농 출신인 그는 1344년 대기근을 만나 부모와 형제를 잃었다. 굶어죽지 않으려 황각사란 절에 의탁하여 탁발과 구걸로 연명하는 비참한 시절을 보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던 1351년 곽자흥 집단에 몸을 맡긴다.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 주원장은 승진을 거듭했고 곧 독립하여 승승장구한다. 주원장은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다. 우선 휘하 장졸들의 기율을 엄격히 단속하여 민심을 얻는 데 성공했다. 또 이선장, 유기, 송렴 등 귀족 출신의 문관들을 참모로 영입하는 수완을 보였다. 주원장은 이들의 지략과 경륜을 활용하여 대업을 성취할 수 있었다. 1361년부터 1367년까지 진우량, 장사성, 방국진 등 라이벌들을 차례로 제압하고 반란군의 세계를 평정했다.
명 태조 주원장의 초상. 1368년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고려와 조선을 몹시 불신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고려와 조선이 요동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품을까봐 의심했다. 그는 이 때문에 조선에 대해 강압적이고 무례한 외교적 압박을 가하곤 했다.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이윽고 1368년 남경에서 제위에 올라 국호를 明이라고 칭했다. 같은 해 주원장은 북경을 향해 원정군을 출동시킨다. 서달이 이끄는 북벌군의 공격에 원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원의 순제는 북경을 버리고 고비사막 쪽으로 도주한다. 이들 원의 잔여 세력들이 만든 나라를 보통 북원이라고 부른다.
원명교체의 파동과 주원장의 고려 압박
원명교체의 여파는 곧바로 고려로 밀려왔다. 일찍이 농민반란 때문에 궁지에 몰린 원은 고려에 원조를 요청한다. 1354년(공민왕 3) 원나라 승상 탈탈은 장사성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고려에 원병 파견을 요청한다. 고려는 최영 등이 거느리는 2천여명의 병력을 파견한다. 하지만 원 조정과 군 지휘부의 불화 때문에 장사성을 토벌하는 데 실패한다. 장사성은 이후 누차 사신을 보내 고려를 회유하려 시도한다. 또 홍건적 가운데 일부는 원군의 토벌을 피해 요동을 거쳐 고려로 침입한다. 공민왕은 개경을 버리고 안동으로 피난했고 고려 백성들은 홍건적의 악행에 치를 떨어야 했다. 고려는 중원의 구세력과 신세력 사이의 대결을 주시하면서 국가의 출로를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제위에 오른 뒤 주원장은 고려와 주변국들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즉위 직후인 1368년 12월 주원장은 설사라는 인물을 고려에 보내 자신이 원 황제를 북으로 쫓아내고 중원을 평정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일소했다고 통고했다. 이어 고려 이전의 역대 왕조들과 중국의 관계를 상기시키면서 조공하라고 촉구했다.
공민왕은 주원장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곧 사신을 보내 황제 즉위를 축하했다. 원의 연호를 폐기하고 명의 연호를 사용했다. 명에 조공하여 제후국이 되기로 다짐했다. 이른바 친명반원의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또 과거 원과 결탁하여 나라 안팎에서 전횡을 일삼던 기철 일파를 제거하는 등 부원세력 숙청에 나섰다.
공민왕이 공순하게 친명의 입장을 명확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관계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것은 주원장이 고려를 ‘길들이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1369년(공민왕 18) 주원장은 고려에 유시문을 보내왔다. 주원장은 유시문에서 먼저 ‘공민왕이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일에는 소홀한 채 불교에만 빠져 있다’고 질책했다. 또 국가 차원에서 산천과 성황에 대한 제례를 소홀히 하지 말 것, 군비를 잘 닦아 왜구의 침략을 막을 것 등을 채근했다. 얼핏 보면, 대국의 황제 주원장이 소국의 제후 공민왕에게 치국을 위한 방책을 ‘훈수’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이어진 유시문에서 주원장은 “짐의 군대가 아직 요심에 이르지 못했는데 혹시라도 강포한 자가 나타나게 되면 중국의 우환이 아니라 반드시 고려에 해가 될 것이다. (…) 왕이 그를 막으려 한다면 뛰어난 장수와 용맹한 병사가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
고려 · 조선 ‘친명반원’ 불구
요심이란 요양과 심양을 가리킨다. 주원장이 고려를 ‘길들이려’ 했던 배경에는 역시 영토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명은 당시까지 요동 지역을 영토로서 아직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요동에는 나하추를 비롯한 ‘강포한’ 원의 잔당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주원장은 고려가 이들 잔당이나 북원과 연결하여 요동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지 않을까 몹시 경계했다. 유시문에서 했던 이야기는 명과 북원, 그리고 원의 잔당들 사이에서 고려의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경고이자 압박인 셈이었다.
영토 문제에서 비롯된 명의 압박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에 맞서 최영 일파가 1388년 요동 정벌을 시도하고, 원정에 나섰던 이성계 등이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회군을 통해 ‘자세를 낮춘’ 이성계 일파가 조선을 건국한 뒤에도 명은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 1393년의 국서에서 보이듯이 걸핏하면 정벌하겠다고 위협한다. 조선의 고민이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11. 10.14 한겨레, [한명기 교수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 외교사]
명의 주원장이 고려와 조선을 불신했던 데는 나름의 배경이 있었다.
14세기 말엽 대륙에서 원명교체라는 격변이 벌어지고 있을 때, 고려와 조선을 이끌었던 정치적 주역들은 결코 만만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공민왕, 최영, 이성계, 정도전 등은 중원 정세의 변화를 예민하게 주시하면서 국익을 챙기고 나아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 부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과거 고구려의 고토였던 요동에 대해 야심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주원장은 그 같은 야심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명은 몽골 잔여세력들을 제압하고 내정을 추스르는 데 집중해야 했으므로 요동 장악에 진력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주원장은 자연히 고려와 조선을 압박했고 그 과정에서 심각한 갈등과 파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동녕부 정벌과 북진정책의 재현
1368년 명 건국 직후, 공민왕은 사절을 보내 조공하는 등 공순한 태도를 보였지만 시종일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공민왕은 급변하고 있던 중원의 정세를 엿보며 틈을 파고들었다. 명이 원의 잔당을 토벌하는 데 집중하고 있던 1369년(공민왕 18)과 1370년, 공민왕은 두 차례에 걸쳐 동녕부를 공격했다. 동녕부는 본래 1269년(원종 10) 고려의 반역자 최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북 지역 60여 성을 원에 넘겨주면서 등장한 기구였다. 원은 이 새로운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평양에 동녕부를 설치했다가 1290년 관할 영역은 고려에 반환하고, 동녕부의 치소는 요동으로 이전한 바 있다. 공민왕은 동녕부 원정을 통해 요동 지역에 남아 있는 친원세력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원정 당시 이성계와 지용수 등은 1만5,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북면, 함흥, 강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입했다. 고려군은 당시 요양까지 점령했는데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모두 1만여호에 이르는 동녕부 지역의 여러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수천 마리의 우마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고려군의 요양 점령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요양은 이후 명이 요동을 지배하는 군정, 행정의 거점이었던 요동도사의 소재지였다. 또 요동도사는 후금의 누르하치가 요동을 장악하는 1620년대 중반까지 명이 조선과 여진을 감제하는 전진기지였다.
조선 개국 직후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요동을 공취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끝내 무위에 그쳤던 사실을 고려하면 공민왕의 요양 점령은 고구려 고토에 대한 최후의 답파였던 셈이다. 나아가 고려가 건국 이래 추진했던 북진정책을 재현한 것이기도 했다.
나하추의 존재, 공민왕의 죽음과 여명 갈등의 고조
명은 이문충과 남옥 등의 활약을 통해 내몽골과 외몽골 지역에서 원의 잔당을 어느 정도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명의 시선은 이제 요동 쪽을 향하기 시작한다. 주원장은 요동에 초무사를 파견하여 원 잔당들에게 항복하라고 촉구했다. 1371년 요양의 평장 유익이 병마와 전량 등을 초무사에게 바치고 항복하자 명은 요양에 요동위(뒤의 요동도사)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경략 채비에 나선다.
주원장, 강온책 병행해 견제
그와 함께 주원장의 고려에 대한 태도도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1384년 9월, 고려의 사신이 공민왕의 시호를 요청했을 때만 해도 주원장은 그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듬해 1월, 고려가 공마 5000필을 보내오자 주원장의 태도는 누그러진다. ‘내가 공민왕 사후 고려를 닦달한 것은 그들의 진심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짐짓 태도를 바꾼다. 이어 7월에는 공민왕의 시호를 내려주고 사신을 보내 우왕을 책봉하기로 결정한다.
명의 태도 변화는 고려를 회유하여 나하추와의 연결을 막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윽고 1386년(우왕 12) 12월, 주원장은 장군 풍승에게 요동 공격에 나서라는 유시문을 내린다. 명군은 오늘날의 승덕 부근에 병참기지를 설치한 뒤, 1387년 6월 나하추를 공격하여 금산 지역을 장악했다. 1372년 나하추로부터 습격을 받은 이후 15년 동안 요동 장악의 기회를 노려왔던 명은 마침내 그 첫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나하추라는 걸림돌이 사라지자 명의 군사력은 요동 전역과 고려를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1388년 주원장은 고려에 보낸 국서에서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했다. ‘철령 이북 지역의 땅과 거주민은 과거 원의 개원로에 속했으므로 앞으로는 요동에서 관할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고려 조정은 바짝 긴장한다. 우왕은 곧 홍무 연호의 사용을 중지했고, 실권자 최영은 명의 압박을 빌미로 요동에 대한 원정을 준비한다. 바야흐로 고려왕조의 운명을 가를 또 다른 외교적 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11. 10.28 한겨레, [한명기 교수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 외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