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10·26
바보들의 10·26
# 탁자에 고려청자 한 점이 놓여 있다.
구름 사이로 1천 마리의 학이 날아오른다. 불교의 나라 고려가 꿈꾸던 옥빛하늘로,
"2만원!" 일본인 마에다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조선놈이 값을 치를 배짱이 있느냐고 비웃듯.
1935년 봄. 당시 경성의 여덟 칸 기와집 한 채가 1천원이었으니, 스무 채 값이다. 침묵.
스물아홉 조선 청년은 돈을 건넸다. "2만원이오."
며칠 뒤 일본인 무라카미가 현해탄을 건넜다. "두 배를 드리겠다." 조선 청년이 답했다.
"더 좋은 청자를 저에게 주신다면 그 대가는 시세대로 드리겠습니다." 기싸움은 끝났다.
'천학매병'(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69호)은 그렇게 이 땅에 남았다.
# 일본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개즈비는 고려청자 마니아..
1936년, 그가 모아온 경품 고려청자 20점을 일괄 매각한다는 소식이 조선 청년 귀에 들어왔다.
일본과 조선을 고가는 질긴 협상 끝에 거래가 성사됐다.
40만원. 여덟 칸 기와집 400채 값이다. 요즘 시세로는 1200억원.
조선 청년은 충남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처분했다. '사금파리' 20점을 손에 넣으려고.
'청자 원숭이형 연적'(국보 270호), '청자 기린형 향로'(국보 65호) 등 고려청자 20점은
그렇게 이 땅으로 돌아왔다.
간송 전형필(1906~1962). 그 조선 청년이다.
논 800만평(4만 마지기)을 물려받은 조선 최고 갑부의 한 명.
쉰여섯에 세상을 뜰 때, 억만금 재산을 사라지고 문화재만 남았다.
식민지 조선 최고의 고미술품 컬렉터 간송에게 고서화 골동 수집은 취미도 돈벌이도 아니었다.
기준은 하나. 조선 땅에 꼭 남아야 할 문화유산인가 아닌가.
#10월16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갔다.
간송미술관이 1971년부터 봄과 가을에 보름씩 한 해 두 차례만 일반인에게 문을 여는 특별기획전 첫날.
81회째. <풍속인물화대전>
1시간 넘게 거리에서 줄을 서 기다렸다. 전시관은 비좁다.
(1938년 8월29일 - 국치일! - 간송이 완공한 조선의 첫 개인 박물관 '보화각'!).
옆사람과 어깨가 부딪친다. 차분하게 감상하기 어렵다. 그래도 불만 없다. 언감생심이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조선 풍속화의 백미로 꼽히는 <월하정인>이 포함된 <혜원전신첩(국보 135호)>.
1934년 간송이 일본 오사카에서 3만원(기와집 30채 값)을 주고 되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관람료는 없다. 거저다. '눈호사'에 보답할 길이 없다. 난감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초상화의 비밀'전도 관람료가 5천원인 세상이다.
여전히 간송은 '바보'처럼 살아 있다. 눈물 나게 고맙고 미안하다.
#간송은 뜨거운 민족애뿐만 아니라 '조선 최고의 고미술 감식안'을 갖췄다.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의 그림. 국립중앙박물관에 40점이 있는데, 간송은 161점을 모았다.
간송을 빼고는 고미술을 논할 수 없는 까닭이다.
간송이 '민족의 얼과 혼'을 이 땅에 남겨 후대에 전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할 때,
후일 대한민국 초대 외무장관이자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창랑 장택상은
자신의 수장품을 일본인에게 거액에 팔았다.
'최고의 조선백자 컬렉터'인 장택상이 1930년대 일본인에게 넘긴 것으로 확인된 조선백자 가운데
국보급 명품만 8점이다.
간송이 '유능한 이타주의자'라면, 창랑은 '유능한 사익추구자'라고 할 수 있을 터.
#10월26일 재, 보궐 선거로 나라가 시끄럽다. 서울시장 보선이 핵심이다.
결과는 내년 총선, 대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터.
10월26일은 '역사의 날'이다.
1909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쐈고,
1979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했다. 경천동지. 역사가 바뀌었다.
2011년 10월26일 서울시민은 투표로 '역사의 총'을 쏜다.
Good Luck!
- 이제훈 편집장
- 한겨레 21, 제 883호, 2011년 10월31일
- 참고문헌, <간송 전형필>(이충렬,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