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2. 다산 가문의 위상과 학맥
다산 가문의 위상과 학맥 |
다산 선조 8대가 홍문관 진출… 학문적 기풍 뚜렷 |
다산 선생의 외고조부인 윤두서의 자화상. |
우리 사회에서 가문이란 아직도 매우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집 가문이 어떻다는 등의 이야기는 멀리 명왕성까지 우주선을 보내는 이 시점에서까지 유지되고 있다.
작년에 필자가 부여에서 유물을 기증받는 과정에서 부여 유림(儒林)의 어른들로부터 자신들의 선대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야했다. 그 분들은 현대화된 오늘날에도 자신들이 가문을 지켜오고 선조들을 배향하고 있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이것이 바로 가문을 지켜오는 힘이 아닌가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 역시 나주 정씨 가문의 일원이다.
필자는 다산을 사모하는 입장에서 다산의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실제적 능력들이 과연 어디로부터 비롯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참으로 많이 하였다.
성리학이 지배를 하던 시절에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배다리를 설계하고,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을 설계한 그 탁월한 건축 토목학적 능력은 다산 선생이 갑자기 터득해서 만든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항상 결과에 대한 근원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산 선생의 이 탁월한 능력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의 고민에 대한 결과로
그의 가문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다산 선생의 외가인 해남 윤씨의 종가 녹우당 전경. |
다산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문에 대한 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애정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문을 무척이나 자랑하고 싶어 하였다.
그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다산 선생은 자신의 가문이 학문으로 일가를 이룬 집안이었음을 드러내놓고 자랑하였다.
다신이 저술한 ‘자찬묘지명’에도 자신의 집안이 8대 ‘옥당(玉堂)’을 배출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옥당(玉堂)’이라 함은 홍문관을 말하는 것인데
조선시대 선비들이 홍문관에 들어가는 것은 평생의 소원이자 자랑으로 여겼다.
홍문관은 문과 급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학문적 능력이 인정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기에
이곳의 관원이 된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인정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앞날이 보장되는 청요직에 나갈 수 있기도 하였다.
그런 홍문관에 다산의 선조들이 8대에 걸쳐 연속으로 진출하였다고 하니
이는 조선시대 가문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내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8대가 홍문관에 입사할 정도로 학문적 기풍이 뚜렷하였기 때문에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산의 선조는 어디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가?
다산의 집안인 나주 정씨 가문은 그의 13대조인 정윤종(丁允宗)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윤종은 고려 유민으로서 조선왕조가 개국한 이래 황해도 배천땅에 은거하여
지조를 지키고 말없이 덕을 쌓으며 집안을 일으키는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그 아들 정자급 때부터 벼슬에 나오기 시작하여 서울에 올라와 살았으며,
그 이후 5대조 정시윤(丁時潤)에 이르기까지
정약용의 직계 선조는 8대가 잇달아 옥당에 오를 만큼 대단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5대조 정시윤은 숙종 때 험난한 당쟁속에서도 당파에 초연하여 지조를 지켰으며,
만년에 ‘마재’에 터를 잡았다. 이후 정시윤의 후손들은 마재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다산 가문이 일찍부터 실학의 기운에 눈을 뜬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시윤의 사촌이었던 정시한(丁時翰)은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더불어 정시한은 퇴계 이황의 학통에서 정구와 장현광을 거쳐
기호남인의 적통을 이은 대단한 학자라고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정시한이 은거했던 원주와 여주 접경지인 법천리. |
이처럼 높은 학문적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은 정시한은
남한강의 원주와 여주 접경인 법천리(法川里)에 은거하며 세상을 주유하였다.
법천리는 경상도와 충주를 이어 경기와 강원 그리고 한양으로 이동하는 남한강 일대의 주요한 포구가
형성되어 있으며 고려시대부터 나라의 스승이라는 지위를 받은 고려 불교의 ‘국사(國師)’가 주석하는
그 유명한 ‘법천사’가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이 일대는 한강과 함께하고 있는 지역이었기에
일찍부터 유통과 교역이 발달되어 다양한 문화와 정보가 들어오던 곳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와 선진 의식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하였다.
그래서 정시한은 기존의 성리학을 초월하여 불교를 이해하고, 양명학도 받아들였다.
정시한이 집필한 산중일기. |
정시한은 역사와 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전국을 기행하고 지역마다의 특징과 사찰의 모습을 ‘산중일기(山中日記)’ 라는 기록으로 남기기까지 하였다.
정시한이 다산의 직계 선조는 아니지만 아주 가까운 방계로서 다산은 정시한의 실학정신을 이어받아 자유로운 학풍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정시한은 다산이 실학자로 성장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에게 가장 영향을 준 인물은 아무래도 아버지 정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재원은 과거를 본 인물은 아니었지만 학문과 인품이 매우 출중했던 인물이었다.
마재에 은거하고 있던 그가 영조의 탕평책에 의한 특별 명령에 의해 지방 고을의 수령으로 나갈 수 있었다.
훗날 영조가 정재원을 재상으로 쓰고 싶다며 문과에 응시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정재원의 정치적 · 학문적 능력은 탁월했다.
하지만 정재원은 재상을 하기 위해 젊은이들과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은
올바른 선비의 자세가 아니라며 영조의 부탁이자 지시를 거부하였다.
다만 지방 수령으로 나가 백성을 잘 보살펴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자신이 할 마지막 충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럴 정도로 선비로서의 자세를 강조하고 강직하였기에
다산은 평생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고자 하였고, 그의 형제들 모두가 그러하였다.
다산이 훗날 유배지에 가서 500여 권에 이르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외가(外家) 덕분이었다.
다산의 외가는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 가문 중에서도 그 이름이 높은 해남 윤씨 집안이었다.
경기도 마재에 일가를 형성했던 다산의 집안이 멀리 해남에 있는 윤씨 집안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은
같은 남인이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과 맞대결을 벌였던 인물로서
학문과 정치적 능력 모두가 탁월한 인물이었다.
특히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국보 자화상을 그린 시대의 화가이자
만권(萬卷)의 책을 소유하고 있던 대단한 장서가였다. 책에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윤두서는 조선에 있는 문집과 중국에서 새로운 책이 나오면 수입하여 소장할 정도로
책을 사랑하고 학문 연구에 충실했다.
윤두서는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해남의 초야에 은거하였다.
그는 시 · 서 · 화에 두루 능했고,
유학과 경제 · 지리 · 의학 · 음악 등 여러 방면에 박학을 추구하던 학자이기도 하였다.
윤두서는 실학자였던 성호 이익(星湖 李瀷)과도 깊은 친분을 맺고 있었다.
훗날 다산이 성호 이익의 학문을 받아들여 진정한 마음의 스승으로 삼게 된 것은
이러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윤두서의 셋째형은 당쟁에 휘말려 귀양지에서 사망하였고,
윤두서 역시 큰형과 함께 모함을 받아 고생을 하였다. 바로 윤선도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로 인해 윤두서는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버리게 되었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성호 이익의 형이었던 이잠(李潛)이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맞아죽는 일까지 생기자 그는 더욱 침잠하게 되었다.
그래서 윤두서는 46세가 되던 1713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해남으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해남 이주 이전부터 그는 정치적 삶을 쫓아가지 않고
해남 윤씨 가문에 절절히 흐르고 있는 예술적 능력을 키우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래서 그의 위대한 작품 자화상이 나왔던 것이고, 이러한 예술적 능력이 다산에게로 전해진 것이다.
윤두서의 아들은 윤덕희로 이 역시 초야에 은거하며 자신의 가문을 지켰다.
이 시기는 이미 노론이 장악한 시대였기 때문에 남인이 출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고,
아버지 윤두서의 간곡한 당부로 거친 바닷 바람이 불어오는 해남의 들녘을 지키고 있었다.
이 윤덕희의 손녀딸이 다산의 친 어머니였다.
8대 옥당의 후예였던 정재원과 공재 윤두서의 증손녀가 만나
시대의 천재이자 후세(後世)가 존경해마지 않는 정약용을 태어나게 한 것이다.
학문과 예술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던 두 가문의 정혈이 다산 정약용에 이르렀으니
이는 역사의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만약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서 외가집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는 우리가 익히 말하고 있는 그 위대한 업적을 절대로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산의 집안 사람들에 우리가 주목하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 김준혁,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 2011년 1월31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