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3. 성장과 공부

Gijuzzang Dream 2011. 9. 28. 12:58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3) 성장과 공부

 

어머니 잃은 슬픔 속… 고통과 번민의 어린시절

 

 

 

 

 

다산 정약용 선생 생가

 

 

 

 


위인들의 어린 시절위인들의 어린 시절은

 

 

위인들의 어린 시절은 어떠하였을까?

명망있는 가문의 후예로 태어나

경제적 어려움 없이 학문 높은 선생님의 지도아래 순탄하게 성장한 분들도 있을 것이고,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여러 가지의 불편한 여건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실학의 완성자라고 평가받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어린 시절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의 어린 시절이 아주 불행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속 모를 고통과 번민을 가지고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명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산 스스로의 평가에서도 보여지듯이 무척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당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많은 양반 가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평민들보다 더욱 어려운 삶을 살았다.

다산 집안 역시 어려운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았고,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다산의 생애 내내 지속되었다.

 

다산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조(先祖) 8명이 홍문관에 입사할 정도로 학문에 출중한 집안이었다.

다산의 증조부였던 정항신(丁恒愼)부터 아버지 정재원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홍문관 입사의 명맥이 끊겼지만 학문의 깊이마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산의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정재원에게 사서삼경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다산은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우면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외견상 매우 행복하게 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린 시절 다산은 어머니를 잃은 고통으로 몹시 힘든 삶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 정재원은 처음 본관이 의령인 남하덕(南夏德)의 딸과 결혼하였다.

남하덕은 조선의 개국일등공신이었던 의성군 남재(南在)의 후손이었기에

관직이 없는 처사였음에도 명문가의 후예로서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정재원은 첫 부인과 결혼을 통해 1751년(영조 27)에 첫 번째 아들인 정약현을 낳았다.

첫 아들을 낳은 의령 남씨는 다음해 10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말았다.

그래서 정재원은 두 번째 부인으로 윤선도의 후손인 해남 윤씨 가문의 처녀를 맞이하였다.

정재원은 해남 윤씨와의 사이에서 약종, 약전, 약용을 낳았는데,

이 형제들 모두가 조선후기 역사 변동기의 핵심적 인물들이었다.

더불어 아버지의 강직함과 어머니의 예술적 기질을 모두 이어받아

이들은 정조시대 문화융성과 서학(西學) 전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산의 어머니 윤씨는 자신이 직접 낳은 아들이 아니지만 큰 아들이었던 약현을

자기의 소생처럼 다독거리며 살았다.

약현 역시 해남 윤씨를 친어머니처럼 귀하게 받들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다산의 부친인 정재원이 연천 현감으로 부임을 하였을 때

어머니 윤씨가 약현과 큰 며느리를 불러 함께 요즘의 화투놀이와 유사한 쌍륙놀이를 할 정도로

자식들과 화목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실 다산은 연천에서 가족과 생활할 때가 그의 인생 중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모두 계시고 똑똑한 형들이 아버지와 더불어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산의 나이 9살이 되던 1770년(영조 46)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다산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조숙하고 천재적인 자질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이별하는 것은 큰 슬픔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잃은 다산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싼 두 사람의 여인이 있었다.

그 중 한명은 서모(庶母)이고 또 한명은 큰 형수였다.

 


9살때 어머니와 이별후 서모 · 큰형수가 친모이상으로 보살펴


아버지 정재원은 아내가 죽은 이듬해 금화현의 처녀 황씨를 아내로 삼았으나

그녀는 오래지 않아 죽고 말았다.

1773년(영조 49)에 또다시 서울에서 처녀 김씨를 측실로 삼았는데 당시 김씨의 나이 20세였다.

이 김씨가 다산이 자신을 친아들처럼 키워주었다고 늘 이야기하는 서모(庶母)이다.

다산은 친어머니와 산 세월보다 서모와 산 세월이 훨씬 더 많았다.

서모가 처음 다산의 집으로 시집을 올 때 다산의 나이 12살이었다.

 

예전에는 머리에 이와 서캐가 무척이나 많았다.

요즘 어린이들에게 이와 서캐는 구경도 해 본적이 없는 것이지만

지금 나이 40대 이상의 중년인들은 모두 어린 시절 이와 서캐가 가득했었다.

다산이 살던 시절은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다산 역시 명문가의 후예였지만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한 가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위생 상태가 좋았을리 없었다. 그래서 다산 역시 머리에 서캐와 이가 많았고 또 부스럼이 자주 났다.

다산의 서모는 다산을 위하여 손수 빗질을 해주고 또 머리에 난 부스럼의 고름과 피를 씻어주었다.

그리고 바지 · 적삼 · 버선을 빨래하고 꿰매며 바느질까지 모두 서모가 맡아서 해주었다.

다산이 15살에 장가를 간 이후에는 서모가 빨래 해주는 일을 그만두었지만 그 애정은 계속 이어졌다.

다산의 서모는 다산이 유배 간 후까지 그를 생각했는데

죽을 때 다산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을 슬퍼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친 모자 이상이었다.

 

 

다산의 서모 못지않게 어머니를 잃은 다산을 보살펴준 이가 바로 큰 형수 경주 이씨였다.

큰 형 약현은 앞서의 이야기처럼 다산과 어머니가 달랐다.

그렇지만 약현은 장남으로서 가장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진중한 산처럼 형제들을 이끌었고

어린 동생을 아버지처럼 키워주었다. 정약현의 아내 경주 이씨는 다산을 머리 빗겨주고

세수 대야를 들고 다니면서 씻겨주면서 그를 키워주었다.

훗날 다산이 이벽(李檗)으로부터 천주학을 듣고 깊이 빠지게 된 것은

바로 이벽이 큰 형수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는 학문을, 형들에게는 호연지기를 배우며 성장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서모와 큰형수의 도움으로 다산은 차분히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의 스승은 바로 아버지 정재원이었다.

물론 다산 스스로가 성호 이익 선생을 사숙(私淑)한다고 하여 마음의 스승으로 이익 선생을 두었지만 실제 학문을 처음 가르쳤던 이는 바로 정재원이었다.

다산이 자신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문집에 남긴 내용을 보면

정재원은 당대에 일가를 이룬 학자였다. 영조와 정조가 재상감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정국을 통찰하는 능력과 지조와 기개가 있는 인물이었다.

정재원 역시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어려움속에 성장하였지만

굳은 심지로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정재원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삶을 다산에게 가르쳤다.

 

 

네살 땐 천자문을, 일곱살 땐 시를,

열살 땐 경전과 역사서 지어… 어릴 때부터 대단한 천재,

훗날 개혁군주인 정조와 만나기 위한 꿈을 꾸고 있었다.

 


다산은 네살 때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다산이 여섯살 때 정재원이 연천 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다산은 연천까지 가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어린 시절 연천은 다산에게 학문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곳이다.

   
연천 관아터

일곱살 때 처음으로 시를 지었는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小山蔽大山),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라네(遠近地不同)”였다.

 

이 시 구절을 본 아버지 정재원은 “분수에 밝으니 자라면 역법(曆法)과 산수(算數)에 능통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정재원은 자신의 아들이 어떤 방면에 탁월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이미 판단하였던 것이다.

다산이 훗날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와 화성을 설계한 것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역법과 산수에 밝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열살 때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던 부친에게 경전과 역사를 배웠다.

이때 경전과 역사서를 모방하여 지은 글이 일년 동안 자신의 키만큼 쌓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독서와 작문에 부지런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10세 이전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이라 하였다.

‘삼미’란 어린 시절 마마를 앓아 눈썹이 세 개로 갈라져 삼미라 스스로 부른 것에 연유한 것이다.


다산의 놀라운 기억력에 대하여

뒷날의 역사가 매천 황현은 자신의 저서인 『야록(野錄)』에 기록하였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정말 다산은 대단한 천재였다.

다산이 어린 시절에 정승이었던 이서구가 자신의 고향인 영평에서 대궐로 오다가

한짐의 책을 말에 싣고 북한산의 절로 가고 있는 어린 소년 다산을 만났다.

10여 일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다시 한짐의 책을 싣고 나오는 다산을 보자 이서구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너는 웬 사람인데 책을 읽지 않고 다만 가거니 오거니 하고 있단 말이냐”라고 물었다.

이에 다산이 다 읽었다고 대답하자 이서구가 놀라서 싣고 가는 책이 어떤 책이냐고 묻자,

다산이 “강목(綱目)”이라고 하였다. 강목은 어른들도 몇 달을 걸려서 읽기가 어려운 책인데

어린 소년이 겨우 10여일 만에 읽었다고 하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러 권의 책을 꺼내서 물어보니 그때마다 다산이 모두 대답한 것이다.

이에 이서구가 다산의 천재적 기억력을 인정하였고,

이 이야기가 후대에까지 전해져 황현이 기록으로 남기기까지 한 것이다.

이처럼 다산은 어린 시절 고향 마재에서 넓고 긴 한강과 연천의 높은 산을 보며 호연지기를 키웠다.

그리고 자상하면서 엄한 아버지의 가르침과 탁월한 인품과 학문을 가진 형들의 보살핌 아래

개혁군주 정조와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김준혁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 2011년 2월7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