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4. 다산의 고향 마재(馬峴)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4) 다산의 고향 마재(馬峴) |
6대조 정시윤 때… 절경에 이끌려 정착한 '다산 사상의 고향' |
철마산의 다양한 풍경들. |
초천(苕川)의 북쪽, 유산(酉山)의 서쪽에
무쇠로 만든 말[鐵馬]이 산등마루에 있는데, 그것은 작기가 쥐만 하였다.
그런데 예부터 노인들이 전하기를,
“왜구(倭寇)의 난 때 그들 중에 풍수학을 잘 아는 자가 있어
‘산천이 수려하므로 철마로 그 정기를 눌러놓고 간다’고 하였는데,
동네에서는 전염병과 이상한 일이 있으면 백성들이 이를 물리치기 위하여 콩과 보리를 삶아
조심스레 제사지내곤 하였는데, 이것으로 그 동네를 ‘마현(馬峴)’이라고 이름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믿지 못할 사람들이 퍼뜨린 말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가령 왜인(倭人)이 이것을 만들었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내가 너희들을 눌러놓고 간다’고 말하였겠는가.
그리고 설사 우리들이 그 말을 보고 의심하여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그것이 산천의 정기(精氣)를 누르는 것임을 알았다면, 어찌 뽑아내어 버리거나
달구어 식도(食刀)로 만들어 버리거나 하지 않고, 그것을 신(神)으로 여겨 제사를 지내고
우리의 재앙을 없애고 우리의 복을 맞이하기를 바랐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유래가 오랜 것이요, 왜인의 짓이 아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말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음사(淫祀, 미신)이다.
■ 철마(鐵馬)가 모셔졌던 마재
옛날에 마조(馬祖)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있었는데, 맨 처음 말을 기른 자에게 제사한 것으로,
이는 마치 맨 처음 양잠(養蠶)을 가르쳤던 자를 선잠(先蠶, 맨 처음 양잠을 가르쳤던 神)으로 모셔
제사 지내는 것과 같은 것이요, 고의로 말을 받들어 신(神)으로 삼아 그에게 제사 지내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고 보면 마을 백성들이 무쇠로 만든 말[鐵馬]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크게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슨 물건이든 오래되면 신(神)이 깃드는 것인데, 저것이 비록 철(鐵)로 주조한 것이라고는하나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유래가 오래되었다면 신이 깃들어 있을 터인데 어찌 그 제사를 금할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생명이 있는 물건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지만,
생명이 없는 물건은 옛것 아닌 것이 없는데, 만일 옛것이라 하여 모두 제사를 지내야 한다면
자네는 앞으로 제사 지내는 일을 감당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산시문집》에 소개되어 있는 철마(鐵馬)에 대한 다산의 변증(辨證)이다.
마을에서 전해오던 구전을 채록하여 산의 이름이 왜 철마산이 되었는지,
마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다산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고향인 마재[마현]의 지명은
임진왜란 때 이곳까지 침입한 왜구들이 산의 정기를 누르기 위해
무쇠로 만든 말 모양의 부적 같은 것을 산 정상에 묻었는데,
이후 동네에서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이를 물리치기 위해 철마를 모시고 제사 지내면서
동네 이름을 ‘마재[馬峴]’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의 말에 따르면, 이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유래와 관련해서는 왜구의 침입과 관련이 있다.
물론 그 말을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유추할 때 1592년의 임진왜란이 제일 먼저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 이전인 고려 말에도 왜구가 이미 서해안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자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어 특정한 시기를 지목하기는 어렵다.
■ 철마산과 철마
마을 사람들은 매년 봄, 가을로 콩과 보리를 삶아 정성스레 제사 지냈다.
마을의 안녕을 빌었으니 마을 제사였음이 당연지사다.
철마를 신(神)으로 모시는 마을에서의 제사가 미신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었지만,
다산은 이것을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는 마조신앙(馬祖信仰)이나
양잠과 관련한 선잠(先蠶)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비판적인 생각을 밝히면서도 마을구성원으로서 마을제사는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마현(馬峴)의 옛지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는 조선 이래 광주부 초부면에 속했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주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지도는 1871년(고종 8년)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동여도》의 광주 지역이다. 방안식으로, 축척은 10리척을 사용하였다. 마현, 수종사, 운길산, 두미(斗迷) 등의 지역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
철마는 성남시 판교택지개발지구에서 출토됐다. 마을사람들이 모셨다는 철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작기가 쥐 만하다는 다산의 말에 따르면, 크지 않은 것이 한 손에 움켜쥘 수 있을 정도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철마는 산 등마루에 모셔져 있었다. 아마도 모셔졌던 곳, 그곳이거나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묻혀 있다가 발견되면서 사람들에게 모셔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 이전까지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무쇠로 만들어진 철마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크기나 재질에서 다산의 지적과 꼭 들어맞는다. 삼국시대 고분에 이런 철마를 매장하는 것은 죽은 자의 사후 삶에 대한 하나의 기원 내지는 의례의 일종이었다. 그렇다면 다산이 목격한 그 철마 역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
■ 다산의 6대조가 지은 정자, 임청정(臨淸亭)
다산의 집안이 이곳 마재로 들어온 때는 그의 6대조인 정시윤(丁時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산은 자신의 집안에서 지은 정자인 임청정(臨淸亭)이라는 정자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숙종 때 병조참의로 있던 정시윤이 양곡 방출을 탄원하던 일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나 한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노년에 살 곳을 구하다가
이곳의 경치에 끌려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청정을 짓고 그 앞에 여러 모양의 소나무를 심어 가꾸었는데,
마치 용이 도사리고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은 모양의 소나무와 거북이 움츠리고
학이 목을 길게 뺀 것 같이 기이한 모양의 소나무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정시윤의 네 아들은 이곳에 정착하며 일가를 이루었다.
물론 가세의 성함과 기움에 따라 판서 박문수(朴文秀)에게 임청정을 팔아야 하는 어려운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 정시윤 일가는 마재에서 생활하며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을 배출한다.
생활에 많은 불편을 겪으면서도 다산과 그의 조상들이 마재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
이중환(李重煥)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의 서문을 써주면서 다산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의 집은 초천(苕川)의 시골인데,
물은 몇 걸음만 가면 길어올 수 있으나, 땔감은 10리 밖에서 해오며, 오곡은 심는 것이 없고,
풍속은 이익만을 숭상하고 있으니, 낙원이라고는 할 수가 없고,
취할 점은 오직 강산의 뛰어난 경치뿐이다.
그러나 사대부가 땅을 점유하여 대대로 전하는 것은
마치 상고(上古) 시대 제후가 그 나라를 소유함과 같은 것이니,
만일 옮겨 다니며 남에게 붙여 살아서 크게 떨치지 못하면 이는 나라를 잃은 자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초천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 김성환 실학박물관 학예팀장
- 2011년 2월 14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