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6. 이승훈, 매부이자 학문의 동반자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6) 이승훈, 매부이자 학문의 동반자 | ||||||||||||||||||
‘평등정신’ 눈 뜬 학문적 동반자… 한국 천주교 밀알이 되다
사돈관계로 맺어진 ‘베드로’ 이승훈과 다산의
운명적 만남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 이승훈(李承薰)은 오늘날까지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승훈의 존재는 한반도에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전파한 이벽과 거의 같은 존재로 대우받고 있다. 이처럼 이승훈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지만 실제 그가 정조시대 문화운동의 한 복판에 있었으며, 다산 정약용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따라서 정약용과 이승훈의 관계를 밝히면서 그의 업적을 조명하는 것이 다산 정약용의 업적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부친 이동욱과 정조시대 초계문신이자 재상감으로 평가받던 이가환의 누이였던 어머니 여주 이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756년(영조 32)은 영조가 재위하던 시기였지만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때였다. 이승훈 보다 4년 먼저 정조가 태어났고 정약용은 이승훈보다 6년 뒤에 태어났다. 결국 이 세사람은 거의 동시대 인물로 깊은 인연으로 연결될 운명이었다. 그의 집안인 평창 이씨는 당파적으로 남인이었는데 조부였던 이광직이 성호 이익 선생의 집안과 혼인을 하여 그의 조카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이승훈의 어머니인 여주 이씨는 이가환의 친누나로서 일찍부터 실학을 연구하고 실천한 자신의 집안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 위한 실천적 삶을 살았던 자신의 삼촌 이익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었던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아들은 이승훈에게 이익과 자신의 남동생인 이가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요즘 시대와 달리 전근대사회에서 가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경기도 일대의 남인들은 소수자였기에 더더욱 그 끈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찍부터 영조의 기대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영조는 이동욱과 함께 다산의 부친인 정재원을 총애하였는데 아마도 이들은 조정에 출사하여 더욱 가까워졌을 것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사돈관계를 맺게 되어 이승훈과 정재원의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로서 이승훈은 나주 정씨 집안의 식구가 되었고 정약용, 정약전 등 당대를 풍미할 걸출한 인물들과 새로운 세상을 여는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다산과 이승훈의 운명이었다,
북경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영세받고 귀국후 정약용, 김범우 등에 영세
20세부터 저명한 석학들과 사귀면서 학문과 경서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1780년(정조 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아마도 이는 한해 전에 있었던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였던 영향이 컸을 것이다.
1779년(정조 3)에 있었던 천진암 강학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성립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며, 이 강학회에 참석했던 인물들은 훗날 천주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이승훈은 정약전, 정약용 등 처갓집 형제들과 함께 강학회에서 새로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천주교를 받아들이면서 내세에 대한 고민속에서 진사시험만 합격하고 문과에 합격하여 조정에 출사하는 것을 덧없이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건 그는 더 이상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고 오로지 수행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당시 조선의 젊은 선비들은 모두 북경에 다녀오는 것을 소망하였다. 이미 노론 계열의 젊은 실학자였던 박제가, 이덕무 등이 북경을 다녀왔기에 남인의 젊은 학자들도 북경에 다녀오고 싶어하였다. 하지만 이벽이 이승훈에게 북경에 다녀오기를 권고한 것은 단순히 북학(北學)의 개념속에서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고 오라는 것이 아니라 북경의 천주교회에 다녀오기를 기원하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승훈에게 북경에 갈 기회가 찾아왔다.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이 1783년(정조 7)에 동지사(冬至使) 사행단에 서장관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이승훈은 이동욱의 자제군관으로 선발되어 북경에 갈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조선시대 북경으로 사행을 떠나는 고위 관리들은 자신의 친척 중의 한명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박지원이 과거에 합격한 조정의 관리가 아니었음에도 북경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촌형인 박명원이 사행단의 단장이었기에 그의 자제군관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라몽(Grammont : 梁棟材) 신부를 만나 그에게 수학을 비롯한 서양 과학 서적을 얻고 천주교 교리를 습득한 후에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기념비적인 일이 생긴 것이다. 그가 어떻게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게 되었는지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에서 건너온 젊은이의 신앙적 열기에 그라몽 신부가 감동하여 영세를 준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귀국하던 시기 조선에서는 이벽을 중심으로 자생적인 천주교 교리 연구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이승훈의 존재는 거의 사제의 수준이었다. 이승훈은 그해 겨울 이벽·정약전·정약용·권일신·이존창·홍낙민 등과 역관 최창현·김범우 등에게 영세를 주었고 이로서 곧바로 신앙집회를 열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한국 천주교회가 성립된 것이다.
정약용은 이승훈이 자신의 친누이의 남편이자 학문적 동반자였기에 그가 말하는 천주교 신앙에 적극적이었다. 정약용이 훗날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에 얼마나 이승훈에 대한 신뢰가 컸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승훈이 단순히 천주교를 전파한 신앙인으로서가 아니라 평창 이씨 가문과 여주 이씨 가문의 실학적 기풍을 실천하고 노력한 것을 그의 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성호 이익 선생이 직접 논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던 것을 알고 있었던 이승훈은 평등 정신속에 신분 차별만이 아닌 남녀의 차별도 없애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분 고하를 가지지 않고 천주교를 통해 평등정신을 실천하였다. 아마도 그가 천주교 신앙에 매진하였던 것은 오래도록 고민했던 평등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을 것이다. 1785년에 오늘의 명동성당이 자리잡은 명례동에 있던 김범우 집에서 미사를 드리다 적발되었다. 이때 정약용이 함께 있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형조의 나졸들에게 발각된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김범우가 투옥되고 예수의 성상이 압수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학은 사교(邪交)로 지목받기 시작하였고 이승훈은 사교의 우두머리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조의 총애로 평택현감에 제수 받았다. 정조가 그를 얼마나 총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약용 역시 천주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조정의 논의를 피하게 하기 위해 지방의 수령으로 보내듯이 이승훈 역시 평택현감으로 보낸 것이다. 천주교 신앙 때문에 어머니의 신주를 불사른 사건이 발생하자 사교의 우두머리를 탄핵해야 한다는 상소로 곤궁에 처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친구였다가 그를 배반한 이기경이 ‘사서(邪書)를 열독함은 장차 천하를 뒤집으려는 심산’이라고 모함하였다. 이로 인하여 의금부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어 무죄로 석방되어 평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승훈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이승훈이 부임하고 나서 향교에 들려 낡은 건물 수리만 지시하고 공자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탄핵을 요구하였다. 결국 정조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충남 예산으로 유배했다가 1796년 해배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조의 죽음이었다. 정조의 죽음 이듬해인 1801년 2월9일 이가환, 정약용 등과 함께 의금부에 수감되었고 이승훈은 천주교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2월26일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등과 함께 서소문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시신은 집으로 옮겨졌다가 인천에 매장되었다. 그 뒤 그의 후손들이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으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다만 그가 정약용의 매형으로 정약용에게 성호 이익으로부터 물려받은 실학정신을 전해주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역할은 충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서소문 네거리에서 참수당하기 전에 지었던 절명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달이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이 넘쳐도 연못에 가득하네” 세상과 백성을 사랑했던 자신의 변함없는 마음을 남긴 것이리라! - 김준혁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 2011년 2월 28일, 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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