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10. 고향을 담은 정약용의 별호.

Gijuzzang Dream 2011. 9. 28. 12:55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10) 고향을 담은 정약용의 별호

 

 

12종 25개 별호… 다산의 인생역정 號에서도 엿보여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전경.

정약용 선생은 60대 이후 한강의 다른 이름인 ‘열수’라는 별호를 사용했다. 

 


정약용(1762~1836)의 별호로는 다산(茶山)이 대표적이다.

‘다산’하면 강진을 연상하게 하는, 그의 18년 강진 유배생활을 대표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현재 호(號)는 많이 사용하지 않지만,

전통시대에는 우리에게 이름으로 알려진 휘(諱), 관례 이후 사용하는 자(字)에 비해

벗들에게, 스승에게, 동료에게 일반적으로 불리던 호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해당 인물의 특징이나 성품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명칭으로 지어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람에 따라 호의 가짓수와 종류도 다르다.

평생 2~3개의 호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수십개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여러 개의 호가 동시에, 또 특정 그룹에게 사용되지는 않는다.

 



■ 12종 25개 별호 사용

특정의 별호가 특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점에서 정약용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많은 종류의 별호를 사용하였다.

그는 약 12종의 호를 사용하였다. 그만큼 세상살이에 부침이 많았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의 호에서 인생역정을 훑어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30대의 죽란산인(竹欄散人),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문암일인(門巖逸人),

여유당(與猶堂),

강진 유배시절의 탁옹(?翁 또는 ?皮族人), 다산(茶山 또는 茶山主人, 茶山樵夫, 茶山樵者),

고향에 돌아온 이후의 열수(洌水), 초계(苕溪), 채산(菜山), 사암(俟菴)이 그것이다.

 

 

그중 고향과 관련된 그의 별호 7종은 다음과 같다.


■ 30대 사용했던 호

철마산인(鐵馬山人)

- 15세 때 과거공부를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 머물면서,

그리고 그 이후 성균관과 관직에 있으면서도 그리운 고향에 대한 마음을 담아 사용한 호이다.

철마산은 집 뒷산으로 쥐 만한 철마가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강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지 만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에는

이곳에서 있었던 향사례(鄕射禮)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고랑(皐浪)의 신억(申億)을 향사례의 주인으로, 귀음(龜陰)의 김재곤(金在崑)을 빈(賓)으로,

사사(司射)는 신만현(申晩顯), 사정(司正)은 석림(石林)의 이노화(李魯和) 등이었다.

그 역시 70세의 고로인 형 정약현(丁若鉉), 아들 학연(學淵) · 학유(學遊) 등과

집사(執事)와 사우로 참여하였다.

강진에서 돌아온 후에는 ‘철마산인’과 함께 철마산초(鐵馬山樵), 철마초부(鐵馬樵夫)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문암일인(門巖逸人)

- 양근(현재의 양평)의 ‘문암’은 춘천의 남쪽 20리인 벽계(檗溪)의 남쪽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문암장(門巖莊)이라는 그의 별장이 있었다.

원래 이곳은 김수항(金壽恒)의 아들 김창흡(金昌翕)이 마련하였던 안동 김씨 문중의 전장(田庄)이 있는데,

그와 친분이 있었던 김창흡의 고손 김매순(金邁淳)이 정약용에게 일부를 떼어준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의 그의 전장은 백일갈이의 보리밭과 평평하고 넓어 보이는 논 정도의 규모였다.

1787년 4월 그는 둘째형 약전(若銓)과 함께 이곳에 왔었고,

그해 9월부터는 매년 추수를 위해 수십일동안 문암장(門巖莊)에 머물곤 하였다.

‘일인(逸人)’이란 한 때나마 이곳에서 고단한 세상사를 잊고 전원의 생활에 전념하려는

정약용의 꿈을 담은 것이다. 1819년 아버지의 묘소인 충주 하담(荷潭)을 가면서 들른 문암장에서

“이곳에서의 농사를 40년 전부터 꿈꿔왔다”고 회고하고 있음에서

그의 전원에 대한 생각은 이미 30대 초반부터 있어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유당(與猶堂)

- 39세 때인 1800년(정조 24) 1월 정약용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집에 ‘여유당’이란 당호를 건 공부방을 마련하고, 형제들과 매일 경전(經典) 공부에 열중한다.

‘여유’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

는 뜻으로 《노자》에서의 구절을 따온 것이다.

세상사와 자신에 대한 경계의 뜻이 담겨 있다.

 

 

 

남양주 정약용 선생 생가 뒤에 마련된 묘소.

묘지명에는 ‘사암’이라는 별호가 새겨져 있다.


나는 나의 약점을 알고 있다.

용기는 있지만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하나, 선택해서 할 줄 모르고…

이랬기 때문에 한없이 착한 것만 좋아하다가 욕만 혼자 실컷 얻어먹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성격을 탓해야겠으나 내 또한 감히 운명이라고 말할 것이다.

노자의 말에 ‘여(與)’는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하고,

‘유(猶)’란 사방을 두려워하듯 하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다. 이 두 마디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료해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집 뒷산에서 유래된 철마산인,
별장 문암장서 전원생활을 꿈꿔왔던 그에게 붙여진 호는 문암일인,

관직을 버리고 마재로 돌아와 지어진 여유당…
60대 이후엔 고향집 앞의 한강, 실개천, 정자를 이르는 또다른 이름인 열수, 초계, 채산의 호…
그리고 묘지명에 사암까지…
7종의 별호는 평생 고향에 대한 애틋함을 담고 있다.

그가 〈여유당기(與猶堂記)〉에 쓴 ‘여유’에 대한 이유이다.

30대 초반인 1784년 전후부터 그 뜻을 깨달았지만, 1800년 비로소 당호를 내걸은 것은

위태로운 정조의 병세를 직감하고 그에게 앞으로 닥쳐올 곤경을 예지한 결과로 해석해야 할까.

‘여유’와 같은 그의 세상사에 대한 경계는 평생 그가 지켜야할 잠언이었다.

말년에 사용한 것으로 짐작되는 여유당거사(與猶堂居士), 여유병옹(與猶病翁) 등에서도 그렇고,

자신의 방대한 저술을 《여유당집(與猶堂集》으로 묶은 뜻에서도 그러하다.



■ 60대 이후 사용했던 호

열수(洌水)

- 열수는 한강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두무’, ‘두모’, ‘두미’, ‘우천(牛川)’, ‘소내’ 등으로 불리는 한강 변,

‘두물머리’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두 물이 하나로 합쳐져 큰 줄기로 뻗는 것을 보고 자라면서

정약용은 유학의 도학적인 전통 위에 고증학(考證學)과 서학(西學)을 받아들여

실학을 하나의 체계로 종합할 것을 계획하였다.

또 1818년(순조 18) 강진에서 돌아와서도 매일 두 물의 하나됨을 보며

자신의 학문 역시 그러기를 도모하며, 그 작업에 열중하였다.

이 호는 주로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 환갑 전까지 사용하였다.

열수옹(洌水翁), 열상노인(洌上老人), 열로(洌老), 열초(洌樵)도 함께 사용하였다.

초계(苕溪)

- 초계는 마재에 있는 다산의 집 앞을 흘러 한강으로 들어가는 실개천인 초천(苕川)을 끼고 있는 골짜기다.

평소에는 실개천의 물량이 많지 않아 즐기고 천렵하기도 적당하였지만,

여름철 물때를 잘못 만나면 불어난 물이 마을을 휩쓰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그는 초계 끝에 있던 나루인 두모포(豆毛浦)를 이용하여

서울이나 천진암, 또는 남한산성 등 주변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검단산(黔丹山)의 꽃구경, 수구정(隨鷗亭)의 버들 구경, 남자주(藍子洲)의 답청(踏靑),

흥복사(興福寺)의 꾀꼬리 소리, 월계의 고기잡이, 석호정(石湖亭)의 납량, 석림(石林)의 연꽃 구경,

유곡(酉谷)의 매미 소리, 달빛 아래 사라담의 뱃놀이, 천진암(天眞庵)의 단풍 구경,

수종산(水鍾山)의 눈 구경, 두미협(斗尾峽)의 고기 구경, 송정(松亭)의 활쏘기 등은

그가 초천(苕川)에서 사계절 때맞추어 즐길 수 있는 놀이이기도 하였다.

그는 1781년에는 시사(時事)에 말려들어 문초를 받아 거동이 어려운 부친을 모시고

두모포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또 자신이 바쁜 벼슬살이에 말미를 얻어서, 또는 파직되어 돌아올 수 있던 유일한 곳은 고향 ‘초계’였다.

부모와 형제자매, 처자식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강진에서도 고향을 잊지 못해 손수 그려 벽에 걸어두고 매일 보았다는 초계도(苕溪圖),

자신이 사용한 별호와 함께 고향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있다.

채산(菜山)

- 정약용은 초천의 집 앞에 새로 작은 정자를 지었다. 그 이름이 채화정(菜花亭)이었다.

‘채화(菜花)’는 집 앞 텃밭에서 가꾸던 채소에 핀 꽃을 뜻한다고 한다.

그는 채소에 만개한 꽃을 찾아 봄바람과 함께 날아온 나비를 보고

정자에 ‘채화’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하는데,

고조부가 지은 정자인 임청정(臨淸亭), 또 그 이름이 바뀐 송정(松亭)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풀과 꽃, 그곳에 모여드는 나비 등을 보며 전원에 만족하려 했던 그의 마음을 담고 있다.


■ 또 다른 시대를 기약하는 호

사암(俟菴)

- 환갑을 지나 인생을 정리하며 지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비로소 사용한 별호이다.

그는 강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환갑을 맞는다.

60여 년 동안의 삶을 정리하며 자신이 묻힐 땅을 스스로 정한 후,

그곳에 함께 묻을 자신의 묘지명도 짓는다.

유배에서 풀려서도 관직에 나가지 못해 강진에서 심혈을 들여 정리한 자신의 개혁에 대한 생각들을

실천할 기회마저 잃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간의 저술을 다시 정리하고

후세들에게 이를 전하여 자신의 실천과 개혁이 실행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호를 ‘사암’이라 하고,

방대한 자신의 저술을 제자들과 함께 정리한 것이 《사암경집(俟菴經集》과 《사암별집(俟菴別集)》이다.

이들은 《여유당집》으로 최종 정리되기 이전 마지막 정리본이라고 짐작되는데,

‘사암’이란 그간의 삶이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다음 시대를 기약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계(俟溪)도 드물게 사용하였다. 

 

김성환 실학박물관 학예팀장

- 2011년 3월 28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