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12. 형이자 스승인 정약전

Gijuzzang Dream 2011. 9. 28. 12:54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12. 형이자 스승인 정약전

 

 

정조가 지극히 아껴주었던… 우리 역사상 가장 특별한 형제

 

 

 

   
필자 일행이 천진암 일대를 둘러보고 있다. 정약전은 한국천주교회의 밑바탕이 된 천진암 강학회를 주도한 권철신을 스승으로 모시며 사제 관계를 이어갔다. 

다산에게 있어 인생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국왕 정조가 정답이다.

국왕 정조로 인하여 다산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중책을 떠맡았고,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었다.

그러나 정조 외에 다른 그 누가 다산에게 가장 큰 영향과 운명을 같이 했을 것이라 물어보면

너무도 당연하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바로 둘째형 정약전이다.

정약전은 다산의 부친인 정재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 아들인 정약현은 정재원의 첫번째 아내의 소생이었고,

정약전은 두번째 부인인 해남 윤씨의 아들이었다.

해남 윤씨는 조선후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셋을 낳았다.

형제가 유명해질 수는 있겠지만 이처럼 삼형제가 모두

시대의 획은 그은 인물로 성장하고 삶을 살아가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삼형제는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역할을 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약용의 형제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특별한 형제라고 할 수 있다.

 



정약전은 1758년(영조 34) 3월1일 고향인 마재에서 태어났다.

자는 천전(天全)이며, 호는 일성루(一星樓), 재호(齋號)는 매심(每心)이었다.

일반적으로 정약전에 대하여 손암(巽菴)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 호는 흑산도로 유배가고 나서 스스로 지은 호이다.

‘손(巽)’은 입(入) 즉 ‘들어간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가면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바다 안의 바위 즉 ‘섬으로 영원히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아 손암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니 손암이라는 말이 참으로 슬픈 것이 아닐 수 없다.

정약용이 지은 정약전의 묘지명에 의하면

정약전은 어려서부터 범상치가 않았고 자란 뒤에는 더욱 기걸하다고 하였다.

다산이 어린 시절 오로지 공부만 하여 활쏘기와 사냥 등 몸으로 하는 일에 익숙치 않았다면

정약전은 천하의 호걸로 무예와 학문 모두를 즐겼다.

더구나 성품이 호탕하여 신분을 가리지 않고 벗들과 사귀었다.

이러한 형이 못마땅해서인지 다산은 정약전에게 친구 사귀기를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넌지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이때 정약전은 “너는 도성의 귀족 자제들과 사귀려하고 나는 도성의 호걸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는데

나중에 우리가 죽을 위기가 생기게 되면 그때 누가 친구를 도와주는지 보자꾸나”라고 하였다.

훗날 정조가 돌아가시고 다산의 형제들이 온갖 고초를 겪을 때

귀족 자제들은 모두 자신들의 몸을 사리느라 도와주지 않았지만

정약전의 친구들인 도성의 호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정약전을 돕고자 하였다.

이것이 바로 신분과 지위로 인간을 평가하지 않는 정약전의 매력이었다.

정약전이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스승 권철신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권철신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생적 연구와 노력을 통해 신앙체계를 만들었다.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 천진암 강학회였다. 이 천진암 강학회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권철신이었다.

정약전은 권철신과 정식으로 스승과 제자의 사제관계를 맺었다.

권철신은 성호 이익의 막내 제자로서 이익의 실학사상을 한몸으로 전수받은 학자였다.

그러니 정약전은 성호 이익의 학통을 그대로 이은 실학자였다.

다산이 쓴 권철신 묘지명에서 그가 얼마나 평등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인물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다산이 권철신의 집에 가서 한달동안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가 젊은이들을 고루 평등하게 대해

누가 그의 아들이고 조카인지 한달 동안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품을 가진 인물에게 학문을 배우고 삶의 지표를 받았기 때문에

정약전은 일반적인 선비들과 기질이 달랐다.

과거를 중요시 여기지 않던 정약전은 이익의 학문을 기반으로

주자(朱子)의 도학과 그 근원을 연구하여 공자(孔子)에 이르러 끊임없이 공부를 하였다.

이와 더불어 천주학을 신봉하지 않았지만 서학(西學)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다.

정약전은 천진암 강학회가 끝나고 매제인 이승훈과 더불어

서대문 밖에 나가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면서 학문을 논하였다.

이때 참여하였던 백 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정약전의 학문에 감동을 받아

“삼대(三代)이 의문(儀文)이 찬란하게 다시 밝혀졌다”라고 하였다.

이만큼 정약전의 학문이 높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약전의 묘.
이처럼 학문이 깊었던 정약전은 주변의 권유에 의하여 1783년(정조 7) 가을 사마시에 합격을 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대과(大科)에 뜻을 두지 않았다.

 

조선시대 선비라면 누구나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을 생각하는데 정약전은 그럴 뜻이 없었다.

그는 대과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학문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연구를 하였다.

당시 정약전은 이벽과 교유하였다.

물론 다산의 형제들 모두가 이벽을 만났다.

큰형인 정약현의 매제인 이벽은 당시 서양학문의 전수자였다. 정약전은 이벽의 역수(曆數)에 대한 강의를 듣고 기하학(幾何學)에 심취하였다.

당시 서양의 수학과 천문학 그리고 서양역법이 우리 사회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들 학문은 동양의 역법과 달리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척 신선하였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정약전은 서양 역법을 이해하고

거기에 나아가 기하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서양학문을 연구하다가

정약전은 자신의 학문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과거를 보기로 결심하였다.

1790년(정조 14) 정조는 후궁인 수빈 박씨로부터 원자(元子)를 보았다.

이 원자가 바로 훗날의 순조(純祖)다.

정조는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인 문효세자가 의문사하고 난 이후 계속해서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후계자를 보아야 자신이 상왕(上王)이 되어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존하고

수원으로 정치적 기반을 옮기는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는데 계속해서 왕자가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원자가 태어나자 증광별시를 열어 새로운 인재를 선발하였다.

정약전은 국왕 정조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국왕의 측근에서 사랑을 받고 있었던 아우 정약용으로부터

정조의 고민과 꿈을 들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정약전은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노론이 주도하는 정국에서 정조를 돕기 위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약전은 이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얻었다.

정조는 정약전의 학문을 인정하여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선발하였다.

규장각 초계문신은 학자 중의 학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였고,

특히 정조는 이들을 기반으로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형제가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들어간 사례는 오직 정약용의 형제들밖에 없을 정도다.


형제가 모두 시대에 획을 그은 인물로, 정약전은 1758년 마재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천하의 호걸로 무예와 학문 모두를 즐겼고

호탕하여 신분을 가리지 않고 벗들과 사귀었다.

천진암 강학회서 이익의 제자 권철신을 만나 실학사상을 한몸으로 전수받았고

서학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정약전은 정조를 돕기 위해 증광별시서 1등으로 합격,

형제가 모두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들어가는 영예를 안았다.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던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조정출사를 시기하는 노론들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영원히 중앙정계서 추방당했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갔고 <자산어보>라는 실학의 명저를 완성하고

동생과 상봉하는 날을 기다렸지만 끝내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약전의 조정 출사를 시기하는 노론 신하들은

1795년 가을에 박장설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남인의 영수격에 해당되는 이가환이 시험관으로 엉터리 답안을 제출한 정약전을 합격시켰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정약전을 공격하는 것이지만

실제는 이가환을 제거하고 남인을 수렁으로 넣겠다는 것이다.

정조는 이 사안을 무척 중요시 여겼고 본인이 직접 정약전의 답안지를 확인하였다.

답안에 아무런 문제가 없자 거꾸로 박장설을 유배 보내는 것으로 마감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정약전은 노론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약전은 자신의 아우 정약용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던 도와주는 인물이었다.

그는 정약용이 서학문제로 좌천되어 임무를 맡았던 금정찰방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죽란시사를 만들었을때 시사의 모임회원이 되어 아우를 격려하였다.

당시 죽란시사는 채홍원, 이치훈, 윤지눌 등 1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과 더불어 정약전은 함께 시를 쓰는 것과 더불어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였다.

정조는 정약전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를 친정사관(親政史官)으로 임명하였고,

이조를 비롯한 육조(六曹) 전체에 그를 중용하라고 하명할 정도였다.

이로 인하여 정약전은 성균관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어

올바른 무반을 선발하고 임명할 수 있는 지위에 이르게 되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약전의 준결한 풍채가 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고 평가하고

1798년(정조 22)에 영남인물고 편찬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약용 형제를 지극히 아껴주던 정조가 1800년 6월18일에 승하함으로써

이들은 영원히 중앙정계에서 추방당했다.

정약전은 신유사옥(1801, 순조 1)이 일어나 정약용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천 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가 나오자

끝내 사형을 시키지 못하고 머나먼 남쪽으로 유배를 보냈다. 

 

두 형제가 나주 율정(栗井)에서 한명은 흑산도로, 한명은 강진으로 떠나야 했다. 

이날이 이들 형제가 서로의 모습을 본 마지막이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다가 결국 그곳에서 16년 만에 생을 마쳤다.

동생을 그리워하면서, 동생이 새로운 책을 저술하면 논평과 더불어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면서

형제의 상봉을 기다렸지만 끝내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덧이 없어 저술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흑산도 바다에서 어류들을 보며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실학의 명저를 완성하였다.

그 후 다산의 천재 형제들 중 한 명인 그가 흑산도 옆 우이도에서 동생을 기다리다 끝내 눈을 감았다.

우리 역사의 비극이다. 

-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 2011년 4월 11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