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14. 성호 이익과 다산

Gijuzzang Dream 2011. 9. 28. 12:53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14) 성호 이익과 다산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스승과 제자

… 경세치용 ‘실학’을 완성시키다

 

 

   
성호 이익 선생 기념관.


 

위대한 사상가 다산의 참된 스승은 누구일까.

어느 위대한 스승이 있었기에 다산을 키울수 있었을까. 이는 늘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다산에게는 공식적인 스승이 없기 때문이다.

홀로 공부해서 대학자의 경지에 오른 다산은 생각할수록 대단한 인물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다산이 위대한 경세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영향을 준 인물이 바로 성호 이익 선생이다.


실학자로 잘 알려진 성호 이익(1682∼1764)

현재의 감사원장과 비슷한 관직인 대사헌 이하진의 아들로 태어나

숙종 31년(1705)에 증광문과를 보았으나 낙방하고

그 이듬해에 형인 이잠이 당쟁으로 희생된 것을 계기로

벼슬을 단념하고 시골에 머물면서 평생을 학문에 전념했다.

이익은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파의 지반을 굳혔으며

사회의 모든 현실을 역사적으로 고찰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실증적 · 비판적인 태도로 학문에 접근해야 한다는 이론을 세운 사람으로

모든 학문은 실생활에 유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은 성호 이익의 사상을 다산이 받아 경세치용의 실학을 완성하였다.


다산은 10살부터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아버지 정재원이 관직을 그만두고 마재의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한가한 시절을 만난 정재원은 아들 약용을 공부시키기로 하였다.

러니 실제 다산의 첫 스승은 아버지 정재원 이었던 것이다.

이때 다산은 경사(經史)와 고문(古文)을 꽤 부지런히 읽을 수 있었고, 또 시율(詩律)로 칭찬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공부한 것이 훗날 뛰어난 명시를 쓴 원동력이 된 것이다.

다산이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게 된 것은 16세인 1778년(정조 1)이었다.

일년전인 15세에 다산은 풍산 홍씨와 결혼을 하였는데

마침 아버지 정재원이 호조좌랑이 되어 한양으로 가게 되었다.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서 이듬해에 당대 학문의 대가인 이가환을 만나게 되었다.

이가환은 정조가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의 뒤를 이어 정승으로 쓰고자 했던 인물로

남인의 학문과 정치의 중심이었다.

이가환은 성호 이익의 종손(從孫)으로서 기호남인의 명문가였다.

이가환의 조카가 이승훈이었고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성호 이익 가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다산이 서울로 올라가

이가환을 만나 성호의 문집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한 학자가 선대 학자의 문집을 보았다는 평범한 사실이 아니라

성호의 학문과 사상이 다산에게로 전해지는 위대한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었다.

다산은 이미 돌아가셔서 한 번도 뵌적은 없지만 성호 선생을 스승으로 생각하고 그를 위한 시를 남겼다.



학식이 넓고 깊은 성호 선생을 / 博學星湖老
백대의 스승으로 나는 모시네 / 吾從百世師
등림에 과일 열매 많이 달렸고 / 鄧林繁結子
교목에 뻗은 가지 울창도 하다 / 喬木鬱生枝
강석에선 풍도가 준엄하시고 / 講席風儀峻
투호할 땐 예법이 밝기도 했지 / 投壺禮法熙
특출하심 속안을 놀래었으나 / 孤標驚俗眼
쓸쓸히 묻히신 건 어인 일인가 / 歷落竟何爲


다산은 성호를 퇴계 이황의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학문이 한반도로 들어와 신라의 설총이 전수받았고,

설총의 학문을 포은 정몽주가 이었으며,

정몽주의 학문이 퇴계 이황으로

그리고 이황의 학문이 성호 이익에게 전하여졌다고 하였다.

물론 성호의 학문이 자신에게 전해지기를 희망하면서 스스로 조선 유학의 법통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아버지 정재원에게 보낸 편지 전문.

 

그럼에도 다산은 성리학만을 공부하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탁월한 건축가이자 토목가이기도 하였다.

다산은 잘 알려져있듯이 한강의 배다리를 설계하고 시공까지 책임진 인물이다.

200여 년 전에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 생각을 한 것은

단순히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오늘날 토목건축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도 기획하고 시공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한강에 배다리를 놓을 수 있는 학문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은 오로지 성호 이익 때문이다.

성호 이익 가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산은 16세에 그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시대를 초월한 사랑이 시작되었다.
다산은 성리학 뿐만 아니라 탁월한 건축가로, 토목가로 200여 년 전 한강 배다리를 설계, 시공하였다.

이는 모두 이익의 영향이며, 다산이 가장 곤궁에 처해 있을 때

선생의 학문을 공부하면서 자신을 추스리고 더 높은 경지에 다달았다고 한다.
성호 선생을 통해 백성을 위한 실질적 학문의 요체를 깨달은 다산은

죽는 날까지 실학 연구에 전념하였고 우리 실학의 큰 보배이자 역사적 자산인 ‘여유당전서’를 남겼다.


다산의 연보에 의하면 그가 23세에 『성호사설』을 보면서 ‘상위수리(象緯數理)’를 배웠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과학과 수학을 공부한 것이다. 실제 성호의 손자인 이가환은 당대 수학의 천재였다.

이가환이 수학의 천재가 된 것은 가학(家學)의 하나가 수학이었기 때문이다.

즉 성호 이익의 집안은 단순히 성리학만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실제 삶을 돕기 위한 다양한 기구를 만들기 위해

건축학, 토목학, 수학 천문학 등을 집안 사람들 모두에게 가르치고 계승하게 하였다.

그러한 내용들이 성호사설에 담겨있었고 자연스럽게 다산에게 이어졌던 것이다.

다산은 성호 이익을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성호의 제자인 권철신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았다.

다산은 양평에 거주하고 있던 대학자 권철신 학파의 일원으로 천진암 강학회에도 참여하였다.

다산의 형인 손암 정약전은 권철신을 스승의 예로 받들어 그의 제자가 되었지만

다산은 오로지 이익의 학문을 계승하겠다는 생각으로

권철신을 존경하는 대학자로 모셨지만 스승의 예로서 모시지는 않았다.

   

다산이 성호 이익의 학문을 심도있게 공부하게 된 것은 뜻밖의 사건 때문이었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 사건이다.

당시 조선에 서학이 퍼져나갔고 서학의 신자들 상당수가 남인 계열이었다. 이들은 조선에도 신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북경의 천주교회에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온 신부가 주문모였다.

주문모 신부가 천주교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체포되어 상당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천주교인으로 몰린 정약용을 도와주기 위해 정조는 그를 오늘날의 홍성 일대인 금정찰방으로 보냈다.

일세를 풍미하는 천재학자가 충청도의 작은 고을에서 관리들의 출장을 위한 말이나 키우고 대여해주는 관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다산에게는 금정찰방으로 가게 된 것이 성호 이익의 학문을 심도있게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성호 이익의 증손인 목재 이삼환이 홍성 일대에 거주하였고, 다산은 그를 온양의 석암사에서 만났다.

이삼환은 이미 충청도 내포 일대에 명망높은 선비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삼환과 더불어 국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정약용이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었기에 서산, 홍성, 당진 등 내포 일대의 명문자제들이 모여 새로운 강학회를 하게 되었다.

석암사에서 봉곡사로 자리를 옮겨

성호 이익의 사단칠정론과 토지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함과 더불어

정약용은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성호유고(星湖遺稿)’를 받아와서

‘가례질서(家禮疾書)’부터 교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다산은 강학회를 하며 성호 이익을 그리워하는 시를 남겼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호자시여 / 郁郁星湖子
성명이 드러나서 아름답구나 / 誠明著炳文
한없이 넓은 범위 어안이 벙벙 / O漫愁曠際
빈틈없이 치밀함 또한 보이네 / 芒忽見纖分
하찮은 나의 출생 시기가 늦어 / O末吾生晩
큰 도를 얻어 듣긴 아련한 처지 / 微茫大道聞
다행히 끼친 은택 입었지만은 / 幸能沾膏澤
애석할사 별 구름 보진 못했네 / 惜未覩星雲
진기한 글 향기를 물씬 풍기고 / 寶藏饒遺馥
사랑 은혜 참으로 생명 건졌네 / 仁恩實救焚
한 분의 노선생에 그 규범 남아 / 典刑餘一老
연세 도덕 대중을 굽어보는데 / 齒德逈千群
도 없어져 노년의 한탄이라면 / 道喪窮年歎
벗 찾아와 늘그막 기쁨이로세 / 朋來暮境欣
성옹 글 교정으로 그리움 풀어 / 校書酬耿結
책 지고 온 고생이 즐겁고말고 / 負O喜辛勤
소경이 길을 가듯 더듬거리면 / 猶有安冥O
부질없이 노경에 접어들 따름 / 徒然到白紛
우리 함께 힘쓰자 어진 친구들 / 勖哉良友輩
이곳에서 조석을 보냄 어떠리 / 於此送朝O


성호유고를 교정하던 정약용은 다시 정조의 부름을 받아 조정에서 일하느라 잠시 손을 놓았다.

그가 다시 성호의 학문을 공부하게 된 것은 정조의 죽음 이후 경상도 장기로 유배를 갔을 때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성호의 학문이 다산을 살렸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이 가장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성호의 학문을 공부하면서

자신을 추스리고 더 높은 경지에 다달었기 때문이다.

장기로 유배가 있던 다산은 성호가 모은 1백마디의 속담에 운을 맞춰 백언시(百諺詩)를 만들었다.

대학자가 속담을 이용해서 시를 만들었다니 한편으로 이해가 안갈 것이다.

속담은 그저 평민들이 쓰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속담은 우습게 볼 이야기거리가 아니다.

 

성호 이익은 속담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삶과 철학에서 나온 말씀으로 생각했다.

다산은 유배 가 있는 동안 성호 이익이 왜 속담을 강조하였는지를 깨닫고

이를 한차원 높이 승화시켜 속담을 이용하여 시를 지은 것이다.

어린 시절 부친 정재원 밑에서 시를 공부한 것이 성호 이익의 속담과 결합되어 새로운 시가 탄생한 것이다.

성호 이익을 통해 백성을 위한 실질적 학문의 요체를 깨달은 다산은

이후 죽는 날까지 그 양심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실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로 인하여 1표2서를 포함한 ‘여유당전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

그리고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는 우리 실학의 보배이자 역사의 자산이다.

그리고 이 학통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 2011년 5월 9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