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
조선 선비들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리는 리더십 부재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일반 국민이 군소리 없이 따라줄 시대적 대의도 없다.
이해관계가 최고 가치가 되고 정치는 표로 직결되는 현실에서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표심잡기에 혈안이 되어 여야를 불문하고 포퓰리즘이 난무하고 있다.
국민들은 의식 속에서 기대하는 정치인의 이상형과
자신의 손으로 찍는 표가 겉돌고 있음을 잘 알면서도 대부분 이해관계로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국민의 리더십에 대한 형상화는 그 나라의 역사문화 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한국형 리더십의 원형으로
현재 우리와 가장 가까운 전통시대인 조선시대의 선비에 대하여 주목하는 것이다.
조선은 지식에 기반을 둔 문치주의(文治主義) 국가로 자급자족하는 농경사회였다.
문치(文治)란 무치(武治)와 대척점에 있는 용어로 현재 우리에겐 낯설지만 조선시대엔 흔히 쓰는 용어였다.
문치는 글로써 다스린다는 뜻이니 그 중심역할은 당연히 당대의 지식인인 선비의 몫이었다.
선비의 복수개념이 사람이다. 붓을 쓰는 선비출신 관료,
즉 사대부가 논리로 하는 정치였고 그 논리의 기준이 명분(名分)과 의리(義理)였다.
명분과 의리로 문치주의의 중심역할 담당
명분(明分)이란 글자 그대로 이름에 걸맞은 분수이다.
그 이름에 걸맞은 분수를 지키는 것이 명분을 지키는 것이다.
‘왕의 남자’라는 영화에 나오는 공길이라는 광대가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라 했다는 실록기사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이니 곧 명분을 말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광대도 명분을 알았건만 이제 명분이라는 용어는 핑계로 전락하였다.
명분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중요하다는 것은 알아서 “명분을 만들어보라”고 한다.
핑계거리를 찾아보라는 말이다.
의리(義理)란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하고 옳은 도리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리를 지켜야 하고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의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의리란 놈이 여러 가지 외피를 입고 인간사에 나타나기 마련이어서 까딱하면 실수하기 십상이다.
특히 탐욕에 눈을 가리면 의리란 보이지 않게 되는 속성을 가진 존재여서
의리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탐구와 수양이 필요하다.
오늘날 의리는 깡패용어로 전락하여 왜곡되고 있다.
조선시대 관료체계에서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삼사(三司) 등에서 글로써 벼슬사는 문한관(文翰官)을
'청직(淸職)'이라 하여 선비들이 선망하는 자리였으나 문치주의의 발현이다.
청직은 관료사회의 꽃으로 정승 판서 등 고위직에 진출하는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직이기도 하였다.
삼사의 구성원은 언관(言官)으로서 바른 말 하는 것이 중요 임무이고
청의(淸議: 선비사회의 여론)를 주도하거나 대변하기도 하였다.
글과 말은 모두 논리가 있어야 함은 불문가지다. 그 논리의 기준이 명분과 의리였다.
동양에서는 일본에 대표적인 무치의 나라였다.
칼을 쓰는 무사, 즉 사무라이가 중심역할을 하였으니 일제강점기 무단정치의 전통이 거기 있었다.
유럽의 중세 봉건영주들도 거의 무력에 의존하였으므로
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전쟁이 나면 귀족이 앞장서서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었고,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처럼 회자되고 있다.
아마도 동서고금의 리더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일 터이다.
조선시대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 중기 30여 년 간격으로 일어난 왜란과 호란은 조선 땅을 전쟁터로 한 당시의 세계대전이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이나 계속된 왜란으로 전국토가 초토화되었지만
결국 일본 침략군을 국토에서 완전히 몰아내어 승전하였다.
그 저력은 중앙에 진출해 있던 사림관료와 지방에 남아있던 선비들의 연합작전에 있었다.
승전의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병활동은
향리에 있던 저명한 선비들이 의병장이 되어 국민군인 의병을 조직하여
중앙에 진출해 있던 사림관료들의 영향권에 있던 관군과 연합작전을 펼친 것이다.
왜란 후 훈구파가 완전히 도태되고 사림파의 집권이 가능해진 것은
한마디로 선비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 수 있는 의병활동의 결과였다.
의병장을 가장 많이 배출한 북인정파의 광해군 정권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병자호란은 불과 2개월 전쟁으로 의병이 남한산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끝났지만
삼학사나 김상헌 등 선비관료들, 즉 사대부들의 기개와 지조 지킴은
호란 후 청과의 관계설정에 기여한 바 크다.
국난 때 선비들 의병 조직 일본군과 맞서 싸워
풍운의 조선 말기 1895년 국모 명성황후가 정궁(경복궁)에서 시해되는 국치(을미사변)를 당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물밀 듯이 일어났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거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선비가 난세를 당하면 숨어버리는 것이 기본처세이지만
국망(國亡)에 이르러서는 소극적인 은둔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의를 들어 올려 적을 쓸어버리자(擧義掃淸)'는 기치 아래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구차하게 연명하느니 차라리 선비의 지조를 지켜 자결하거나 해외에 망명하였다.
국내에서 의병운동을 하던 이들은 나라가 망하자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원류가 되었다.
가장 소극적인 방법이 은일(隱逸)로 낙향하여 숨어버리거나
교육 사업에 투신하여 인재를 양성하며 훗날을 기약하였다.
의병장은 선비였지만 대부분의 의병은 민초였다.
향촌사회에서 존경받는 선비가 의롭게 기치를 들면 백성들이 호응하여 벌떼처럼 일어나
선비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국가를 위하여 의로운 전쟁을 하며 의롭게 죽어간 것이다.
선비들의 리더십과 향촌사회의 신망이라는 후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난에 국민들이 이렇게 호응하여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는 세계사에서도 흔치 않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베트남의 베트콩 정도가 손꼽을 만하다.
양란 후 조선 후기 200년 이상의 평화기에
선비는 평화와 안정을 최고 가치로 삼은 농경사회에서 왕도정치를 지향하였다.
왕도는 패도(覇道)와 대비되는 말로 힘으로 억압하고, 무력으로 누르는 폭압정치가 아니라
교화를 통하여 자율성을 제고하고 명분과 의리로 설득하며 포용하는 정치이다.
덕치(德治)로 표현되기도 한다. 평화의 시대 선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청빈과 검약을 미덕으로 삼고 더불어 함께 사는 베풂의 실천이었다.
-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
- 리더십에세이 2011.9. 제26호, 한국형리더십 개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