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고려판 한류' 열풍 / 2000년 전 백제인의 발자국
[흔적의 역사] ‘고려판 한류’ 열풍
“공녀로 끌려갈 때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 자살하는 어린 소녀들도 있습니다.”
원나라의 간섭이 극에 달했던 1335년. 고려 문신 이곡(李穀 · 1298~1351)이 상소문을 올린다.
원나라가 강제로 뽑아간 공녀(貢女)들의 비참한 신세를 대변한 것이다.
기자오(奇子傲)의 막내딸 기씨도 공녀로 끌려갔다(1333년). 한 떨기 꽃다운 14살 때였다.
소녀의 첫 직책은 황제인 순제(재위 1333~1372)의 차와 음료를 주관하는 궁녀였다.
예쁘고 영민했던 소녀는 첫눈에 황제의 넋을 빼앗는다.
“기황후는 은행나무 빛 얼굴에 복숭아 같은 두 뺨,
버들가지처럼 한들한들한 허리로 궁중을 하늘하늘 걸었다.”(원궁사 · 元宮詞)
기씨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황후의 질투가 하늘을 찔렀다.
채찍으로 때리고, 심지어는 인두로 지지기까지 했다.
기씨는 모든 수모를 견뎌내고, 마침내 대원제국의 정식 황후가 됐다(1365년).
이 드라마 같은 ‘출세기’는 대제국 원나라를 충격 속에 빠뜨렸다.
고려판 ‘한류’ 열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연경(燕京)의 고관대작이라면 고려 여인을 얻어야 명가(名家)라는 소리를 들었다.
고려 여인은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며 남편을 잘 섬겼다.”(경신외사 · 庚申外史)
“가장 유행하는 옷은 고려 여인이 황제 앞에서 입는 고려옷이라네.
궁중여인들이 다투어 고려 여인의 옷을 구경하러 가네.”(원궁사)
‘고려여악(高麗女樂)’도 인기를 끌었다.
기황후의 영향 아래 특출한 외모와 재주를 지닌 여성들을 뽑아 가무를 배우게 한 것이다.
“보초 서는 병사들은 고려 언어를 배우네.
어깨동무하며 나지막이 노래 부르니 우물가에 배가 익어가네”
(衛兵學得高麗語 連臂低歌井즉梨 - 연하곡서 · 輦下曲序)
고려 대중가요가 원나라 군인들 사이에서까지 유행한 것이다. 마치 ‘소녀시대’가 전 세계에 K팝 열풍을 이끌 듯이….
아닌 게 아니라 K팝의 K가 코리아,
즉 고려를 뜻하는 말이 아닌가.
경기 연천읍 상리에는 기황후의 것으로 알려진 무덤(황후총 · 皇后塚)이 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등은 “연천현 동북쪽에 기황후 묘가 있고, 지금은 석물(石物)이 있다”고 기록했다.
1990년대 중반 이우형 국방문화재연구원 팀장이 다 쓰러져 가는 무덤가에서 석물 2기(사진)를 수습했다.
이곳에서 고려판 ‘한류’와 ‘K팝 열풍’의 선구자인 기황후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것은 어떨까.
- 이기환, 문화 · 체육에디터
- 경향신문, 2011. 8.10
2000년 전 백제인의 발자국
1999년 8월 어느 날.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은 풍납토성 성벽을 잘라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다 뜻밖의 흔적을 발견했다.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뻘층에 남긴 발자국이었다.
마치 양생 중인 콘크리트에 실수로 발자국을 찍은 것과 같다
풍납토성은 한성백제(BC 18~AD 475) 왕성으로 지목되고 있다.
백제 시조 온조왕(재위 BC 18~AD 27)은 BC 6년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백제는 AD 200년 무렵까지 최소한 2차례에 걸쳐 성을 쌓았다.
고고학자들은 성의 축조에 연인원 450만명을 동원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흙으로 쌓았지만 송곳으로 찔러도 끄떡없는 판축토성이었다.
진흙 · 모래 · 나뭇잎 · 나무껍질을 겹겹이 뻘흙과 함께 다졌다.
이곳이 바로 발자국이 확인된 뻘층이다.
당대 첨단기술이었던 부엽공법(敷葉工法)은 훗날 일본 규슈와 오사카로 수출됐다.
그렇다면 발자국은 당대 최고의 토목기술자가 남긴 것이었을까. 과연 그럴까.
어쭙잖은 지도자가 왕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폼’ 잡는 것이다.
진나라 2세 황제(BC 210~BC 207)가 아방궁과 만리장성을 완성하려 했다.
그러자 “제발 그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황제가 쏘아댔다.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은 내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헛소리냐.”(<사기> ‘진시황본기’)
<사기(史記)>는 “사람의 머리로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人頭畜鳴)”고 장탄식했다.
결국 진나라는 대륙을 통일한 지 15년 만에 붕괴된다.
징집령을 받아 끌려가던 진섭(陳涉)이 반란을 일으키자 스르르 무너진 것이다.
신라 문무왕(661~681)도 성을 새롭게 쌓으려는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하지만 의상대사의 한마디에 뜻을 접었다.
“들판의 띠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복된 왕업이 영원히 계속됩니다.”
물론 백제의 창업주 온조왕에게는 도성을 건설하는 원칙이 있었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게(儉而不陋 華而不侈)”(<삼국사기>)였다.
하지만 노역에 시달려온 백성 입장에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을 터.
AD 23년에는 백제의 15살 이상인 동북쪽 백성들이 도성의 보수를 위해 징발됐다.
혹여 이분들 가운데 발자국의 주인공이 있지 않을까.
고향에 두고 온 부모 · 형제를 그리다 아차 실수로 발도장을 찍어놓은….
그리고는 남이 볼세라 잽싸게 덮어버린 바로 그분….
- 이기환, 문화 · 체육에디터
- 경향신문, 2011. 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