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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묘 - 고종의 밀서 들고 헤이그로 떠난 특사

Gijuzzang Dream 2011. 8. 17. 21:19

 

 

 

 

 이준 열사 묘

고종의 밀서 들고 헤이그로 떠난 특사

 

 

이준 열사 위훈비(묘역 입구)(좌), 묘역 입구의 홍살문(우)

 

 

이준 열사의 어록을 새긴 표석

 

 

한국 혼(魂)은 독립자유의 혼, 동족애호의 혼, 대의명분의 혼, 일치단결의 혼, 건설개척의 혼,

세계평화의 혼, 살신성인의 혼이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영웅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의 표상 이준 열사의 묘는

북한산 자락인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있다.

우이동길에서 아카데미하우스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우측에 국립 4․19 민주묘지가 나오고

좀더 오르면 좌측에 통일부 통일교육원이 보이고 대각선 방향 우측으로 북한산 순례길 입구가 나오는데

열사 묘역은 바로 이 순례길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 입구에는 이준열사위훈비(李儁烈士偉勳碑)와 홍살문이 있고,

묘역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좌우로 열사의 어록을 새긴 표석이 있다.

 

다시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길 중앙에 세운 ‘자유평화수호의 상’을 뒤로 하고 잠시 오르면

바로 묘역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내에는 열사의 흉상 부조와 그 아래 태극기 조각이 있으며,

주변에는 열사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 등이 배열되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순국대절(殉國大節)」이라는 글씨도 석판에 새겨 걸어 놓았다.

특히 네덜란드 헤이그 이준 열사 묘역에 1954년 12월 29일에 세워졌던 묘비와

1972년 추가로 세워진 순국추모비를 1978년 순국 71주기를 기념하여 국내로 옮겨와서

수유동 묘역에 안장하였다. 부인 이일정(李一貞) 여사의 묘도 함께 있다.

 

열사의 묘역 주변은 가히 독립운동가들의 공원묘지이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안장되어 있어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함양하는데 더없는 정신교육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묘역 주변의 계곡에 위치한 음식점과 식사를 하면서 나오는 소란스러움은 차치하더라도

그 많은 방문객 중에 극히 소수만이 묘역을 들르는 작금의 현실은

오히려 선열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준열사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헤이그에서의 활동을 기억하고 있지만

정작 그가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특사 임명을 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소개할 필요가 있다.

 

열사의 흉상 부조와 묘
헤이그 묘지에 있었던 묘비(좌), 부인 이일정 여사의 묘비(우)

 

 

이준(1858-1907)은 함경북도 북청 출신으로 호는 일성(一醒), 해사(海史)이며,

초명은 준재였지만 1900년대 전반기에 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887년(고종 24년)에 초시로 급제하여 함흥 순릉 참봉을 지냈고,

1895년 법관양성소를 제1회로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가 되었다.

이 해에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와세다대 전신인 동경전문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04년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여 공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여

일진회의 해산을 요구하다가 체포되어 잠시 황해도로 유배되기도 하였지만

이 사건으로 공진회와 이준은 대한제국 황실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905년 헌정연구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부회장을 맡았는데 이 단체 또한 궁극적인 목표는 일진회 타도였다.

1905년 기독교에 입교한 이준은 국민교육회와 상동교회 청년회와 같은 기독교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도 관여하였고, 함북 인사들이 주도한 한북흥학회 설립에 참여하여

회장을 맡는 등 국민계몽활동에 적극 나섰다.

1906년 평리원(平理院)검사로 임명되면서 법률의 공정한 집행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07년 당시 49세의 이준은 일본에 유학한 바 있고,

한국 최초의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뒤 최초로 임명된 검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국제법에 밝았고, 전덕기 목사가 담임하던 상동교회를 기반으로

기독교청년회장을 역임하여 청년회 활동에도 주력한 인물이다.

이후 공진회, 신민회, 헌정연구회, 국채보상연합회 등에서 활동하였고, YMCA의 명연설가이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면모와 국제법 지식과 함께 공진회와 평리원 검사 시절 그의 자질을 높이 산 황실에서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선발하였던 것이다.

 

특사의 임명을 받아 서울에서 출발한 사람은 이준이 유일하다.

이상설(李相卨)과 이위종(李瑋鍾)은 해외에서 헤이그로 합류하였다.

그해 6월 3인의 특사는 네덜란드 헤이그를 방문하여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가지고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저지당하였다.

이에 장외에서 각국 대표에게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 규탄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보내고 신문을 통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외교가 주효하였는지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그는 이에 격분하여 그 통분을 누르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이준의 사망 원인에는 자결설(할복설), 독살설, 병사설(단식설) 등 분분하나

확실한 사인은 규명되지 않고 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준의 죽음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헤이그로 간 그의 독립정신과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헤이그 공동묘지에 있던 유해는 1963년 서울 수유리로 옮겨 국민장으로 안장됐으며,

1964년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건립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이준 열사 묘 찾아가기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장)

- 서울특별시, 하이서울뉴스, 2011.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