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수원화성에 백성들이 몰려든 까닭
정조의 수원화성에 백성들이 몰려든 까닭
수원화성은 당초 10년을 예정하고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33개월이 채 안되어 끝이 난다.
작금의 공공프로젝트가 빈번히 지연되고 과다예산 지출과 품질 문제 등이 뉴스로 등장할 때마다 정조의 화성프로젝트에 대해 솔직히 궁금증이 인다. 총 10년 일정의 공사기간 중에서 수개월을 앞당겨도 벤치마킹 대상이다, 또는 성공사례다 하여 떠들썩한데 공기를 무려 3분의 1로 단축시켰다는 것은 그 안에 범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수원화성 프로젝트는
정조 18년(1794) 정초에 시작하여 정조 20년(1796) 9월에 끝난다.
뒤주 속에 갇혀 비명에 죽어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경기도 양주에서 현재의 화산(융건릉)으로 이전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 있던 민가를 옮기기 위한 목적으로 현재의 팔달산 밑의 수원시가 계획되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계획도시였던 셈이다.
공사기간 단축에 담긴 숨겨진 비밀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정조는 가옥뿐 아니라 도로와 관청을 짓고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폈다. 도시기능이 어느 정도 갖추어질 무렵에는 화성 축성을 시작하였다. 당대의 실학자 정약용에 의해 계획된 화성은 정조의 효심으로 출발되어 후에는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지어졌다.
화성은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 등 4대문과 북수문과 남수문, 공심돈, 장대 등 48개의 시설물로 이루어져 있다. 비교적 편평한 곳에 지어진 행궁과 4대문 등은 당시의 목조 조립 건축공법에 비추어볼 때 공기에 그다지 부담을 주지 않는 공사였다.
하지만 성곽공사는 가장 어렵고 노력과 시간이 많이 들어간 부분이었다. 성곽은 대부분이 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근처의 산에서 돌을 캐내고 다듬어 수레로 운반하여 이를 쌓아가야 했다. 4천8백보(5.7㎞)의 성곽 축조는 수원화성 프로젝트 공사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Critical Path)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정 진행과정을 보면 성곽공사는 동서남북 네 곳에서 진행이 되었다.
처음에는 북성에서 시작하여 곧이어 남성 그리고 약 5개월 뒤에는 서성 그리고 약 일년쯤 뒤엔 동성까지 네 곳에서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결국 공사기간 반 정도는 세 곳에서, 그리고 나머지 반은 네 곳에서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프로젝트 기간을 단축하는 방법 중에는 공정중첩단축법(Fast Tracking)이 있다.
이 방법은 일렬로 진행하는 공정을 잘라서 동시에 병행하는 것으로 화성의 성곽축조는 전형적인 공정중첩단축법에 의한 것이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동서남북으로 잘라 병행한 공정을 일렬로 세워 공기를 합하면 당초 예상했던 10년과 맞아 떨어진다.
당시의 프로젝트 계획이 주먹구구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공정중첩단축법은 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접근 방법일 뿐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제때에 준비되지 않으면 석재를 캐어 다듬는 일도 이를 운반하고 쌓는 일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수원화성 공사의 일정을 단축시킨 열쇠는 ‘공기 단축에 필요한 추가 인력을 어떻게 확보했을까’로 모아진다.
성역에는 연인원 70여 만 명 즉 1,821명의 장인(기술자)과 약 2,000여 명의 막일꾼, 그리고 367명의 관리 감독직이 투입된, 당시로서는 거대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정조의 명으로 모든 일꾼들에게는 임금이 지불되었지만 이것만으로 성벽축성 공사에 동원된 4배의 인력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백성들로 하여금 성역공사로 몰려들게 하였을까?
<화성성역의궤> 안에는 김종수가 지은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지난해에는 백성들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행차가 지나갈 때 곡식을 밟지 않도록 하는 성덕(盛德)을 체현하셨으니 비록 미천한 백성이라도 어찌 감읍하지 않을 것인가. 여러 인부들이 힘을 모으고 여러 장인들이 다투어 참여하였다.”
정조의 애민정신, 한국적 리더십의 바탕
어진 군주 정조의 면모는 수없이 많이 나타난다.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축성 비용을 국고에서 지출하지 않고 내탕금(왕실재산)에서 지출한 일, 성역공사와 더위에 지친 백성들을 위하여 더위를 이기는 약 ‘척서단’을 조제하여 공사현장에 내려 보낸 일, 민가를 이주시킬 때 넉넉한 돈으로 가옥을 수매하게 한 일, 더위와 추위가 심하자 공사를 중지시킨 일, 공사에 투입된 장인과 관리 감독 2,161명의 이름과 출신지역 임금액수 등을 기록하게 한 일 등은 국가의 리더로서 백성들에게 행한 성인의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성인의 면모가 공사가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화성 주위를 맴도는 백성들이 많았다는 기록을 남기게 한 연유가 아닐까?
결국 정조가 가진 성인다운 리더십이 백성들을 화성 성역으로 몰려들게 하였고,
그 힘이 총 10년 일정의 수원 화성 프로젝트의 공사기간을 3분의 1로 단축하는 원천이 되었다.
요즘 외국에 가면 부쩍 우리나라의 위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선진국 사람들의 평가는 물론이고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삼고 싶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간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들의 노력, 스포츠 분야의 활약 그리고 최근 드라마와 공연 등 우리 문화의 해외진출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발전을 이뤄낸 데에는 분명 우리의 정서와 기질을 바탕으로 한 한국형 리더십이 존재했으리라.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정조가 백성들에게 발휘했던 하향온정의 리더십이 있지 않을까?
- 박영민, 미국 알래스카주립대 프로젝트 경영학 석사, 한국프로젝트경영협회 이사, 대외협력위원장 역임,
이노베이션 프레임워크 코리아 대표, PMI South Korea Chapter 회장, 현재 ISO21500/PC236 전문위원(저서: PM을 위한 프로젝트 로드맵/ Enterprise Project Management 외 다수)
- 리더십에세이, 2011. 8월호 (제22호), 한국형리더십 개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