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서울 성곽

Gijuzzang Dream 2011. 5. 27. 23:01

 

 

 

 

 

 

 

서울 성곽

한 해 동안 20만 명을 동원한 대 역사

 

 

서울 성곽은 조선의 수도 서울의 방어를 위해 쌓은 도성이다.

조선시대에는 성곽으로서 수도의 경계를 삼았고

그래서 동대문, 숭례문을 포함하는 4대문 안은 성벽으로 빼곡하게 둘러싸여 있었겠지만

오늘날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성곽을 대면하기는 어렵다.

 

낙산이나 남산, 인왕산 등 산악지역과 4대문과 4소문 주변의 한갓진 골목에서 찾아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의 성곽은 근현대 서울의 도시 발전과 함께

일부 혹은 매우 많은 부분의 평지 성벽이 철거되거나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전쟁 등 외부적 요인이 가세되어 도심에서의 성곽은 매우 빠르게 훼손되어 가고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서울시에서 지속적으로 복원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서울시는 복원과 더불어 보존과 관리에 치중하면서

차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신청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은 세계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단일 왕국으로서

특히 조선의 도성유적은 인류문화유산으로서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울성곽은 전체 18km로서 처음 지어진  때는 조선 태조 5년(1396)이었다.

성곽 축조는 초스피드로 이루어진다. 전국의 장정 11만 8,000명을 동원해서 49일 만에 완성시키는데

현재의 우수한 건설기술과 인력, 첨단 장비를 가지고도 엄두를 못 낼 작업을 한 것이다.

자연히 부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급하게 쌓느라 흙과 돌을 혼합했기에 폭우를 견디지 못하고 일부 유실 구간이 나오고

추가 붕괴가 우려되는 등으로 문제가 불거지자

같은 해 2차로 전국에서 다시 8만 명을 동원하여 공사를 강행한다.

그러니까 한 해 동안 무려 20만을 동원해서 성을 만들었던 것이다.

전제국가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성곽과 더불어 4대문과 4소문도 함께 완공되었다.(그림 1)

서울의 성곽은 조선시대 태조 때 처음 만들어지고 그 이후 여러 번 개수되었는데

대표적인 공사로 세종 4년(1422)과 숙종 30년(1704)에 대대적으로 보수가 되었다.

태조, 세종, 숙종 때의 성벽 축조 방식을 미리 알아 놓으면 성곽을 견학할 때 이해가 한결 수월해진다.

 

성곽에 대한 각종 설명서를 보면 전체 성벽 구간을 총 97개로 나누고 구간마다 천자문의 순서대로 번호를 매겼으며, 그 구간에 동원 지역명을 새겨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중구 장충동 장충체육관 뒤편으로부터 반얀트리호텔(옛 타워호텔)까지의 성벽은 경상도에서 동원된 인부들이 작업을 한 곳인데 이 성벽 곳곳에 출신 지역을 확인할 수 있는 지명이 새겨진 각자석(刻字石)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러한 각자석은 현재 출입이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북악산 지역에는 더욱 선명하게 나와 있다.

 

 

 

현재 성곽이 옛 자취에 복원 등의 방법으로 보존하고 있는 구간은 주로 산악지역이다.

낙산, 남산, 인왕산, 북악산 등이며 근래에 들어 도심에도 도로를 제외한 녹지에 성곽을 복원하고 있다.

성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곳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동대문 성곽공원이다.

지하철 1, 3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에서 나와 대학로로 가는 길 우측으로 낙산성곽길이 있다.

옛 이화여대 부속병원 터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성곽공원은 성곽 안이기에 성벽의 모습은 없고

온통 여장(女墻 : 성벽 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관측이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만 목격된다. 오히려 제대로 된 성벽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동인교회 길로 올라가야 한다.

이 길로 올라가서 산을 하나 넘게 되는데 계속 성벽이 연이어 있고 혜화문으로 연결된다.

대략 왕복 1시간 정도의 산책길로 호젓하다. 성벽을 보면 세종과 숙종 때의 축조 방식이 잘 비교가 된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장충체육관을 뒤로 하고 100m정도 걷다보면

‘동호로 17길’이라는 팻말이 도로변에 있다.

그 팻말을 따라 우측으로 가면 장충동 일원의 서울 성곽길이 나온다.

오히려 낙산 성곽보다 더 보존이 잘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낙산 성곽은 상당수가 현대에 복원이 되어 있는데 반해

장충동 성곽은 옛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훨씬 많다. 앞서 언급한 각자석도 발견되고 있고,

태조, 세종, 숙종 때의 축조 방식이 혼합되어 있어 성곽 공부와 이해에 도움이 된다.

 

낙산 성곽 공원 정상부에서 성곽 밖의 모습을 보았다.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 4대문 밖은 도성 안의 기와건물과 잘 닦여진 도로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 사람들은 후대에 이렇게 휘황찬란하게 변모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1970년대 초 부친을 따라 말죽거리(지금 서초구 양재동 일대)에 갔을 때에도

온통 과수원과 초가집만 보였는데 적어도 1900년대 초 사대문 밖의 모습은 직접 못봐도 추측할 수 있다.

불과 한 세기 만에 상전벽해가 되었다. 고층건물과 가지각색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성벽안과 밖은 천양지차였을텐데 이제는 오히려 서울 성곽이 옹색해 보인다.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대외협력과장)

2011.02.17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

 

 

 

 

서울 성벽이 헐린 진짜 이유는?

 
동아일보 6월 4일자 B7면 ‘이장희의 스케치여행’ 기사에 대해

소설가 송우혜 씨가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습니다.

송 작가는 장편소설 ‘마지막 황태자’와 ‘문학작품을 통해 진행되는 이순신 폄훼현상’ 등의

논문을 통해 우리 역사를 깊이 있게 탐구해 왔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의 수도 서울의 성벽이 철거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

현재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라는 것이 통설이 되어 있다.

“지존의 일본 황태자가 문루 아래로 드나들 수 없다는 이유로

남대문 옆 성벽을 헐고 도로를 내 그리로 다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연구 결과 사실은 그것과 다르다.

일제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조작, 유포된 낭설이 아직까지 바로잡히지 않은 것뿐이다.

서울 성벽의 철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진행되었다.

1907년 3월 30일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이 연명으로

고종황제에게 아뢰었다.

“동대문과 남대문, 두 대문은 황성(皇城) 큰 거리와 연결되어 있어

사람들이 붐비고 거마(車馬)가 몰려듭니다.

게다가 전차가 문 가운데로 관통하는데 피하기가 어려워서 매양 전차와 부딪치는 경우가 많으니,

교통과 운송에 대하여 편리하고 적절한 방법을 별도로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루의 좌우 성첩을 각각 8칸을 허물어 전차가 출입하는 선로를 만들게 하고

원래 정해진 문은 백성들이 왕래하는 곳으로만 쓴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은 없을 듯 합니다….”

(고종실록 1907년 3월 30일, 승정원일기 1907년 음력 2월 17일)

고종이 즉시 허가한다는 재가를 내려 성벽 철거작업이 추진되었다.

내각이 개편된 뒤인 1907년 6월에 총리대신 이완용이 내부대신과 탁지부대신에게

“동대문과 남대문의 성첩과 성벽 일부의 철거”를 통보(각사등록 광무 11년(1907년) 6월 24일)하는

절차를 거쳤고, 같은 해 7월 30일에 ‘내각령 제1호’로 ‘성벽처리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한편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양위하고

10세 소년 영친왕 이은이 새 황태자가 된 뒤(1907년 8월 7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 황태자가 10월 16일에 방한한다”고 대한제국에 통고한 날은 1907년 10월 3일이었다.

이은을 인질로 끌어가기 위한 여건 조성 작업이었다.

 

서울 성벽 일부가 실제로 철거된 것은 1908년 3월 중순으로,

일본 황태자가 서울에 왔다 간 때(1907년 10월 16∼20일)로부터 만 5개월이나 지나서였다.

 

이때의 성벽 철거작업에 대하여

황성신문(1908년 3월 10일)과 대한매일신보(1908년 3월 12일)가 보도한 기사가 남아 있다.

- 송우혜 소설가 swoohye@naver.com
- 2011-06-18,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