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궁산(弓山)과 양천고성지(陽川古城址)

Gijuzzang Dream 2011. 5. 27. 22:59

 

 

 

 

 궁산(弓山)과 양천고성지(陽川古城址)

삼국시대 이래 한강 하구를 지키던 중요한 요새

 

 

 

 

양천고성은 현재 강서구 가양동 소재 궁산(弓山)에 쌓았던 고대 성곽으로서,

그 터만 남아 있기에 양천고성지라 하며 사적 제 372호로 지정되어 있다.

 

궁산은 서울의 서쪽 끝 가양동을 중심으로 하여 안양천이 한강에 합류되는 지점에서

하류쪽 4km지점의 한강변에 위치해 있다.

서쪽의 개화산, 동쪽의 탑산, 쥐산, 선유봉 등과 더불어 한강의 남안에 강을 따라 솟아있는데,

이곳은 한강 하류로 이어진 행주산성, 파주 오두산성과 더불어

삼국시대 이래 한강 하구를 지키던 중요한 요새지였다.

성 북쪽은 한강 쪽으로 급경사인 반면,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조선 중종 25년(1503)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대동지지』등 옛 문헌에 보면

“성산(城山)이 현에서 북쪽으로 1리 지점에 있는데 성산고성은 석축으로 둘레는 726척(약 218m)이고

지금은 성으로서의 기능은 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궁산은 조선시대 성산으로 불렀고,

궁산이 속해있는 가양동 일대가 조선시대 양천현(陽川縣)이었기에 성산고성은 곧 양천고성을 의미한다.

 

궁산은 한국사와 그 질곡을 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고대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변천에 따른 영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고대 삼국시대 한강 유역을 지키는 방어성으로,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장의 소용돌이와,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병영시설, 한국전쟁 미군의 군사시설로

사용되다가 최근에는 근린공원 설치로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있던 성곽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하철 9호선 양천고성역에서 하차하여 고성을 찾으면서 첫 번째 접하는 곳은 바로 양천향교이다.

조선 태종 11년(1411)에 창건한 이래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가양리에서 서울시로 편입된 것은 1963년이며

1981년에 복원공사가 완료되었다.

서울시 문화재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고,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大成殿)과

교육을 맡는 명륜당(明倫堂) 등 건물이 옛 방식대로 복원되어 있다.

대성전에서는 1년에 2번, 3월과 9월에 제례의식을 거행한다.

향교를 들어가고 나올 때에 동입서출(東入西出, 동쪽으로 들어가서 서쪽으로 나옴)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중구 필동 남산골 한옥마을에서도 이를 준용하고 있다.

향교를 나와 조금 걸어 올라가면 곧 궁산근린공원 팻말이 보이고

팻말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면 궁산 정상이면서 양천고성 성내 정상부가 나온다.

 

 

 

성내(城內)는 대부분 평탄지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일본군 철수 후 미군 주둔 시 야포를 설치하기 위해 성내를 평탄작업하면서

불도저로 토사를 성벽 밖으로 밀어낸 결과라고 이곳 토박이들은 증언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김포 군용비행장 개설공사로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병영막사로 사용하였고,

1950년 한국전쟁 이후에도 미군에 이어 국군이 계속 주둔하였던 관계로

궁산 정상 부근은 원형이 심하게 변형되어 있다.

 

정상에서 한강을 둘러보니 저 멀리 행주산성이 보이고 고성 바로 앞에는 올림픽대로가 지나가고 있다.

예전 지형으로 보면 한강에서 고성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되어 있어

방어하기에 그지없는 천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정상 부근에 도당할머니를 모시는 제당인 성황사가 있고,

최근에 복원된 정자로 조선 영조 때 세웠다는 소악루(小岳樓)가 있다.

궁산은 가히 문화재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양천고성은 1992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본격적인 조사나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황조사와 기초적인 지표조사 외에는 아직 이렇다 할 발굴조사는 아직까지도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성벽은 곳곳에 노출되어 있는 석재가 있지만 대부분은 흙으로 덮여 있는 상태이다.

워낙 훼손이 심하여 성의 자세한 구조와 모습은 유추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몇 차례 기초적인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성 내부와 성벽에서 많은 토기편과 기와편을 수습하였지만

시기를 명확히 알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백제의 유물은 나오지 않고 통일신라시대 이후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대체적으로 양천고성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던 시기에

신라가 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천향교에서 공원 입구를 지나 고성의 정상부에 올라가기는 무척 수월했다.

그저 동네 야산정도로 생각하고 올라가 정상에서 한강을 바라보면

이 산성이 아찔한 높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진 광진구의 아차산성은 비록 일부이지만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비해

양천고성은 성벽을 찾기가 어렵다.

산 곳곳에 노출되어 있는 석재만이 그 옛날 성벽의 모습을 희미하게 알려주고 있을 따름이다.

한강을 늠름하게 지켜냈던 당당한 성벽은 이제 간곳이 없고 그 터임을 말해주는 표지판만 남아 있어

문화유적의 보존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대외협력과장)

- 2011.02.10,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