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촌토성 - 한성백제의 도성
백제 향기 그득한 몽촌토성 - 한성백제의 도성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에 내려서 밖으로 나오면 먼저 반기는 것은 거대한 조각물이다.
이름 하여 평화의 문, 올림픽 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몽촌토성으로 알려지기보다 올림픽 공원으로 더 알려져 있는 곳,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몽촌토성(이하 토성)은 평화의 문 너머에 야트막한 능선으로 가만히 자리 잡고 있다.
토성과 그 주위는 시민의 산책로다. 4계절에 상관없이 토성에는 산책하는 시민들로 붐빈다.
과연 2,000년 전 토성에도 이렇게 사람들로 붐볐을까 하는 의문을 느끼며 토성을 살펴보았다.
한성백제시대 건립된 토성은 적으로부터 보호와 방어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다.
인근 풍납토성과 더불어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송파구 오륜동 88번지 3호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297호로 지정되어 있다.
타원형의 야산 위에 진흙을 쌓아서 만든 성벽으로서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였고,
경북 경주의 월성(月城)과 거의 흡사하지만 이보다 넓고 크다.
토성의 고도는 표고 42.9m이고, 대부분의 지점이 30m이내이며,
성벽의 전체 길이는 2,285m이고, 토성의 전체 넓이는 약 6만 7,000평이다.
올림픽 공원 조성에 앞서서 사전 문화재 조사 겸 유적 보존을 목적으로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총6회에 걸쳐 발굴조사를 시행하였다.
조사결과 토성의 축조 시기는 인근의 풍납토성보다 약간 늦은 대략 3세기 말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의 둘레에는 백제성의 특징인 방어용의 해자(垓字)시설이 되어 있고,
토성 바깥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목책(木柵)시설이 드문드문 설치되어 있다.
1984년에 실시된 서울대학교의 발굴조사 보고서를 보면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토성은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고적조사 때 처음으로 그 위치와 규모 등이 간단히 보고되었다.
당시의 명칭은 이리토성(二里土城)이었다. 현재 오륜동이 예전에는 경기도 광주군 이리였기 때문이었다.
토성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해방 이후인 1980년대였다.
88올림픽을 위한 체육시설의 건립 지역이 토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확정됨에 따라
토성의 보존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벌어지면 유적의 훼손은 불 보듯 뻔하기에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이 올림픽 시설 부지 내에 있는 이 토성을
유적공원으로 정화, 보존하기로 결정하고 발굴조사를 단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사전 성 내외부는 경작지로 파, 고추, 콩 등 특용작물이 재배되고 있었고, 민가도 상당수 들어서 있었다.
조사를 해보니 토성의 건설을 위해서 막대한 인력을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이 되었고,
주요 방호시설이 성의 북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주요 방어대상은 한강 이북의 세력, 즉 고구려였음을 알 수 있었다.
발굴로 출토된 유물의 시대와 종류를 놓고 파악한 토성은
한성백제시기의 중요한 방어성이었다가 475년 한성백제가 함락되고 나서는 오랫동안 폐기상태로 있은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주민이 살게 되었다.
흔히 토성은 백제시기의 성이므로 백제인들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토성에서는 실제로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였다.
475년 한성백제가 멸망하고 난 이후이다.
그 증거로 토성에서 다량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고, 고구려식 건물 유적이 확인되었다.
다만 한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인 광진구 아차산 일대의 보루 유적들보다
토기류의 수량이 상대적으로 적어 고구려군이 한성 함락 후 단기간에 걸쳐 토성에 주둔하였으며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당시 토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한성지역의 치안유지와 남하하는 고구려군의 보급과 업무 연락을 담당하던
거점 중심 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토성을 포함한 그 외곽 일대에
종합경기장과 올림픽 공원이 조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원 안에 1992년 몽촌토성 역사관이 건립되어 한강 유역을 포함한 백제문화의 대표적 유적을 소개하고
발굴조사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토성에서 발견된 백제인들의 생활 거주지인 움집터를 현장 그대로 보여주는 움집터 전시관도
역사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또한 서울 2,000년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자료를 편찬하는 서울시사편찬위원회도 자리 잡고 있다.
토성을 따라 나있는 산책로를 걸어 보았다.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맑고 신선한 공기를 음미하면서 사방으로 탁 터진 토성을 바라보니
주위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참 성 하나만은 정말 탁월한 곳에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치 백제인이 된 듯한 느낌이 온다.
이번 주말 몽촌토성을 찾아가서 잠시나마 백제의 향기를 맛보는 것은 어떨까한다.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대외협력과장)
- 2011.01.13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
한성백제를 찾아 - 서울 송파구
서울 송파구는 백제가 건국된 때부터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인 한성백제시대의 수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의 문화유적인 풍납토성, 고분군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찬란한 문화를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청나라와의 전쟁에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의 강요로 세운 공덕비가 남아있어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지만
1988년에는 세계에 우리 나라의 우수함을 알린 올림픽을 개최한 곳이기도 하다.
노선 살펴보기
노선의 대부분 구간에 자전거도로가 정비되어있고 올림픽공원을 이용할 수 있어 안전하다.
다만 풍납토성구간의 경우 토성을 따라 이어지는 골목을 이용하므로 주차차량이나 통과차량에 주의해야하지만 오히려 골목이라는 재미있는 체험이 가능하다.
몽촌토성 또는 풍납토성의 경우 성을 이동하기 때문에 자전거보관에 대한 염려는 않아도 된다.
석촌동고분군이나 백제고분군의 경우에는 개방형 자전거주차장이므로 자물쇠 등을 준비하면 좋다.
송파구는 서울특별시의 자전거특별구로 자전거관련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어 자전거로 여행하기에 쾌적한 조건이다.
(1) 풍납리 토성 -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초기 한성백제 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사적 제11호이다.
경기도 광주(廣州)에 속하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풍납토성이라고도 한다.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둘레는 4km 정도였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2.7km가량 남아있다.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며, 동쪽에는 4곳에 같은 간격으로 뚫려 있는데 출입문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토성을 도성인 위례성으로 보는 견해와 방어성으로 보는 두 가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으나
주변의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과 관련하여 한강유역에서 가장 큰 백제 토성 유적이라는 점에서
가치있는 문화유산이다.
(2) 몽촌토성
사적 제297호로 3세기경에 축조되었으며 해발 45m 내외의 자연구릉을 이용하고 진흙을 쌓아 축조된 토성이다. 둘레는 약 2.7km, 높이는 6~7m이다.
백제 초기에 서울을 수비하는데 이용되었으며, 지리적 위치나 견고함으로 미루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주성(主城)으로 추정된다. 목책(木柵)과 토성 방비용으로 성의 밖으로 물길을 내어 방어선 역할을 한 해자(垓子)로 구성된 특수한 토성구조이다.
입장은 무료이고, 관람시간은 올림픽공원 개방시간과 같다.
한얼광장, 평화의 광장으로 6시~22시까지 입장 가능하고 24시까지 개방한다.
(3) 석촌동 고분군 (백제초기적석총)
- 적석총이란 고구려 초기부터 나타난 고구려 계통의 무덤으로서 돌무지무덤이라고도 한다.
백제초기부터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 형성된 백제전기 고분군을 말한다. 대형 돌무지무덤과 함께 널무덤, 독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현재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의 돌무지무덤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대형분과 소형분이 섞여 있으며, 서로 시기를 달리하여 중복되게 형성된 것이 확인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묘지로 사용했음을 짐작케 한다.
(4) 삼전도비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비석 표면의 왼쪽에는 몽고 문자,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 뒤쪽에는 한문이 쓰여 있어 만주어 및 몽고어 연구의 자료로도 쓰인다.
(5)방이동 백제고분군
한성백제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전기(4c초~475) 무덤으로 사적 제270호이다. 도굴로 인해 남아있는 유물은 적지만 고분의 구조와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다.
6호분에서 출토 된 토기나 고분양식 등은 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6세기 이후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을 설명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 2011-05-24, 문화재청 발간, [자전거로 떠나는 문화재 여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