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 시골편지's (7)
토끼풀
두렁마다 둑길마다 풀이 야단이렷다.
풀더미 우거진 풀숲, 창백한 얼굴을 한 누룩뱀이 슥 지나가며 토끼풀을 뭉갠다.
한 여자의 평생 징역이었을 저 고추밭.
억세디 억센 토끼풀이 엉금성금 기어들어와 같이 동거하자며 억지를 부리는데,
이를 절대 허락할 리 없는 아낙. 털부덕 밭에 오그리고 앉아설랑 진종일 풀매기에 여념 없어라.
송홧가루 분분하구나. 게다가 황사까지 겹쳐 마치 일식하는 날처럼 뿌옇고 침침한 한낮이다.
아낙은 보리밭고랑, 고추밭고랑 옮겨 다니며 기진맥진, 손에 든 호미조차 무겁다는 표정이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인가.
아까시나무 이파리를 두들기며 라흐마니노프처럼 열정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던 바람을 나는 보았다.
바람은 아낙의 파마머리를 동여맨 수건에 달려가서 흐르는 땀을 쓱싹 닦았다.
아낙은 이제 발목 없는 문둥병자처럼 엉덩이를 질질 끌며 풀을 매다가
바람에다 대고 넋두리 하소연을 풀어놓았다.
“퇴깽이(토끼) 대가족을 딱 풀어 부렀음 좋겄네잉. 그라믄 이 고상도 덜할 거신디 말이여.”
바람이 맞아맞아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고개를 끄덕일 때는 나뭇잎이 위아래로 나울나울 흔들거릴 때….
토끼풀을 볼 때마다 나도 새하얗고 털이 복실복실한 토끼 한 쌍 키우고 싶어진다.
안마당도 잔디보다 토끼풀이 더 우북하게 자라서 토끼가 배부르게 먹고 살 만한 환경은 충분히 된다.
귀염둥이 아기 토끼는 방으로 데리고 와서 같이 잠이 들기도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토끼풀만 아깝게 버려지고, 죄스럽게 저걸 뽑고 또 베어내고….
세상에 필요 없이 존재하는 생명이 어디에 있겠는가.
토끼풀은 토끼를 위해 태어나 자라는데, 산에 들에 집에도 정작 토끼가 없구나.
토끼풀만 외롭게 우북우북 자란다.
아낙이 뽑아서 버린 토끼풀 더미가 밭고랑 응달 쪽에 가엾은 아기무덤이다.
당신의 새 이름표
사람을 만나면 이름을 꼭 물어본다.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어둔 밤하늘이 별빛으로 휘황해지려나.
황지우 시인의 본명은 황재우다. 타자기를 쓰던 시절 오타가 그만 필명으로 굳어버렸단다.
우연히 얻은 이름으로 황재우는 황지우가 되었고, 세상은 시인의 새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내 청춘을 시로 가득이 물들였다.
나는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가장 행복했고, 책장엔 시집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그러다가 이젠 시인의 시집 속에 있는 이름들조차 낱낱이 기억하게 되었다.
가령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에 등장하는, 시집을 내지 않은 시인 아카리오 코타포스,
발파라이소의 시계공 돈 아스테리오 알라르콘, 아홉살하고 반 먹은 아이 엔리크 데 세구라….
그들의 이름까지 기억한다.
대학 입학시험에 이런 이름들만 나왔다면 나는 전국 수석을 차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다.
그런데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게바’라는 새 이름(게바를 라틴어로 옮기다가 베드로가 되었음)을
예수님에게서 선물받았다. 이후 베드로는 이름값을 하면서 교회의 굳건한 반석이 되었고,
철권통치 로마제국과 짱짱하게 맞서 싸웠다. 새 이름은 이처럼 힘이 세다.
여자는 아이를 낳으면 아무개 엄마라 불리며 새 이름을 얻더라.
영자다 숙자다 미자다 경자다 하는 이름들 모두 어찌 되었을까.
수박향기가 나던 이름 수자는 이름값대로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다.
제비꽃처럼 단아하던 정자는 군청 공무원으로 성실하게 살더라.
그리운 기억 속 이름들 말고
‘옮겨영’이라는 새 이름까지 얻어들으며 독선과 배반의 정계에 발을 담근 분도 계시다.
꽃시계 별시계
틀니 땜에 치과를 댕겨오던 아짐은 마을길 포장공사로 야영장 문턱까지 올라와서야 버스에서 내렸다.
산밭에 라벤더, 페퍼민트, 로즈메리, 재스민, 제라늄을 비롯하여
쬐꼬만하게 허브 농사를 짓기 시작한 나는, 수시로 물을 주며 한나절은 장화를 신은 차림새다.
강연이나 다른 볼일로 서울을 종종 다니는 편인데, 밭작물이 마음에 걸려 또 부리나케 돌아오고는 한다.
아짐은 얼마 전에 라벤더 한 뿌리를 얻어갔고, 요새 문간방에서 그 꽃을 보고 계실 것이다.
“점쟁이가 옥니박이 팔자는 징허게 사납드라등마
차말로 일평상을 철업쟁이(철부지)로 젙눈질(곁눈질)만 허다가 죽은 남팬에다
이러크롬 써금발이(변변치 못한 사람) 삭신은 아파만 싸코 말이요.
풍강치고(농악하고) 노닥질허든 젊어서가 좋았재. 인자 심알타구(힘) 한나 안남어가꼬
들뽕낭구(들뽕나무) 밑에다가 늙어죽은 괴대기(고양이) 모냥 묻어부러야 안아플랑가.”
엄살을 또 부리신다.
벚꽃이 진 뒤로 마을에 남은 하얀색은 늙고 병든 주민들의 새하얀 머리카락뿐이다.
그러나 기다려라. 꽃들이 이어서 릴레이 계주, 바통 터치를 하리니
인상파 화가의 그림 속 꽃마을은 굳이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아도 예서 다 볼 수가 있다.
집집마다 돌아가는 꽃시계. 들에도 산에도 꽃시계가 돈다.
복수초나 수선화, 매화, 동백꽃. 이른 봄꽃에 이어 다음차례
벚꽃, 살구꽃, 할미꽃, 내 산밭의 허브 꽃송이. 여름과 가을, 겨울, 그대와 파묻혀 뒹굴던 눈꽃까지….
오늘은 무슨 꽃이 피나 마당을 내다보는 일이 중요한 일과다.
은행잔액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싶지 않다.
죽어서 그 돈 몽땅 챙겨가지고 천국에 갔다는 사람을 나는 들어본 일이 없다.
욕심 없이 꽃을 심고, 식물을 가꾸는 사람들은 꽃시계와 별자리 시계만으로 인생을 가뿐히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다가 죽으면 무덤가에 사철 꽃들이 조문하고, 별들은 또 남은 자들의 가슴마다 촘촘하게 빛나리라.
삽자루 같은 사람
“왐마 어찌사쓰께라. 밴맹이라고 씨붕그리는 거시 아니고라이,
회관서 자꼬자꼬 농아리(잡담)나 허고 밍기적 놀자는 말에 잡해 있는 사이에,
어뜬 배라먹을 용천배기(나쁜 사람)가 토방독(디딤돌)에 점잖이 놓은 거슬 훔채가부렀단 말이요…
한샐팍(같은 사립문을 쓰는 이웃)서 가차이 사는 것도 아니고,
옆구랭이(옆구리)에 차고 댕기는 거시기도 아닝 게 도대체 찾을 수가 있어야재라.
훔채 묵고 숭개 묵고(숨겨 놓고) 그라고 살아서야 쓰꺼시요? 호랭이가 물어갈 놈의 영감탱.
인자 비얌때갈(뱀딸기) 나오고 밭때기 벌어묵기 전에 꼭 써금털털 헌것이라도 잊지 않고 갖다 드리께라.
쨈만 기둘리쇼잉.”
새로 장만한 삽 한 자루 있었는데,
내가 집을 비운 사이 현관문 쪽에 있는 걸 잠시 빌려갔다가 잃어버린 모양이시다.
자진신고 기간도 아닌데 자초지종 주욱 말씀하시는 게 소설책 한 권이다.
에고대고 이 고주망태 술망탱이야. 그런데 말발 하나는 청산유수롤세.
“깨굴챙이(개구리) 튀나오고 벹발(햇살)도 참말로 거시기 좋고… 안그라요?
헤헤 그라믄 난중에 뵙시다잉.”
길 따라온 황구가 꼬리를 치며 앞장서자 아재는 여우 꼬랑지를 감추며 그 뒤를 솔솔….
삽질 정권이다 뭐다, 그놈의 토건족 때문에 죄 없는 삽이 대신 욕을 얻어먹는 시절.
그렇다고 삽이 미운 건 절대 아니다.
삽 한 자루 값이 고작 만원인데 어떤 명품 만년필은 수십만원도 넘을 걸 아마.
그래도 촌에선 펜보다는 삽이지. 삽질을 잘해야 사람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
잃어버린 삽이야 아재가 새로 주시겠다니 괜찮고,
훔쳐 가신 분도 아마 댁에서 가지고 나온 줄로 착각하신 거 같고,
길 가다말고 아재가 전봇대에 오줌을 누시는데 개도 흉내내며 오줌을 눈다.
오줌을 털 때까지 재밌는 구경일세.
저 삽자루 같은 사람. 쓸데없이 강바닥에서가 아니라,
진짜 논밭에다 삽질하는 몇 안 되는 사람. 귀한 사람이라 눈에 오래오래 넣어둔다.
영국 시골마을
외진 숲길을 걸어 이곳 수북땅에 깃든 지 햇수로 벌써 몇 해째인가.
왼손으로 다 세고 이젠 오른손으로 세기 시작한다.
그간 조막돌 예쁘던 개울과 아기자기 꽃길마다엔 시멘트가 무참히 발라졌고,
들엔 널따란 공장 물류창고가 흉물처럼 들어섰으며, 전원주택은 생기지만 모두 주말별장이나 매일반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토요일엔 드문드문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데
고기 굽고 시끄럽게 놀다가 쓰레기 한가마니씩 내다놓고 사라진다.
고양이와 개가 비닐봉투를 뜯어놓아 일주일 내내 그쪽에선 악취가 진동한다.
소 · 돼지를 굳이 묻지 않아도 이미 침출수는 도처에서 흘러나와 식수원과 강물을 오염시키고 있다.
촌 버스 타고 오는데 할딱고개 지나서 전망 좋은 곳, 오층 건물이 들어섰더라.
청산은 간데없고 산모롱이 어디에나 새로 생기는 유곽 러브호텔, 펜션, 백숙과 갈비를 파는 가든 음식점.
저렇게 집은 느는데 이사할 집은 아니렷다.
겨울이면 읍내 네거리 갓길에다 용달 트럭을 대고 호떡 장사하던 미선이네가 살던 집.
미선나무가 있는 줄도 몰랐을 미선이네는 함석지붕 고드름 얼던 그 정든 집을 팔고 어디로 이사간 걸까.
그 자리 섬뜩한 철골조가 올라가더니 미선나무는 결국 베어지고 말았다.
고작 일꾼들의 언 손이나 녹여주다가 재가 되었으리라. 불쌍한 나무, 미선이의 미선나무!
오래전 영국을 여행하며 남쪽 촌구석 마을 다팅턴을 다녀왔다.
간디의 제자 사티쉬 쿠마르란 인도 사람이 이 마을 촌장이다.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속속 찾아들어 마을엔 아이들이 늘었고 대안학교도 생겨났다.
가축을 방목하고 손으로 젖을 짜며 자전거도 마다하고 오로지 걸어다니는 산책과 명상,
경쟁을 거부한 얼굴마다 느긋하고 행복해 보였다.
검박한 생활태도와 배려, 환대로 이미 지상에다 천국을 차려보인 그 마을,
자꾸 그 마을 생각이 난다.
거울아 거울아
“공기가 벌써 달라요!” 내 산방을 구경 온 어떤 방문객의 첫마디였다.
어디 공기뿐인가. 물맛도 참 좋지.
십여 가구 올망졸망 사는 우리 동네는 산에다 집채만한 물탱크를 대고서
물이 키 높이로 차오를 때를 기다려 고걸 골고루 나눠 마신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 노루도 마시고, 장애물달리기 대표선수 토끼도 마시고,
비행기가 엄마인 줄 알고 높이 날아올랐던 새도 실망한 얼굴로 목을 축이는 그 물을 말이다.
봄골짝 흐르는 찬물은 샛노란 미소를 품은 수선화를 일으키고
단내 나는 붉은 능금과 아그배나무 열매도 또글또글 맺게 만든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자발적 가난’을 설파하는 작가 골디언 밴던브뤼크는
‘신선한 공기, 맑은 물, 침묵과 마음의 평화, 건강, 그리고 무엇보다도 좀 더 깊은 차원의 자유’를 손꼽았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말씀이 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떠나고 말 신세. 양수 속에서 맨몸으로 헤엄치다가
혈혈단신 지구별에 태어나 사랑하고 이별하고 마침낸 모래무지로 우주에 흩날린 영혼이여.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지?” 마녀할망구가 오늘 묻는다면
호시탐탐 왕위찬탈을 노리는 백설공주나 으스대고 뽐내기에 바쁜 미남미녀를 꼽을까.
아닐 것이다. 자연의 곁에 머물며 신선한 공기, 맑은 물을 마시면서 마음 가득 자족하는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리라.
그믐달 지나자 속살 차오르는 달빛 아래서 도연명의 시를 곱씹어 읽는 밤이다.
“사귐도 교유도 끊고 산으로 돌아가리라. 세상과 어긋나기만 하니 가마를 타고 무엇을 구하랴.
이웃의 정에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으로 시름을 삭이며 살아가리.” 옳다, 무릎을 친다.
귄 있다
산 너머 남촌에서 쓰는 말 가운데 가장 알아두어야 할 말이 있다면 바로 ‘귄 있다’는 말이다.
‘귀염성이 있다’는 사전적 설명은 귄 있다는 말의 쥐꼬리도 알지 못하는 풀이렷다.
방송에 뜨는 서구 미인을 가리켜 귄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요쪽 어른들은 어린 처자나 갓난쟁이를 가리켜 귄 있다고 보통 그러는데,
그건 미모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이며
바닥 사람들끼리 서로 알아주고 보듬어 챙기는 어떤 친밀한 동질감의 표현이다.
흔하디흔한 아파트촌의 아이들이 타고 노는 인라인 스케이트도 구경이 힘든 남촌에서
동계올림픽의 피겨스케이팅은 까마득한 남의 동네 이야기만 같은데,
“참말로 고 가시내는 귄이 쫙쫙 흐릅디다!”로 시작되는 김연아 찬사는
지난 한 주간 테레비를 끼고 사시는 마을 어르신들의 이구동성이었다.
올림픽의 호객행위인 애국주의가 그닥 마음에 차지 않지만,
메달을 목에 건 어린 피겨스케이팅 선수를 사랑하는 여러 마음은 대개 따뜻하고 다정하더라.
그 사이 민주주의를 거덜내는 자들의 한심한 소행은 여전하였고,
그래서 나는 더욱 입에 거품을 물며 올림픽 잔치에 찬물을 끼얹었어도…
“작두 칼 위에 불쑥 서듯 맹키로 신발짝에,
아니 거시기 칼날 우게 대꿍 올라서가꼬는 빙글빙글 돌다가 막 뛰다가, 한판 큰 굿을 보는 거 같드랑게라.
입서리 뻘겋게 칠한 일본 아그를 그냥 납작코를 맹글어 불드랑게.”
피겨 날을 작두칼로 보는 이런 색다른 할매들의 시선.
한편 값진 메달은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신 어르신들의 쌓인 원한을 씻는 한판 굿이기도 했겠다 싶은 생각.
겨울은 가고 바야흐로 봄날. 햇살 좋은 담벼락에 의자를 놓고 앉아
‘새아그 며늘아기(며느리)’와 딸 손자 자랑을 해가 질 때까지 늘어놓으실 3월.
나는 그런 이바구라면 더 환하게 반기며 맞장구를 쳐 드려야지.
딸꾹질
북미 원주민들은 ‘우리는 하나’라는 뜻의 ‘노고모크’ 정신을 중요하게 여긴단다.
더운 음식을 이웃과 나누는 일은 노고모크를 실천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겠다.
그래 항상 움막집에 불을 지피고 국을 끓이는데 언제든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함이란다.
내복 차림으로 집에 있는데 골목 첫집 형님네가 젓갈 담뿍 넣어 담근 김치를 놓고 가신다.
얼른 옷을 주워 입고 나갔으나 급히 돌아서는 뒷모습이 먹먹하게 고마웠다.
귤이라도 쥐여드릴 걸 경황이 없었구나.
부녀회장님은 새해 달력을 “에씨요(옛소)” 한마디와 짓궂은 눈웃음을 남기고 가셨다.
농협 조합원도 아닌데 큼지막한 달력을 해마다 나눠 주신다.
저번은 대추나무집 ‘할매’가
“조각보 떠들쎄보믄(들추어 보면) 팥죽 한사발 퍼놨응게 이따가 출출헐 때 자시요잉.
쪼물쪼물 무친 너물(나물)도 잔 담았고.
빠금살이(소꿉놀이) 살림이라 일회용 거시기에다 담가서 죄송하구마니라.”
덕분에 붉은 팥죽으로 한 해 마감하는 액막이굿을 잘했다.
윷놀이에서 두 동이 한데 포개져서 가는 걸 이쪽 말로 ‘두짐사니’라고 한다.
그렇게 서로 업어주면서 두짐사니로 살아가고 있구나.
나 아닌 너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말끝마다 우리, 우리 그러는 거다.
망치를 든 자는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여 두들겨 팰 생각만 하더라.
우리가 되고 두짐사니가 되면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부족한 나를 곧추 잡으려 애를 쓸 텐데….
딸꾹질을 하면 “머슬 딸가닥 혼자 훔쳐 자샜다요(드셨나봐요)” 해서 웃는다.
오늘 마을총회를 한다고 방송이던데 나는 손님이 온대서 못 갔다.
목이 칼칼해 옴팍집에서 죽엽 막걸리 마시다가 달콩 들켰다. 또 딸꾹질….
“토껭이(토끼) 모냥 숨어댕기고 그라네이?” 공동샘물 한 해 물값 3만원 이장 형님에게 빚진 것도 있는데….
“야소록허니(은밀하게) 숨은 것은 아니단 말이오.”
손님이 예쁜 여자라 신경이 좀 쓰였다. 나 혼자서 행복하면 딸꾹질이 잦다.
러브스토리
언젠가 이해인 수녀님이 내게 보내주신 편지 봉투엔
책갈피에서 곱게 개어진 마른 풀꽃들이 함께 담겨 있었다. 객지로 이사하며 잃어버렸던 그 작은 선물,
지난 밤 수녀님 시집을 간만에 꺼내 들었는데 고맙게도 거기 숨어 있더라.
대설 즈음, 이다지 추운 날에도 사랑스러운 꽃들은 피어나누나.
창밖에 겨울 나무, 새하얀 눈꽃을 보라.
수녀님 시집엔 책갈피 마른 꽃, 나는 물감을 풀어 붓을 들고 반가운 눈꽃을 그리고 있다.
“자꾸 쌓이는 눈 속에 네 이름을 고이 묻히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무수히 피어나는 눈꽃 속에 나 혼자 감당 못할 사랑의 말들은 내 가슴속으로 녹아 흐르고,
나는 그대로 하얀 눈물이 되려는데….”(눈꽃 아가)
수녀님의 시는 현란하지 않으면서 단순하고 간결하여 참 좋다. 그래서 울림이 배나 깊은 거 같다.
수도자나 시인이나 결국 사랑을 노래하는 거 아닌가?
꽃들도 그러하리라. 겨울엔 눈꽃이 피어 사랑을 찬미한다.
제발 그만 지구별을 더럽히고 시릴 만큼 순백한 영혼이기를 당부하는 것이다.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의 배신과 모욕, 위선과 과욕, 시시콜콜 갈등과 분쟁으로 지저분한 세계가 되었다.
돈독이 올라서들 돈을 볼 때야 좋아들 하지 꽃 한 송이 사랑할 줄은 잊어버렸다.
눈이 쌓여 장사를 그르칠까봐 걱정부터 한다면 인생은 되우 서글프고 심심하겠다.
‘감당 못할 사랑의 말들’ 대신에 온갖 질시와 비소, 거짓말, 악담, 괴담이 횡횡한다.
무지한 악플러들은 세상을 어지럽히고, 파시즘에 사로잡힌 자들이 재결집하고 있다.
아이들이 이를 보며 자라고 있으니 훗날이 두렵고 무섭다.
그대여! 우리부터 어서 공원에 나가 눈꽃을 만져보자.
눈꽃 아래 순백한 영혼들로 거듭나서 영화 <러브 스토리>처럼 뒹굴기도 하여보자.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하는 ‘Snow floric’을 주제가 삼아
“잡아 볼텨?” 하면서 순진무구 유치한 사랑놀이라도, 오! 우리부터 먼저….
옥수수 별
이 지구별은 누가 뭐래도 옥수수별이다.
옥수수를 따서 광주리에 담고 걸어오시는 저 오진 걸음걸음들.
온 식구가 옥수수 한소쿠리 삶아 가운데 놓고 둥그렇게 모여 앉으면
지구는 그 순간 어떤 별나라보다 노랗고 푸른빛을 뿜어낸단다.
이슬람의 지혜자 수피나 이맘, 인도와 히말라야 산기슭에 은둔한 승려들,
멀리 그랜드 캐니언의 인디언 추장님이나 그리스 정교회 신부님들처럼
옥수수는 희고 긴 수염을 멋들어지게 나풀거린다.
나도 아직은 젊은 오빤데 흰 수염이 제법 생겨나설랑 옥수수를 닮아가고 있는 중이렷다
읍 동네에 있는 하버드 외국어학원에서 영어를 공부했고,
옛날 깐날엔 서울대 뒷산 달동네 교회에 찾아가 가끔 설교도 했고,
커피에 연세대 우유를 계절학기로 한번씩 넣어 마시는 것 말고는 학벌도 뭣도 별 볼 일이 없는 촌뜨기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옥수수를 사랑하고 옥수수를 닮아가고 있음은 얼마나 놀라운 발전이며
이른바 ‘업그레이드’ 아닐손가.
나는 고작 겉멋이나 들었다면 그대는 마음조차 옥수수를 닮았어라.
한없이 정이 많고 후덕하며 한뼘은 높은 덕망으로 살아가는 멋쟁이니 만큼.
“아랫시욤이 참말로 닮았소야. 옥수수 시욤물이 몸에 좋다든마 그 시욤도 한번 삶아 자새보쇼야.
만뱅통치가 따로 없겄소.” 옥수수 벗기는 구경을 하다가 얻어들은 농.
인정 많은 할매들한테 옥수수 다섯 알을 얻어와 삶았는데,
내 수염은 나중에 죽어서 지구별 생명들에게 드리기로 하고, 행여 빠트리지 않고 청결하게 삶았지.
여름이 다가기 전에 옥수수를 쪄먹자.
혼자 차지해 먹지 말고 남과 북, 동과 서 말뿐이 아니라 공정하고도 평화롭게 나누어서 먹자.
수해로 옥수수도 못 먹을 처지의 북녘 아이들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히피 매미
바윗골 야영장은 간밤 집중호우에 산사태까지 겪은 모양이다.
산이나 물이나 더없이 너그럽다가도 한번 뿔다구가 나면 호환마마 곶감보다도 무섭지.
집 주변은 괜찮으냐고, 민박집 하시는 한씨 아재의 염려 말씀이다.
하도 번개가 치기에 아예 두꺼비집마저 내려놓고 꿈도 없이 잠들었다.
동트자 눈떠보니 자울자울 흐르던 개울이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로 아수라장이었다.
개울가에 댁을 둔 어르신들은 잠 한숨 못 주무셨을 것 같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한 한낮. 알록달록한 옷을 말려 입는 꽃나무들,
허리가 굽고 흰 털로 수북해진 늙은 벌레 수행자는 호박잎을 오래도록 걷고 있다.
건너편 솔밭에서 들려오는 저 노랫소리는 무엇일까.
히피 매미가 CCR의 노래 ‘누가 이 비를 멈추게 할 것인가, Who’ll stop the rain’을 맴맴맴,
허밍으로다가 제멋대로 불러대는군.
매미 덕분에 장대비가 멈추었나봐. 매미와 한 궁합으로 나도 맴맴맴,
엉덩이를 들썩들썩 헤드뱅잉도 해가면서.
매미는 십여 년, 지루하고 눅눅한 세월을 땅속에 틀어박혀 굼벵이로 살다가
가까스로 우화하면 한 열흘쯤 신나게 노래만 부르면서 삶을 즐기다가 죽는다.
이 히피 매미들은 큰집에서 ‘조인트’ 까일까봐 아부하는 노래따위 부르지 않는다.
매미가 줄기차게 불러대는 노래는 참된 사랑, 영원한 자유에 대한 예감이다.
오늘도 히피 매미는 배롱꽃나무가 더욱 환히 피어나라고,
얼음 땅속에 박혀 살던 지난 겨울들을 생각하며 다시는 춥지 말라고,
유쾌하고 상쾌하게 살다 가자고 노래로 독려한다.
매미들의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우리집 마당에서 열흘간 펼쳐질 예정.
오늘 노랫말처럼 ‘가수와 군중은 비가 내려도 흩어지지 않고 노래를 부르리니’,
발을 같이 구르며, 풀물이 들도록 발을 구르면서 맘껏 즐겨보련다.
모차르트
케냐의 커피농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좋아해 자막까지 죄다 외울 지경이다.
특히 테마곡으로 흐르는 모차르트의 선율은
내가 존경하는 신학자 칼 바르트 목사님이 스위스 산간 오지에서 외로이 목회하실 때
위안이 되어준 친구란 것도 솔깃하게 만들고….
클라리넷을 전공한 친구에게서 연습용으로 쓰던 클라리넷을 선물받아 틈틈이 불어보고 있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아다지오 한 부분이라도 내 입술로 연주하고 싶은 바람에.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라 ‘삑사리’가 장난 아니다.
집 앞 고추밭에서 풀 뽑던 할매가 “무신 때까우(거위) 우는 소리가 그라고 요상하다요?” 하신다.
“클라리넷이라는 악기인데요, 모차르트가…”
“모자르다고라. 머시 모잘라부러라잉.” 에고 대고 내가 말을 아예 말아야지.
사납고 거친 이 세계에 은은하고도 잔잔한 음악이 있음은 감사 또 감사렷다.
묻노니 그대는 어떤 악기를 연주할 줄 아시는가.
단체로 노래방에 들어가 돼지 멱따는 소리로 가요 열창도 뭐 사는 재미 가운데 하나겠지만,
그래도 악기 하나쯤 배우고 익히신다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씩 모차르트도 가까이 하시길. 옥수수 잎에 앉은 풀벌레도 모차르트라면 무릎을 탁 꿇는다.
통기타는 대충 막걸리조로다 독학했고, 하와이안 우쿨렐레는 여름철 가장 절친한 피서 친구다.
남미여행 때 배운 잉카 피리, 그리고 찬송가와 동요 정도는 풍금으로 조금 켤 줄 안다.
거기다 클라리넷까지 익혀 모차르트를 근사하게 연주할 날을 고대하며 나는 숨을 양껏 들이마신다.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도 우리가 인간임을 결코 잊지 말자. 모차르트의 음악을 사랑하는 인간임을….
들장미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갓 피어난 어여쁜 그 향기에 탐나서 정신없이 보네.
장미화야 장미화, 들에 핀 장미화….”
슈베르트의 가곡 ‘들장미’를 종종 입에 머금는 즈음이다.
나비떼처럼 팔랑거리면서 산밭을 오가는 사람들,
찔레꽃이 어찌나 예쁘던지 다들 멈칫하고 꽃바람에 젖어든다.
우리나라 들장미 이름은 찔레꽃, 어둑어둑한 세상에 불켜진 봄밤의 가로등 닮은.
집터에 딸린 채전밭 말고도 양지바른 산밭에 도라지도 심고 매실나무도 가꿀 요량으로
이장 형님에게 한 뙈기 물색해주시라 부탁드렸더니 산길에 인접한 조그만 무덤 터를 한 번 일궈보라신다.
사는 날 동안 그냥 밭은 공짜로 임대, 이장 형님이랑 병어찜에다 맑은 술 한잔이면 그걸로 계산 끝이 된다.
둘러보니 엄동 혹한에야 피는 성에꽃처럼 세상이 어두울 때 가장 하얗게 핀다는 들장미가 나를 반겨주었다.
혼자 남겨질까봐 졸졸 따라다니던 그림자도 들장미를 보더니만 단번에 반해서 나를 떠나가 버렸다.
그림자도 잃어버리고 돌아온 오후, 한 번 돌무지를 일궈보겠다고 결심을 세웠다.
그리고 산밭에 매달리기를 며칠, 땀으로 멱을 감으면서 낑낑거렸더니만 제법 밭모양이 생겨났다.
친구들은 나라 걱정에 불면증까지 앓는다는데,
나는 피곤에 절어 초저녁에 밥상을 물림과 동시에 곯아떨어지고 만다.
산밭 입구에 핀 들장미, 찔레꽃 덩굴을 보는 맛으로 벌떡 일어난다.
세상 사는 맛이 이 정도면 족한 것인데 너무 과한 욕심들을 부리지는 않는 건지….
노른자 땅에 피는 돈꽃을 탐하다가 돈독에 오른 사람들은 절대로 모를 테지.
가난과 고독 속에서도 저 아름답고 눈물겨운 들장미를 노래한 슈베르트의 연민 어린 영혼,
그리고 그 향기에 탐이 나서 다가갔다는 한 아이의 맑은 영혼을.
씨감자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둥그렇게 모여 묵찌빠 놀이를 즐기던 아이들은 전자오락기 앞에 각자 따로들 한심스럽고,
회관에 모여 찐 감자를 나누며 나랏일 걱정하던 장년들도 벼멸구처럼 야비한 웃음을 흘리는
지방선거 출마자들이 굽실대는(딱 선거운동 기간만) 먹을 복 앞에서나 히히대는 통.
그래도 나는 감자가 좋더라. 감자탕엔 뼈다귀 말고 감자가 푸짐해야 행복하고,
잘게 썬 감자로 끓인 된장국을 좋아라 하며,
한뎃바람을 피하고서 난로에 굽고 호호 까먹는 감자는 얼마나 고소하고 배부르던가.
몇 해 전 아일랜드 더블린에 한 달포 머물며 지냈었다.
이른바 ‘감자 대기근’으로 굶어죽은 사람들을 형상화한 조각상들을
오다가다 거리에서 두려움으로 마주치곤 하였다.
감자 하나에 목숨 하나였던 나라가 어디 아일랜드뿐이었겠는가.
우리도 그만한 무서운 가난을 헤쳐나온 민족이었다.
애지중지 씨감자마저 나누고, 상부상조하면서 서로의 논밭을 돌보던 정이 넘치는 민족이었다.
키 작은 감자꽃을 닮은 문턱 낮은 집에서 빠져나온 김씨 어른은
“이따가나 비온닥하듬마 두엄을 어야 내야쓰겄는디 워짜까.”
녹물 짙어진 삽이며 쥐가 물어뜯어 해진 삼태기를 리어카에 싣고서 비짝비짝 답답한 걸음이시다.
리어카 한 대 분량이라도 거들어드릴 겸, 호박 구덩이에 넣고 그러게 두엄 조금 얻을까 청하였더니
“집째 떠메고 가도 괘안응게 암걱정 말고 쓰시쇼이” 아들네 대하듯 정겨운 목소리.
고흐의 ‘씨뿌리는 사람’ 그림 같은 풍경이 들녘을 가득 수놓고,
후북이 봄비 내리기 전에 마음조차 바쁘다들.
땅속에 묻힌 씨감자는 울창하게 밭을 덮을 꿈으로 새근새근 잠들었겠다.
그대의 씨감자도 같은 꿈을 꾸고 누웠을까.
- 임의진, 목사, 시인
- 경향. <시골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