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주영하의 음식 100년] 1. 국밥집

Gijuzzang Dream 2011. 3. 11. 13:12

 

 

 

 

 

 

 

[주영하의 음식 100년]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살아온 내력이 담겨 있습니다.

개화기 이후 한국에서는 외식업의 발달과 함께, 음식의 변형이 이뤄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의 음식담론을 주도해온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민속학)가

지난 세기 서울 북촌의 식당과 요리 문화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가장 오래된 외식업, 국밥집’  ‘조선요리옥의 탄생’  ‘대폿집의 유행’  ‘거리음식, 떡장수’ 등

4가지 주제로 나눠 매주 수요일마다 30회 연재합니다.

주영하 교수 :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중앙민족대학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음식전쟁 문화전쟁>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등의 저서를 냈다.

 

 

 

 

 

 

 

 

 

 

(1) 가장 오래된 외식업, 국밥집

 

 

ㆍ후후 불어가며 한 그릇 뚝딱 배고픈 서민의 ‘배부른 한끼’

 

 

 

매일신문은 1898년 1월26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다.

1898년 12월13일자 4면에 흥미있는 광고 하나가 실렸다.

 

“광교 남천변 수월루에서 요리도 팔거니와

겸하여 장국밥을 잘하여 음력 십일월 초일일 위시하여 팔 터이니

군자들은 내림하셔서 잡수시기를 바라오.”

 

이 광고는 그후 12월24일자까지 매일 실린다.

 

수월루(水月樓)는 당시만 해도 고급요리를 판매하던 음식점이었다.

1900년대가 되면 수월루는 목욕탕과 이발소 그리고 커피점이 함께 들어선 요사이 말로 하면

복합 유흥가로 인기를 누린다.
사실 주막에서나 팔았던 장국밥을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고급음식점 수월루에서 판매했는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주지하듯이 장국밥은 조선간장으로 간을 해 끓인 국에 밥을 만 음식을 가리킨다.

당연히 장국밥의 장은 간장을 뜻하는 장(醬)이다.

18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한글 필사본 요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장국밥의 조리법이 적혀 있다.
그 조리법을 요새 말로 바꾸어 적으면 다음과 같다.

 

“좋은 멥쌀을 깨끗이 씻어 밥을 잘 짓고 장국은 무를 넣어 잘 끓인다.

국을 말 때는 훌훌하게 말고 그 위에 나물을 갖추어 얹는다.

약산적도 만들어 위에 얹고 후춧가루와 고춧가루를 뿌린다.”

 

국을 끓일 때 고기를 넣었는지는 이 조리법만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무를 주재료로 간장으로 간을 맞춘 국에 멥쌀로 지은 밥을 말고

그 위에 나물과 함께 쇠고기를 다져 갖은 양념을 한 다음에 간장에 조린 약산적도 올렸으니,

간도 짭짤하면서 밥과 고기를 씹는 맛이 일품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시의전서>란 책은

1919년 심환진(沈晥鎭)이란 사람이 경상북도 상주군수로 부임해

그곳 양반가에 소장돼 있던 조리서를 빌려 필사를 해둔 것이었다.

후에 그의 며느리 홍정(洪貞, 1903~55) 여사에게 전해졌고,

그것이 고인이 된 식품학자 이성우 교수에게 전달돼 1970년대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그렇다고 이 책이 경상북도 상주의 반가음식을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그보다는 왕실이나 서울의 부자들이 즐겨 해 먹던 음식들을 적어둔 것이라 보아야 옳다.

이 책에 나오는 장국밥도 18세기 이래 서울의 북촌과 청계천 주변에서 인기를 누렸던 음식이다.

광고의 문맥을 보면 수월루에서는 원래 장국밥을 요리와 함께 내놓았던 모양이다.

그 맛이 좋다고 손님들이 칭찬을 하자 일품음식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듯하다.

 

 

18세기 중엽이 되면 조선사회에서는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곳곳에 5일마다 열리는 장시(場市)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서울 종로 근처에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전문적으로 공급하는 육의전이 있었다.

그 전에 비해 사람들이 서울로 많이 모여들었고,

그들을 위한 식당들이 지금의 종로와 북촌 일대에서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소의 피를 뜨거운 물에 넣고 응고시킨 선지로 국을 만들어 판매하는 식당이

종로 피맛골 근처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선짓국이다.

조선시대 성균관은 지금의 대학과 비슷했지만,

공자를 비롯한 성리학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계절마다 제사를 올린 점이 달랐다.

이곳에서 제물에 사용할 소나 돼지를 잡는 사람을 반인(泮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제사를 지내고 남은 소의 피나 내장을 식당 주인들에게 팔았고,

그들은 이것을 무쇠솥에 고아서 각종 국밥을 만들어 팔았다.

탕반과 비슷한 음식으로 온반(溫飯)도 있다.

평안도 사람들은 닭고기나 꿩고기로 만든 뜨거운 국물을 밥에 부어 먹는 음식을 온반이라 불렀다.

당연히 닭고기나 꿩고기의 살코기가 밥 위에 올라간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평양온반이 소개돼 서울에서 한때 유행했다.

이 온반도 알고 보면 평안도 지역의 국밥이다.

그러고 보니 요새 한국의 어느 도시를 가도 국밥을 판매하는 식당은 눈감고도 찾을 정도로 많다.

특히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도 국밥 계통의 음식이다.

 
왜 한국인들은 이토록 국밥을 즐겨 먹어오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120년 전에 찍은 사진 한 장(왼쪽)에서

그 정답을 찾아보자.

도포를 입고 머리에 갓을 쓴 남자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는 중이다.

밥상에 놓인 음식을 보니 밥도 있고 국도 있고 반찬도 몇 가지 놓였다.

마침 사진을 찍으면서 유기로 만든 숟가락에 밥을 담아 막 먹으려 한다.

비록 무슨 반찬이 올랐는지는 사진만으로 알 수 없지만,

여덟개의 그릇 중에서 밥그릇과 국그릇이 가장 큰 것은 분명하다.

보통 주발이라고 부르는 밥그릇은

높이가 거의 9㎝, 입의 지름이 거의 13㎝에 이른다.

여기에 밥을 담으면 요새 한국인이 거의 세 끼니에 걸쳐 먹을 수 있는 밥이

담길 듯하다. 밥그릇보다 더 큰 것이 국그릇이다.

높이는 밥그릇과 비슷해 거의 9㎝에 가깝다.

입의 지름은 15㎝가 넘을 듯하다.

그야말로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는 양이 담겼을 것으로 여겨지는 큰 밥그릇과 큰 국그릇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밥을 많이 먹기로 유명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多食)에 힘쓰는 것은 천하에서 으뜸이다.

최근 표류되어 유구(琉球, 현재의 오키나와)에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백성들이 너희의 풍속은 항상 큰 주발과 쇠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이 글은 조선후기 대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이 적은 것이다.

이익은 이것을 두고 먹기를 적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중국 고전에 나오는 문구인 ‘식소(食少)’를 내세워 펼쳤다.

밥을 많이 먹기 위해서는 오로지 벼농사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돈이 되는 다른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데 소홀했다.

그래서 유구국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두고 가난하다고 비웃었다.

 

왜 밥 먹기에 목숨을 걸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나는 유학의 조상 제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생전에 잡수시던 그대로 제사상을 차리는 격식은

중국의 주희(朱憙, 1130~1200)가 편찬했다고 알려진 <가례(家禮)>에서도 강조한 바이다.

송나라 때 중국의 한족들은 곡물로 지은 밥과 함께 밀가루로 만든 면(麵)을 주식으로 즐겨 먹었다.

당연히 주자의 <가례>에서도

조상 제사에 올리는 중요한 제물 중에서 주식으로 반(飯)과 탕 그리고 면을 꼽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반도에서는 밀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밀은 여름 기후가 20도 이상 되면 잘 자라지 않는다.

품종 개량을 하지 않았던 19세기 이전까지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에서는 밀농사가 쉽게 되지 않았다.

결국 밥의 재료 중에서 쌀에 집중된 농사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탕국’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는 제사상의 국이 또 다른 기여를 했다.

아무리 메(밥)와 다른 제물이 많다고 해도 탕국이 없으면 제사를 모실 수 없었다.

이런 관념으로 인해 조선시대 사람들은 식사를 할 때 밥과 국을 으뜸에 두었다.

더욱이 반찬이라야 짠지나 김치 혹은 나물 정도밖에 없던 처지여서

밥과 국을 함께 먹으면 순간적으로 배를 쉽게 불릴 수 있었다.

늦은 밤에 기제사를 모시고 음복을 할 때,

갑자기 늘어난 식수인원의 욕구를 채워주는 데도 비빔밥과 함께 국밥은 안성맞춤이었다.

국밥의 이런 속성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해 줄 때는 반드시 이 음식이 쓰였다.

일제시대에도 있었던 구세군 자선냄비에서 거둬들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탕반을 제공했다는

신문 기사(동아일보 1928년 12월22일자)가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920년대 전국의 근대적 도시에서는

한자로 탕반점(湯飯店)이라 불렸던 국밥집들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골목마다 자리를 잡았다.

대구에서는 육개장의 원조인 대구탕반(大邱湯飯),

개성에서는 편수와 만둣국,

전주에서는 콩나물해장국에 모주라는 술지게미 술을 함께 먹는 탁백이국,

겨울에만 영업을 했던 서울의 추어탕, 서울의 오래된 탕반인 설렁탕 따위를 팔았다.

특히 1920년대에는 전국의 읍 · 면 소재지에 상설시장과 오일장이 자리를 잡았다.

오일장에 가서 먹는 국밥은 장날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장터국밥’ 이란 음식 이름도 생겨났다.

조선후기의 가난한 처지에서나, 일제시대 식민지 상황에서나, 전쟁 와중에서나,

한창 경제개발의 최전선에 서서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 살았던 1960~70년대나

국밥은 사람들에게 배를 불뚝 솟아나게 만들어 준 끼니 음식이었다.

여기에 막걸리나 소주를 한 잔 곁들여 온종일 노동으로 지친 몸을 잠시라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국밥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외식 메뉴였고, 지금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는 메뉴다.

-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

- 경향, 2011-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