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홍난파 가옥

Gijuzzang Dream 2011. 2. 8. 00:54

 

 

 

 

 

 

 

 

홍난파 가옥 / 친일 작곡가로 전향한 홍난파

 

 

 

 

 

‘울 밑에 선 봉선화야...’ 작곡한 홍난파, 우리나라 근대음악을 개척하다

 

「봉선화」, 「고향의 봄」을 작곡한 사람은 누굴까?

우리는 흔히 봉선화 하면 홍난파가 만든 노래라고 알면서도

봉선화 작사가가 따로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로 시작하는 봉선화를 작곡한 사람은 바로 홍난파이고 작사가는 김형준이다.

 

이 글의 주인공 홍난파는 작곡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평론가, 실내악단 창시자,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한국의 근대음악을 개척하였다.

 

홍난파 가옥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강북삼성병원 네거리로 가야 한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로 나와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강북삼성병원 네거리가 나온다.

바로 서울도성의 서쪽 대문이었던 서대문 자리이다.

병원쪽 방향으로 병원을 지나 계속 가면 서울시교육청 정문이 나오고

바로 옆 옛 중앙기상대 입구 벽을 따라 오른 쪽 골목 입구에 ‘홍파동 홍난파 가옥’을 가리키는

붉은색 간판이 보인다. 간판을 따라 100여 m 올라가다보면 길가에 아담한 붉은 2층 벽돌집이 나온다.

종로구 홍파동 2번지 16호. 홍난파 가옥이다(홍파동과 홍난파는 연관이 없다).

 

 

 

1900년대 초반 부근 송월동에 독일영사관이 위치하고 있어서 이 일대는 국내 독일인 주거지였다.

홍난파 가옥도 1930년에 독일인 선교사가 지었다.

2004년에 문화재청에서 근대등록문화재 제90호로 지정하였다.

 

원래 벽돌담 안에 있었는데 몇 년 전 이 일대를 재정비하면서 주변 민가를 철거하였고

뒤이어 월암근린공원이 들어서게 되자 벽을 헐어 버리고 이제는 누구나 손쉽게 집안에 들어가게 해놓았다.

 

길가에 접한 건물 한쪽에 풍성하게 자란 담쟁이덩굴이 두드러진다.

공원 쪽에서는 가옥의 정면이 훤하다. 2층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상 1층과 지하 1층이다.

창가에는 붉은 봉선화 화분이 있다. 이 집은 지붕이 가파르며 거실에 벽난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남쪽 현관과 이어지는 복도의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거실과 침실을 두고

거실의 아래쪽에는 지하실을 두었다. 가옥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다.

지난 2006년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공연장을 겸한 전시관으로 꾸몄다.

1층에 있던 두 개의 침실은 헐어버리고 공연장과 전시실을 꾸몄다.

길가와 접한 벽난로 옆은 피아노를 중심으로 무대를 마련하였다. 창가에는 홍난파의 흉상이 있다.

 

 

 

 

난이 피어나는 언덕, 난파

 

홍난파는 본명이 영후(永厚), 난파(蘭坡)는 그의 호로 난이 피어나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경기도 화성 사람으로 그의 부친은 역관 출신이다.

영어를 잘해서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장본인이었다.

 

집안이 부유하여 성장과정에서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 집안에서는 의학 공부를 원했고

본인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음악에 마음을 두었던 관계로

입학한 지 1년 만에 부친 몰래 학교를 그만두고

20세에 일본 동경음악학교로 유학가서 근대음악에 대한 입문과정을 겪게 된다.

 

1919년 경성양악대 제1회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1920년 예술가곡 「봉선화」의 원곡인 「애수」를 작곡하게 된다.

1929년 「고향의 봄」, 「퐁당퐁당」 등을 작곡하면서 『조선동요백곡집』을 발표하였다.

1931년 33세 때 미국 셔우드음악대학으로 유학가게 되었고,

1933년 귀국하여 경성방송국(현 KBS)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지휘하였다.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음악만필』을 출간하였다.

1941년 8월 30일 경성요양원(현재 위생병원)에서 늑막염으로 별세하였다.

 

홍난파는 홍파동 가옥에서 1935년 4월부터 1941년 별세할 때까지 6년간 살았다.

가옥 내 벽면 패널에 그의 일생과 활동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있다.

 

미국 유학 시절인 1932년 재미독립운동가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귀국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하는 등 활발히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1937년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서 72일간의 옥고를 치른 후

친일작곡가로 전향하였다.

「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를 작곡하고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였다.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등 친일 가요와 글을 남겼다.

그 후에는 최초의 음악산문집 『음악만필』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과 친일행동의 틈바구니에서 고민하였지만 끝내 친일파로 남았다.

 

『음악만필』의 「광상소곡(狂想小曲」에 보면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배경이 없는 예술은, 국경을 넘기에도 힘이 든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사상전환에 따른 한 예술가의 고뇌를 잘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홍파동 가옥은 이러한 음악가의 아픈 지난 생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창가에 서서 사상의 전향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러한 과정을 이 가옥은 아무런 여과 없이 우리들에게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다.

 

1층 침실을 터서 만든 공간에 피아노가 있고 2~3명이 담소할 수 있는 공간과 더불어

스피커에서는 감미로운 우리네 가곡이 흘러나온다. 예스런 의자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음악을 들으니

금방이라도 나그네를 만나려고 난파 선생이 나오실 것 같다.

 

홍파동 가옥을 난파는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재혼한 부인과 더불어 종종 남산에 올라가 홍파동 가옥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음악만필』의 문장이 눈길을 끈다.

‘음악이란 보름달과 같다. 이것을 보고 슬퍼하는 자도 있지마는 때로는 기뻐하는 자도 있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매년 8월 말 경에 홍난파 가곡제가 가옥 뒤편 월암공원에서 열린다.

공원에는 그의 노래비가 서있다. 「고향의 봄」과 「봉선화」이다.

 

홍난파 가옥에 갈 생각이라면 가급적 오후 4시 이전에 찾아보기를 권한다.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 Hi 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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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유산] 37. 홍난파 가옥